[INTERVIEW] 부재의 영화, 혹은 주저함의 화법에 대하여
강예은 감독 인터뷰 | 코아르 독립영화 감독 인터뷰 기획
강예은의 영화적 미로
강예은은 2010년대와 2020년대를 거쳐 에세이 형식의 영화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감독이다. 두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장편으로 한국 독립영화 현장에 낯선 공기를 불러들였고, 지난 2025년 두 번째 장편영화 <Vacation>을 내놓았다. 다작의 감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2017년에 공개된 데뷔작 <치치>로 시작해 독창적 형식과 근원적 질문을 지닌 자신의 영화 세계를 꾸준히 축적하고 있다.
강예은의 영화에는 모종의 공포감이 서려 있다. 존재와 부재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 누군가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남아 있는 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시간이 그의 영화가 탐구하고 있는 주제다. 그곳에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야 할지, 혹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망설이고 헤매는 존재가 있다. 그런 면에서 강예은의 영화는 관객에게 저마다 탐정의 감각을 갖길 요청한다. 우리는 마치 탐정이 된 것처럼 불완전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단서 삼아 비밀스러운 사건을 탐색해야 한다. 그 탐색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존재와 부재의 경계가 미끄러지는 불가해한 어둠의 세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뒤늦게 처음 본 그의 영화는 <치치>였다. <치치>에는 새장에 갇힌 새와 카메라 안에 놓인 여성을 중심으로 출처 없는 말들과 맥락 없는 풍경들이 부유한다. 이후에 본 <ㅅㄹ, ㅅㅇ, ㅅㄹ>은 더욱 섬뜩했다. 감독 본인의 유년 시절을 담고 있는 <ㅅㄹ, ㅅㅇ, ㅅㄹ>의 파운드 푸티지는 한편으로 <치치>의 새와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 회고적 혹은 고발적 성격을 지닌 이 영화는 캠코더의 프레임 안에 꼼짝 못 하고 갇혀 주변을 맴도는 소음과 노이즈들을 감내해야만 하는 불안정성으로 가득하다. 그 과거는 시차를 거쳐 오늘날의 관객과 공명한다.
<차가운 새들의 세계>와 <Vacation>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주제를 좇는다. 그가 경험한 낯선 타인의 죽음. 혹은 타인의 낯선 죽음. 두 영화는 그 실제 사건을 중심으로 죽음 이후의 감정이 주는 불가해성의 미로를 떠돈다. 그가 말하는 죽음은 논픽션에 기반하지만 동시에 픽션의 화법을 지닌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영화들의 이미지와 사운드를 더듬으며 실제 사건을 떠올리고 겹쳐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그 탐색의 감각을 오롯이 체화하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Vacation>에서 언급하듯, 그의 영화는 보르헤스의 무한히 갈라지는 두 길의 미로를 떠올리게 만든다. 여러 갈래로 나뉘는 길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나의 기억이고 무엇이 타인의 기억인지, 어디까지가 나의 감정이고 나의 이야기인지 끊임없이 헤매며 질문하며 나아가야 한다. <Vacation>은 그 영화적 미로를 구성했다는 점에서 강예은의 첫 번째 작가적 챕터를 완결한 작품으로 다가온다. 그는 올해 초에 해외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세 번째 장편 영화를 편집 중이고, 지속 가능한 작업에 대해 고민 중이다. 지난 작업을 돌아보며 화상으로 <Vacation>을 마무리한 소회를 물었다.
김민세
작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Vacation>(2025)을 공개했고, 올해 초에 싱가포르로 이주했다고 알고 있다. 해외 생활은 어떠한지.
강예은
한국 영화를 보기에 정말 척박한 곳이다. 홍상수의 신작이나 <호프>를 보고 싶었는데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최근에 좋은 한국 독립영화들이 계속 개봉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작품들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최승우 감독의 <지난 여름 이후>도 궁금하다. 뚜렷한 작가적 색채를 지닌 한국 독립 감독들이 소개되고 돋보이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사실 나를 작가적으로 다루고 싶다는 인터뷰 제안이 왔을 때 약간 의아했다. 스스로 내 작업을 돌아봤을 때, 뚜렷한 작가적 색채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이다.
김민세
개인적으로는 <Vacation>이 한 작가에게 어떤 분기점이 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Vacation>을 중심으로 이전의 작품은 한번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제안을 드렸다. 첫 공개 이후 몇 개월이 지난 시점인데, 최근에는 어떤 작업을 이어가고 있을지.
강예은
개인적인 일을 정리하느라 영화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는 일을 겪었고, 그것을 소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당연히 마음 한구석에는 다음 영화의 구상과 아이템 같은 것들이 불쑥 튀어나오긴 한다. 작년에 새 작업의 촬영을 마치고 편집 중이다. 한두 달 만에 완성하고 싶은 작업이었는데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어떤 단계까지는 굉장히 수월하게 되는데 그 너머의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리는 타입이다. 그래서 작업의 호흡 자체가 빠른 창작자들이 부럽기도 하다. 다만 주저하고 망설이는 시간이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영화들도 있을 것이다. 내 작업은 그런 호흡에 더 치우쳐져 있지 않을까.
진행 중인 작업을 잠깐 소개해보자면. 사랑의 시작이 주는 황홀감과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논리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정신의 작용을 담아보고자 하는 영화였다. 근데 작업 기간이 길어지면서 다른 생각이 든다. 사랑의 시작보다는 그 이후에 오는 것들. 사랑이 일상이 되었을 때 미지근해지는 상태라고 할까. 아무래도 작업을 처음 구상하고 계획했던 때와 지금 나의 마음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에 도취한 긍정적인 감정을 담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이전 작업처럼 무거운 톤의 영화가 될 것 같다.
김민세
감독님의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공포감이다. 에세이적인 영화에서 유령적인 존재를 다루거나 유령성을 지닌 발화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감독님의 영화는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공포감이 있다.
강예은
<ㅅㄹ, ㅅㅇ, ㅅㄹ>(2020)는 가부장적인 폭력을 다루고 있다 보니 소재적으로 공포감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최근작부터는 부재라는 주제에 관심을 드러내 왔는데, 어떤 대상의 부재라는 것은 불가피하게 공포심을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것이 죽음일 경우에는. <차가운 새들의 세계>(2022)와 <Vacation>은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똑같은 하나의 사건에서 출발했다. 부다페스트에서 교환 학생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내 다음 세입자로 들어온 친구와 며칠간 함께 살게 되었고,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 친구가 발코니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와 친밀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슬퍼할 이유는 없지만, 누군가 죽었는데 슬퍼하지 않는다는 게 괜찮은 건가 하는 감정들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친구는 죽은 사람이니까 유령이 되어서 이 집에 존재할 것 같은 거다. 유령이라고 하면 되게 무서운데, 그 친구는 백인이니까 백인 유령을 떠올리면 너무 낯설고.
김민세
그런 의식의 흐름이 <Vacation>에서 불명료한 내레이션과 자막을 통해 나타난 걸까.
강예은
그렇다. 굉장히 이상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완전한 공포까진 아니더라도 누군가 부재하는 상태에 대한 막연한 상실감을 느꼈다. 한편 내 영화는 목소리가 중요한 요소인데, 그 목소리가 명확한 대사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없이 부유하는 상태로 존재하다 보니까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다.
김민세
본인의 목소리를 내레이션으로 사용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스스로 내레이션을 발화한다는 것은 자신이 이 이미지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적절한 음성의 형태 내지는 텍스처를 직접 만들어간다는 선택에 가까운 것 같다. 본인의 음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영화 안에서 표현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강예은
사실 <차가운 새들의 세계>에서는 영화에 등장한 정수지 배우가 모두 내레이션을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일부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내 목소리로 다시 녹음했다. 내가 원하는 음성의 텍스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타인에게 설명하고 묘사해서 만들어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떤 감정 상태에 들어가야만 나올 수 있는 목소리가 있는데 그걸 타인에게 디텍팅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내레이션을 하나씩 녹음해 보면서 내가 원하던 음성의 텍스처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내레이션에 있어서는 항상 전달력보다 정서적 상태를 우선순위로 둔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영화에 짙게 깔린 막연한 상실감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더듬어 간다. 처음부터 명확히 생각한 목소리를 구현하기보다는 더듬어 가며 자각하는 과정에 가깝다.
김민세
음성의 이러한 면은 감독님의 영화에서 언어가 명확한 텍스트로 드러나길 포기하는 지점과 연관하는 것 같다. <차가운 새들의 세계>에서는 음성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쉽게 파악되지 않고, <Vacation>에서 텍스트는 미처 읽기도 전에 사라진다. <ㅅㄹ, ㅅㅇ, ㅅㄹ>이라는 제목은 텍스트는 존재하는데, 명확히 발화되길 요구하지 않는 것 같다. 음성과 텍스트가 담은 내용이 명확하게 들리거나 읽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기능한다고 생각하나.
강예은
나는 항상 어떤 의문과 질문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그 끝에서 답을 찾는 것도 아니고,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시작한다. 내 영화는 그 질문의 과정을 담는 것이기 때문에 주저함의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의문에 대해 정리할 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써놓고 나서 이후에 그것을 생략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정리된 글을 논리적인 형태로 이해하는 게 나에겐 핵심적이지 않은 거다. 중요한 것은 논리성보다 정서다. 그래서 그 텍스트들이 어떤 정서를 자아내는 방식으로 기능하길 바란다. 대부분의 영화는 어떤 순간에 이런 정서를 느껴야 한다고 지시하기 마련인데, 나는 그런 방법을 선호하진 않는다. 모호하게 남겨진 불분명한 텍스트를 마주하면 그 빈자리를 관객 자신의 맥락을 끌어와서 채워야 한다. 그것이 내가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김민세
<Vacation>의 장면을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고 싶다. 영화의 중반에 검은 화면 위에 이미지나 텍스트가 산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마치 검은 화면을 캔버스 삼아 이미지와 텍스트를 덧칠하는 것 같달까. 본인에게 프레임 혹은 스크린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강예은
일단 검은 화면은 여러모로 나에게 흥미로운 요소다. 이미지라는 것은 영화의 존재 기반과 다름 없고, 한 영화에서 이미지를 없애버린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근데 그 이미지를 없애버렸을 때, 과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완전한 없음의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 모순적인 상태가 흥미롭다. 이미지와 사운드에 기반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영화 매체에서 이미지라는 요소를 떼어놓으면 어떤 효과가 발생할지에 대한 형식적 관심 또한 있다.
프레임 또한 나에겐 재밌는 긴장 상태다. 만약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면 프레임에 관한 논의가 나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근데 나는 영화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프레임이라는 요소는 이미 그곳에 있는 거다. 프레임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무엇을 담을지 생각하는 동시에 무엇을 담지 않을지 판단해야 한다. <Vacation>에서 이미지와 텍스트는 그 안에 담긴 내용 자체를 보여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사라지고 남은 검은 화면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보여줄 수도 있다. 그간의 작업에서 프레임은 있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 없음의 상태를 지각시키는 방식으로 기능했던 것 같다.
검은 화면의 논의로도 이어가자면. 검은 화면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미지가 작동해야 한다. 사운드도 마찬가지다. 만약 침묵을 강조하고 싶다면 그 이전의 사운드가 적절히 작동해야 한다. 부재의 상태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존재의 상태를 적절히 조율해야 하고, 내 영화의 프레임 안에 드러나는 것들은 이 부재를 작동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뒤라스의 <대서양의 남자>에 매료되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뒤라스는 이 영화에서 검은 화면을 통해 부재를 존재하게 하려고 시도하는데,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러한 상태를 어렴풋이 느끼게 할 수는 있다. 항상 이런 모순적인 상태에 흥미를 느낀다.
관습적 언어와 불화하는 영화, 발견의 연속으로서의 필름 메이킹
김민세
평소에 어떤 영화와 텍스트들을 접하는지. 자신의 작업과 가까운 작업을 접하는 편인가, 오히려 전혀 다른 작업을 즐기는 편인가.
강예은
가리지 않고 다 보는 것 같다. 어떤 작업을 준비할 때는 레퍼런스 차원에서 에세이 형식의 영화를 보고 최대한 흡수하려고 하지만,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려고 한다. 평소에는 미국 시트콤 <오피스>를 즐겨 보기도 한다.
김민세
어렸을 때 독문학에 관심을 가졌고, 시를 쓰고 싶다고 한 이야기를 들었다. 본인에게 시 쓰기와 영화 만들기는 어떤 의미인가. 서로 교차적으로 영향이 가기도 할지.
강예은
최근 들어서 시를 많이 읽지는 않지만, 시나 소설을 비롯한 텍스트 형식의 매체를 좋아한다. 다양한 글을 읽던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좋아하던 글을 반복해서 읽는 경우가 잦아졌다. 가령,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매우 좋아하고 반복해 읽는 소설 중 하나다. 시를 쓰는 것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신내림을 받은 것처럼 발산하는 방식으로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해부학자처럼 언어를 해체하고 조립하듯이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산문의 형태로 시작해서 그 일부를 지우고 생략하면서 시의 형태를 갖춰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의 영화 제작 방식을 시 쓰기에 비유한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영화에 드러나는 텍스트만을 봤을 때는 시와 닮아 있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사실 시 작업과 영화 작업은 매우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시를 쓰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못 썼던 이유는 시 쓰는 몸의 상태가 없기 때문이다. 시 쓰는 몸이라는 것은 자기 안으로 천착해서 들어가는 상태를 말한다. 영화는 트랙이 매우 다양하고 분산적인 매체이지 않나. 시는 그에 비해 하나로 수렴하는 집약적인 매체 같다. 다룰 수 있는 요소가 언어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시가 완성된 형태로 나왔을 때는 함축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다 보니 이미지적인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작업하는 과정에서는 정말 언어라는 요소 하나만을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
조금은 비겁하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영화는 시에 비해 타협할 수 있는 요소가 많은 것 같다. 만약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한 적합한 언어를 찾지 못한다면, 이미지나 사운드처럼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갈래가 있다.
김민세
언어적인 요소를 갖고 유희하는 것 같은 태도도 발견된다. 음성 내레이션만 흐를 때도 있고, 자막만 나올 때도 있고, 그것이 일치되며 동시에 흐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인 영화의 관습을 넘어 장난을 치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강예은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말과 텍스트를 활용하는 방식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영화는 사운드와 이미지가 상호작용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화면 안에 존재하는 말과 화면 바깥에 존재하는 말의 갈래를 나누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조작해 볼 수도 있다. 가령 일반적으로 자막은 말의 지시체로서 존재하는데 이걸 분리하면 어떤 효과가 나올지 궁금한 거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한 장면에 가장 적합한 말하기 방식은 뭘지 고민한다. 물론 그렇게 작업하는 일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에 유희적으로 시도하는 면도 있다.
김민세
<Vacation>의 영화 속 타이틀은 ‘VACA / (행갈이) / TION’로 나온다. 이 또한 언어를 재구성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강예은
‘Vacation’은 매우 익숙하게 접하는 일상어인 동시에, 이 영화에 제일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Vacation’은 ‘Vacancy’, 다시 말해 ‘비어있음’ 혹은 ‘없음’의 어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 어원을 명확히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어간인 ‘VACA’와 어미인 ‘TION’을 분리했다. 마지막 타이틀에서 ‘O’를 빼고 ‘VACATI N’으로 표현한 것도 없음을 표현하기 위한 타이포그래픽적인 장난이다. 알아차리는 관객은 거의 없었지만 만족한다.
김민세
감독님의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가 한 사람의 몸, 다시 말해 명확한 주체나 존재를 담아내기에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이 주인공처럼 물리적으로 존재할 때도 있지만, 그것을 명확한 존재로서 파악하기 어렵다. 영화에서 몸을 비롯한 물리적 존재를 담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
강예은
카메라는 항상 눈 앞의 몸을 붙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존재를 카메라에 담는다고 해서 그를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 카메라를 떠나서 내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람을 제일 모르겠다. 어느 순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 삶과 경험에 기반해 그 사람을 보는 것 아닌가. 이러한 이해 불가능성에 관한 생각을 항상 전제로 갖고 있다.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 물리적으로 맞닿을 수 있음에도 이 사람을 알 수 없다는 불가피한 사실에서 공허함을 느끼곤 한다. 한편, 사람을 보여주지 않았을 때보다 사람의 몸을 보여주었을 때 그 이해 불가능성의 효과가 극대화된다고 생각한다. 모순적이게도 그게 내 영화에 몸이 필요한 이유다.
<치치>에 등장하는 여성을 예로 들자면, 영화에서 여성을 담고 있는 숏 사이즈가 점점 타이트해진다. 카메라가 인물에 점점 가까이 들어가는데, 인물은 중앙에서 벗어나 있는 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차가운 새들의 세계>에서도 인물에게 가까이 들어가는 순간 그 사람은 창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가까워져도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제논의 역설’처럼 카메라가 가까워져도 그 인물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표현들이다. 아무리 친밀하고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내가 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언제나 그런 연결됨을 꿈꾸지만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김민세
사람을 좋아하는 편인가.
강예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이 말도 위악을 떠는 것에 가깝다. 사람이 싫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 작용하며 살아야 하고, 사람이 싫다는 의견을 표하는 것도 어떤 사람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다.
김민세
<치치>(2017)와 <차가운 새들의 세계>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무용한 몸짓을 반복한다. 특정한 무언가를 하고 있기보다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고, 머리칼을 넘기고, 창문 앞에 서 있고, 소파에 누워 있는 식으로.
강예은
여성의 몸을 특정한 성적 정체성으로 의식하진 않았다. 완성된 영화를 떠올리면 남성보다는 여성의 몸이 어울렸다. 사소한 몸짓을 보여주는 이유는 그들이 그저 존재로서 존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디렉션을 주지도 않았다. <치치>의 경우에는 출연자와 카메라를 방 안에 두고 나와 촬영감독은 밖에 나가 있었다. 그저 빈방 안에 출연자와 카메라만 존재했던 거다. 그 안에서 손도 만지고 머리도 만지고 하는 움직임이 자연스레 찍혔다. <차가운 새들의 세계>의 경우는 정해진 동선을 전달하긴 했지만, 사소한 행동을 디렉팅하진 않았다. 나는 인물이 찍힌 이미지와 다른 영화적 요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가 있는가에 관심이 많고 그 과정에서 구상이 나온다. 그래서 인물에게 특정한 몸짓을 요청할 이유가 없는 거다. 쿨레 쇼프 효과가 작동하는 방식처럼 말이다.
김민세
결국 발견의 과정을 통해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강예은
그렇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영화들이 모두 그런 방식 안에서 만들어졌다. 최소한의 세팅만 해놓고 나는 기다리고 있는 거다. 편집 과정 또한 발견의 연속이다. 머릿속에 정해진 그림이 있고 퀼트처럼 짜 맞추기보다는, 열어두고 채집한 다음에 편집 과정에서 재발견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편집이 항상 오래 걸린다. 구상안을 미리 쓰고 작업한 적은 있지만 처음 구상 그대로 된 작업은 단 한 번도 없다. 언제나 입구로 들어가긴 했는데 출구는 모르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김민세
그런 방식에 있다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영화가 어디든 흘러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영화를 시작하는 과정은 어떠한가. 어떤 순간들에서 영화로 만들어질 가능성을 발견하는가.
강예은
모든 것이 내 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영화라는 것은 나 혼자 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졌을 때 시작될 수 있다. <치치>와 <ㅅㄹ, ㅅㅇ, ㅅㄹ>는 이 영화가 지금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이걸 만들지 않으면 내 삶이든 나의 작업이든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기분에 등 떠밀리듯이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차가운 새들의 세계>와 <Vacation>은 그보다 거리를 두고 무언가를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작업이다. 당시 내 삶에 존재했던 의아함이 이제는 정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지속에 대한 고민
김민세
동시대에 있어 미술에서의 영상 작업과 영화는 서로의 장소를 교차적으로 오가고 있다. 감독님의 작품도 그런 맥락 아래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미술 영상 작업과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강예은
아무래도 서사나 캐릭터가 뚜렷하지 않아서 그렇게 보는 관객들도 있을 테다. 다만 나에게 미술 작업은 오히려 매우 낯설다. 영화관과 미술관의 관람 환경은 너무 다르지 않나. 갇혀서 어두컴컴한 환경에서 보는 것과 비교적 열려 있는 환경에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미술관에서는 관람의 자율도가 훨씬 높다. 나는 관객들이 내 영화를 꼼짝없이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고 봤으면 좋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봤을 때 유용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미술 작가와 협업해 영상 작업을 한 경험이 있었는데, 그들의 방식은 보다 컨셉추얼한 것에 가깝다. 개념 미술처럼 어떤 하나의 개념이 이 영상에서 드러나면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 영상은 어느 부분을 어떻게 보든지 그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반면 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서적인 끈을 붙잡고 가야 체험할 수 있다.
김민세
최근작인 <Vacation>을 극장에서 본 경험은 어땠나.
강예은
<Vacation>은 당시 내 삶의 변화와 밀접한 작품이다. 힘든 시간을 지나면서 완성한 만큼 관객에게 선보였을 때 해방감이 매우 컸다. 비로소 내 삶의 한 챕터가 지난 것 같달까. 극장 경험도 인상적이었다. 눈이 내리는 것처럼 스크린의 빛이 확 쏟아지거든. 함께 여행에 동참했다가 빠져나오는 영화이기 때문에 극장 환경에서의 집단 경험이 유효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모두가 똑같은 경험을 한다는 말은 아니다. 입구에 함께 들어갔다가 각자의 미로에서 길을 잃은 채로 놓여있게 되는 경험이다. 그래서 다른 작업에 비해 극장 환경이 더 필요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김민세
장편 형식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짧은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ㅅㄹ, ㅅㅇ, ㅅㄹ>은 62분이었고, <Vacation>은 67분이었다. 짧은 영화의 호흡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강예은
러닝타임을 의식하면서 작업하진 않는다. 다만 구상 단계에서 시작과 끝을 만들었을 때, 단편의 호흡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의 길이가 되지는 않고, 60분을 조금 넘는 시간이 가장 적합했다.
김민세
감독님의 영화가 가진 불분명함은 때로 관객에게 낯설게 다가갈 것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을 어느 정도 의식하게 되나.
강예은
나 또한 내가 불친절한 영화를 만들어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많은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받고 싶다는 마음과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항상 줄타기한다. 그때마다 내가 내렸던 선택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관객의 반응이나 영화제를 통한 소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작업의 지속 가능성 때문이다. 생각지 못한 감상을 전해주는 관객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작업 안에서 관객과 만나는 경험을 늘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