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성현] 게임의 규칙: 변성현 영화의 장르적 세계와 현실의 기척

장르와 장르 바깥의 영화로서 변성현의 영화들

2026-05-25     김민세

2020년 전후 이래로 한국 영화를 돌이켜 보았을 때, 근래 한국 감독들의 큰 야심 중 하나는 한국을 한국이 아닌 곳으로 만드는 것인 듯하다. 이러한 특징은 넷플릭스 자본을 등에 업은 젊은 감독들의 최근작에서 유독 두드러진다. 이들의 영화는 그만의 스펙터클을 확장하기 위해 필연적이라는 듯이 또 다른 시대와 공간을 불러오거나, 한국에서는 낯선 세계관이나 장르를 활용한다. <파수꾼>(2010)으로 소년의 세계를 누아르적 관계성으로 엮었던 윤성현은 <사냥의 시간>(2020)이라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이를 반복했다. 극도의 미니멀한 세팅 안에서 장르적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증명한 이충현의 단편 <몸값>(2015)은 재난 영화의 무대로 세계관을 확장한 시리즈 <몸값>이 되었으며, 강력한 주제로 드러났던 인신매매와 여성에 대한 문제는 <발레리나>(2023)의 디스토피아 세계관으로 확장되었다. 독립적 성격의 장편 혹은 단편으로 그만의 장기와 개성을 보여주었다면, 이들의 작가성이 상업화 혹은 프랜차이즈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상업 감독으로서 다음 관문을 위한 시험대에 다름 없을 것이다.

한편, 지난 몇 년간 한국 영화에서는 시공간이나 차원을 넘나드는 SF 장르의 시도 또한 두드러졌다. <승리호>의 조성희와 <외계+인>(2022)의 최동훈, <정이>(2023)의 연상호, <원더랜드>(2024)의 김태용. 그리고 어쩌면 이 목록의 출발점에는 <인랑>의 김지운이 있을 것이다. <더 문>과 <고요의 바다>처럼 지구 밖의 우주로 향하는 영화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들은 '한국형 SF'라는 단어로 수식되곤 하는데, 정작 이들의 목표는 기존의 한국 영화가 보여주었던 어떤 풍경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가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기성 감독이 스스로 만들었던 영화적 세계가 한국 바깥으로 나갔을 때 어떻게 지탱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장르 합성어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1990년대 말 이래로, 할리우드와 해외 관객을 의식하는 한국 감독이 지닌 미학적 야심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2020년대에 접어든 지금, 한국 영화는 어느새 새로운 관문을 앞에 둔 것처럼 보인다. 한국 영화는 한국이라는 풍경 위에 어떠한 세계를 겹쳐놓을 수 있는가? 장르에 대한 도전을 일종의 관문처럼 앞둔 한국 감독들에게 그만의 세계는 어떻게 탄생할 수 있는가?

 

변성현은 이러한 새로운 질문 속에서 일찍이 자신의 세계를 곤고히 구축해 오고 있는 작가다. 그의 영화는 힙합 무비에서부터 로맨틱 코미디, 누아르, 정치 스릴러, 액션, 블랙 코미디를 넘나들면서도 그만의 작가적 개성으로 가득하다. 그는 장르에서 기대할 법한 클리셰를 집착적으로 비튼다는 면에서 수정주의적인 연출자다. 동시에 그의 영화에는 그 세계 속에서만 작동 가능한 어떠한 규칙이 감지된다. 그 규칙은 장르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땅이 지닌 현실, 혹은 한국 영화가 보여준 컨벤션 자체를 뒤튼다. 영화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은 배경으로서만 작동하고, 그 안을 구성하는 것은 변성현적 세계 안에서 가능한 고유한 윤리와 법칙이다.

앞서 최근의 한국 영화가 지닌 미학적 강박을 '한국을 한국이 아닌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으로 설명했다면, 그것에 항상 따라오는 것은 동시대의 풍경을 건드리고자 하는 윤리적 의식이다. 즉, 지금의 한국 영화는 한국 영화가 지닌 룩(look)에 멀어지면서도 한국의 현실을 반영하려는 이중의 욕망 아래 있다. 변성현의 영화는 이러한 이중의 욕망이 지닌 긴장을 외면화한다. 특히 그가 장르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불러오며 만드는 한국 아닌 한국의 풍경은 특정한 경로를 거쳐 동시대 한국을 건드는 기이한 이미지에 도달하는데, 이러한 순간은 동시대 한국 감독의 시도 중 가장 눈여겨볼 만 하다. 이 성취는 그가 동시대 한국에 대한 비판적 텍스트를 촘촘히 구성하는 것 이전에, 수 편에 걸쳐 축적된 엄격한 영화적 규칙들이 그의 작품 전반에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길복순>(2023)에서 차민규는 '작품'을 위해 다짜고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그를 실은 택시가 도착하는 곳은 설원 한 가운데 놓인 술집이다. 택시에서 내린 차민규는 코트 깃을 한 껏 올린 채 술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서부극을 연상시키는 총질이 벌어진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한국 바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게, 이 장면의 많은 요소들은 속된 말로 '저세상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서부극적인 술집 풍경 한 가운데 놓인 한국인의 이미지. 한국 영화에서 특정한 이미지로 소비되었던 배우 설경구가 전문 킬러로서 자신을 둘러싼 러시아인들에게 총을 쏘아 대는 모습들. 애초에 조직화된 전문 킬러들이 존재하고 그 킬러들을 관리하는 회사가 존재한다는 설정부터 '저세상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나, 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장면은 왠지 모르게 이국적임을 넘어서 공상과학적으로 느껴진다. 무엇보다 눈보라가 흩날리는 풍경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코트 차림의 차민규의 뒷모습. 이 이미지에서 서부극의 낭만을 상상적으로 되살린 <헤이트풀8>(2015)의 설원 속 잡화점과, 외계 행성에 발을 딛는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의 케이(K)가 동시에 떠오른다.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설경구는 국경을 넘은 것뿐만 아니라 또 다른 행성 내지는 차원으로 진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영화의 첫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황정민이 문신 가득한 일본 야쿠자로 등장해 일본어를 늘어놓는 모습이나, 전철이 오가는 동호대교 위에서 킬러 간의 결투가 벌어지는 모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국 혹은 한국 영화의 풍경을 배반한다. 이는 변성현의 또 다른 영화인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에서부터 느껴왔던 것이다. 그는 <불한당>의 본격적인 시작을 여는 장면에서 양손에 두부를 들고 먹던 <오아시스>(2002)의 설경구가 두부 대신 버거를 꺼내어 무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그 후에 볼 수 있는 것은 <미생>(2014)의 임시완이 설경구가 운전하는 스포츠카 위에서 외국 여성들과 몸을 섞는 모습이다. 조현수는 교도소에서 출소하고 한재호는 그를 맞이하며 스포츠카를 몰고 빠르게 내달린다. 이 경쾌한 오프닝을 통해 <불한당>은 설경구와 임시완을 이들이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인물의 세계로 던져놓는다. 변성현의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이 변칙적인 순간은 지금 스크린에 놓인 배우가 익히 알려진 캐릭터성을 벗어내고 영화적 탈선을 도모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보면 <길복순>의 첫 장면에서 길복순의 목이 잘리는 상상적인 이미지는 전도연이라는 배우의 영화적 죽음이자 또 다른 캐릭터로서의 재탄생을 알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규칙과 관습을 깨부수는 영화는 어떤 것으로 지탱되는가? 동시에 쉬이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길복순과 오다 신이치로 간의 결투가 명확한 규칙 안에서 벌어지고 결국은 그것이 맥없이 깨어진다는 점에 있다. 둘은 '공정한 경쟁'이라는에 따라 각자 일본도와 도끼를 들고 결투에 임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을 맞는 경우의 수를 읽은 길복순은 앞서 정한 규칙에 무색하게 마트가 닫을 시간이라며 총을 꺼내 들고 그를 쏴 죽인다. 이때 길복순은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끝내 그 규칙을 어긴다. 여기서 전도연은 한국 영화라는 규칙을 배반하고 있는 것일까? 한편, 이를 통해 변성현은 두 차례에 걸쳐 영화적 규칙을 만들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하나는 이 세계에는 목숨을 담보로 하더라도 진검승부라는 비합리적 합의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인물 또한 돌봐야 할 딸을 위해 합의를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킬러로서의 규칙과 엄마로서의 규칙. 이 두 가지 규칙은 모순적이지만 양립한다. 전자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만, 후자는 현실에 달라붙어 있다.

 

<길복순>의 세계관을 둘러싼 여러 규칙은 이러한 모순을 지속적으로 건든다. 킬러 회사 엠케이가 제안한 세 가지 규칙을 떠올려 보자. '첫째, 미성년자는 죽이지 않을 것. 둘째, 회사가 허가한 작품만 할 것. 셋째, 회사가 허가한 작품은 반드시 트라이 할 것.' 여기서 두 번째와 세 번째 규칙은 살인 청부가 전문화된 영화의 장르적 세계관을 강화하는 설정이다. 근데 첫 번째 규칙이 주는 인상은 다르다. 살인은 괜찮지만, 미성년자 살인은 안 된다는 말인가? 혹은 미성년자 살인이 금지된다면, 성인을 대상으로 한 살인은 괜찮다는 말인가? 이 의문 사이로 끼어드는 것은 현실의 윤리다. 살인을 정당화하면서도 최소한의 선을 지키려는 이 태도는 차민규라는 인물과 그 아래의 킬러들을 현실의 영역으로 잡아당긴다. 즉, 엠케이의 첫 번째 규칙이 상기하는 것은 이 인물들이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으면서도 현실이 지닌 최소한의 선을 넘지 않음으로써 장르적 이상과 현실적 맥락 사이를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영화는 둘 중 하나에 비중을 두거나 그 간극을 자연스럽게 숨기는 방식으로 몰입을 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성현은 그 두 영역을 과감하게 충돌시키고 이어붙인다. <길복순>의 세계가 주는 낯선 감각은 이 모순으로부터 기인한다.

변성현은 누아르나 액션 등의 장르를 표방하든, 실화 기반의 역사를 가져오든, 철저한 고증으로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감독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장르의 컨벤션을 자유롭게 변형하고, 그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여러 요소를 조합하여 하나의 자율적인 세계, 즉 자신만의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세계를 구축하는 쪽이다. 차민규가 찾아 떠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술집과 길복순의 동료 킬러들이 모여드는 식당이 지닌 공상과학적 룩과 그 안을 지배하는 엄격한 서부극의 규칙이 이러한 생각을 이어가게 만든다. 배우를 활용하는 방식도 그러하다. 한국 영화의 어떠한 순간을 표상하는 얼굴로서 존재하는 아이콘적인 배우는 이질적인 평행 세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한다. 그래서 한국의 현실적 땅 위에 장르적 이야기를 얹었다고 생각하면 변성현의 영화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한국과는 동떨어진, 우주 저 멀리 다른 행성에서 가능할 법한 공상과학적인 세계관을 만들고 그 세계에 한국이라는 땅이 지닌 감각과 한국 영화의 얼굴들을 다시 불러온다. 가령, 엠케이라는 킬러 회사의 존재와 그 킬러들에게 세 가지 규칙이 적용된다는 사실이 <길복순>의 자율적 세계를 작동시키는 요소라면, 그 안에서 한국식 사회생활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동시대와 현실의 얼룩이다. 그리고 킬러로서의 전도연이 킬러의 세계관 안에 놓인 인물이라면, 엄마로서의 전도연은 사춘기 자녀를 둔 현실적인 부모의 반영이다.

 

<불한당>의 한국은 어떠한가? 교도소로 잠입해 들어간 형사 조현수를 진짜 죄수로 만들어버린다는 천인숙의 협박과, 한재호가 김성한을 교도소 안에서 고문하고 살해하는 모습 등은 언더커버의 설정을 고려하더라도 한국의 배경 안에서는 이미 현실에서 벗어난 고증이다. 이 지점이 혹자에게 지적될 만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것이 현실적인지 비현실적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변성현이 현실적인 고증을 내려놓더라도 장르적 쾌감을 위해 자의적인 설정을 밀어붙이는 선택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생각은, 그가 설정한 <불한당>의 세계가 지금 우리가 발붙이며 살고 있는 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길복순>이 동시대 한국의 풍경을 자꾸만 소환해 오는 것에 비해 <불한당>은 지극히 장르적 세계와 규칙에 의존한다. 그 의존이 본질적으로 규칙을 비트는 것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길복순>의 시각적 룩이 보다 이국적임에도 불구하고 <불한당>의 세계는 한국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상징이 될만한 구체적 실화를 다루고 있는 경우에는 어떠한가? 김대중이라는 한 국가 대통령의 전기적 서사와, 군부 독재 아래의 관료 체제라는 현대사의 기억이 어떻게 한국에서 멀어질 수 있단 말인가? 혹은 그 역사는 어떤 경로를 거쳐 한국을 반영하는가? 변성현의 역사 영화는 이때마다 역사의 변두리에 놓인 사람을 출현시킨다. 김대중의 선거를 책임지는 충신이지만 명확한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엄창록과 중앙정보부장 아래서 각종 일을 도맡아 작전을 실행하는 아무개가 그다. 이것은 단순한 시점의 변경이 아니다. 이들은 변성현에 의해 픽션화 된 인물인 동시에 익히 알려진 역사 아래 그만의 스토리텔링을 실천하는 인물이라는 면에서 이중의 '다시 쓰기'에 둘러싸여 있다. 엄창록은 실존하지만 그 정체가 불명확하다는 점에서 <킹메이커>(2022)의 서창대라는 캐릭터로 픽션화 되었고, <굿뉴스>(2025)의 아무개는 지극히 상상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그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음모론에 가까운 새로운 담론으로 재생산해 낸다. '다시 쓰인' 자들의 '다시 쓰기'를 통해 구체적 실화는 허구와 음모론으로 가득한 전복적 스토리텔링의 실험장이 된다. 나아가 공교롭게도 둘이 모두 북한 출신이라는 것과 그들로 인해 한국 현대사의 한순간이 결정된다는 점은 변성현의 영화가 지닌 스토리텔링의 감각이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에 가깝다는 것, 다시 말해 한국 바깥이라는 변두리에서 한국을 다시 쓰는 것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두 번째 실화 기반 작품인 <굿뉴스>가 요도호 사건을 다룬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서울을 평양으로 만들어 속인다는 발상. 아무개와 영화감독의 지시에 따라 김포공항은 평양순안공항이 되고, 한국인들은 북한 군복을 입으며, 태극기는 인공기가 된다. 이때 한국은 말 그대로 한국의 룩을 벗어던지고 한국 바깥의 룩으로 둔갑한다. 이 작전은 변성현이 자신의 영화 안에서 장르 내지는 역사를 '다시 쓰기' 하는 모습과 겹쳐 보인다. 한편, 영화가 이질적인 장르적 공간 내지는 특징적인 역사적 시대를 불러온다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그 바깥의 세계가 동시대 이곳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기 마련이다. 장르에 대한 수정적 태도가 다시금 장르의 본질에 대해 떠올리게 만들듯, 다시 쓰인 이야기는 이미 알려진 이야기를 점검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굿뉴스>의 가짜 공항과 아무개라는 아웃사이더가 지닌 모호한 정체성이 지목하는 것은 결국 지금 이곳의 풍경이다.

 

2.

변성현의 영화에서 초현실 혹은 평행 현실의 기척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그 대부분이 인위적으로 조직된 세트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인위적으로 조직되었다는 것은 그 세트 안에 놓인 장르적 기호들과 시대적 소품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죄수 사이의 결투가 펼쳐지는 <불한당>의 교도소, 선거 간의 공작을 모의하는 <킹메이커>의 구락부, 동료 킬러들과 여러 회포를 푸는 <길복순>의 식당, 그리고 관료들의 탁상공론이 오가는 <굿뉴스>의 공항. 세계관과 역사성의 충실한 재현을 기반으로 한 세트 한 편에 놓인 것은 외부로부터 들어와 공간 내부를 비추는 빛이다. 그리고 그 침투를 가능케 하는 창문이다. 창문은 열려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바깥은 비어 있다.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그 바깥을 보지 못하게 표백한다. 그래서 이 공간은 납치되어 착륙하지 못하고 구름 위를 헤매야만 하는 <굿뉴스>의 비행기처럼 구름 속에 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그것이 세트 기반의 프로덕션 안에서 한 경제적인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빛은 창문 바깥으로 보여야 할 현실의 한 부분을 지우는 것처럼 보인다. 이따금 그곳에는 납치된 비행기를 쫓는 전투기 같은 눈앞에 닥친 현실이 드리우지만, 곧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형형색색의 구름이 만드는 환상이다.

변성현의 영화 속 장소를 한국이 지닌 기존의 룩에서 멀어지면서도 한국의 현실을 반영하려는 이중의 욕망으로 빚어진 평행 세계라는 점을 돌이켜 보았을 때,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빛은 그 욕망들이 충돌한 결과로서 그 어떠한 지대에도 속하지 않는 텅 빈 장소다. 현실은 다른 경로를 거쳐 평행 현실에 침투한다. 가령, <길복순>의 한 장면에서 길복순과 김영지는 작품을 위해 지정받은 장소로 향한다. 집 공간 전체는 창문과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빛이 만든 그림자로 가득하다. 그리고 길복순이 잠들어 있는 타겟을 보고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낄 때, 논란에 둘러싼 국회의원의 모습을 담은 뉴스 화면의 이미지가 그 사이로 끼어든다. 빛과 그림자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공간에 뉴스라는 매체의 이미지가 뚫고 들어오는 순간. <길복순>의 장르적 '평행 서울'에 '지금 이곳의 서울'이 끼어드는 듯한 순간이다. <킹메이커>의 뉴스와 신문을 비롯한 매체 이미지가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감각을 불러왔던 것처럼, 매체가 지닌 텍스처는 여러 기시감을 거쳐 한국이라는 땅이 지닌 리얼리티를 되살린다. 한국은 직접 재현되기보다, 매체적 이미지라는 우회적 경로를 통해 되돌아온다. 그것이 현실에 가깝게 달라붙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매체를 통해 그것을 사실적이라고 학습했고 그 안에 놓여있는 이미지가 동시대의 주요한 풍경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매체는 언제나 '사실적'인 장소였을까? <굿뉴스>의 자료 사진 같은 흑백 이미지 속에서 홍경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사실적 이미지가 도리어 조작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이 의심스러운 이미지. 혹은 매체가 사실성과 관련한다면 '진실'은 어느 자리에 있는가? 매체가 모종의 '진짜 같은' 풍경을 보여준다면, 그곳에 '현실' 또는 '진실'은 어떻게 놓여있는가? 이상하게도 변성현의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사실적 매체 이미지는 감춰진 내막을 의심하거나 폭로하는 단계에서 제시된다. <불한당>의 '오세안 무역' 광고 영상은 그 무역 회사의 내막에 마약 거래 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전달할 때 쓰이며, <길복순>의 상상적인 뉴스 화면이 국회의원의 무고함에 힘을 싣는 아들의 자살을 담고 있을 때, 그것은 청부살인을 통해 위장 자살을 만들려는 국회의원의 음모를 가늠하게 한다. <킹메이커>와 <굿뉴스>의 신문과 뉴스 이미지도 누군가의 작전을 통해 만들어진 여론을 드러낼 때 쓰인다. 변성현의 영화에서 매체 이미지는 리얼리티를 되살리는 동시에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굿뉴스>의 비행기 창문 너머가 지시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미심쩍은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모습이다. 적군파가 공중에서 터지는 미사일 구름을 보고 공격이 아닌지 의심할 때, 고명은 그것이 위협이 아닌 축하의 표시라고 속인다. 그 말을 들은 적군파 일원들은 그 구름에서 형형색색으로 물든 축하포의 환상을 본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의심을 거둔 순간에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환각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서울에 착륙 후 눈앞에 놓인 한국 아닌 한국의 이미지를 보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한다. 가짜 같은 진짜 앞에서 환각을 만들어내고 진짜 같은 가짜 앞에서 의심하는 자들. 매체는 항상 그런 확증과 의문의 장소였으며, 그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성이 아니라 설득력의 문제였다. 이때 “진실은 달의 뒷면에 존재하지만, 달의 앞면이 거짓인 것이 아니다”라는 가상적인 명언 속 '달'은 매체 이미지에 대한 메타포처럼 다가오는 이유는 매체, 특히 한때의 사진 매체는 진실과 거짓, 개입과 조작에 관한 논쟁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변성현의 세계는 장르적인 평행 세계와 현실 세계를 오가며 끊임없는 이항 대립을 낳는다. 한국과 한국 바깥. 장르와 장르 바깥. 재현과 재현 바깥. 진실과 거짓. 달의 앞면과 뒷면. 변성현은 매 영화에 걸쳐 이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과연 당신은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지 내기를 거는 것처럼 보인다. <불한당>의 장르 내부를 보고 한국형 누아르로 이해할 것인가, 혹은 그 바깥에서 넘실대는 퀴어의 감수성을 읽어낼 것인가. <킹메이커>의 선거판을 역사적 재현으로 볼 것인가, 혹은 동시대 정치의 비판으로 볼 것인가. <길복순>의 서사에서 전복적인 여성 킬러의 서사를 기대할 것인가, 혹은 전형적인 한국형 모성의 서사를 받아들일 것인가. <굿뉴스>의 거짓말 같은 실화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를 보면 어느 순간부터 속았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안락하고 익숙한 장르적 세계였다는 안심의 순간에 마주하는 창문 밖이라는 텅 빈 장소. 그리고 현실의 기척으로서 드리우는 매체 이미지. 이런 질문 속에서도 여전히 누군가는 보고 싶은 이미지를 볼 것이며, 그 안에서 받아들이고 싶은 서사를 읽어낼 것이다. 이때 허리케인 죠의 만화적 이미지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극적 설정이 사실적 이미지를 전염시키는 <굿뉴스>의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시퀀스들은 포스트-진실의 시대 속 곤경에 빠진 한 창작자의 오락이자 유희가 아니었을까?

 

3.

변성현의 인물들은 자신의 인생과 세계에 대한 다소 거시적인 정의를 내리곤 한다. <청춘 그루브>(2012)의 창대는 인생은 쓰레기통이라고 말한다. <불한당>의 한재호는 사람보다는 상황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킹메이커>의 서창대는 자신을 김운범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길복순>의 길복순은 킬러로서의 삶보다 엄마로서의 삶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굿뉴스>의 아무개는 앞면이든 뒷면이든 달은 달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주제적 측면을 노골적으로 건드는 이들의 대사들은 한편 극 바깥의 전지적인 시점에서 영화와 영화 안에 놓인 스스로를 비평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 자기 비평적 텍스트가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은 그들이 놓인 세계가 지닌 논리이며, 그 논리 안에서 이들이 수행해야 하는 특정한 역할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변두리에서 무언가를 수행하는 가짜들이며, 이러한 위장을 통해 세계에 반항하거나 순응한다. <나의 PS 파트너>의 현승과 윤정이 각자의 연인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겉으로는 그저 친구인 척하는 것. <불한당>의 조현수가 경찰의 신분을 숨기며 조직에 잠입하는 것. <킹메이커>의 서창대가 그림자의 자리에서 김운범의 공천을 돕는 것. <길복순>의 길복순의 딸과 주변 학부모들에게 킬러로서의 정체성을 숨기는 것. <굿뉴스>의 아무개가 이곳저곳을 누비며 상황을 수습하고, 서고명이 관료주의의 논리 아래서 모든 음모를 눈감고 수행하는 것. 이것이 변성현의 영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인물의 모습들이다.

이들은 항상 숨는다. 그리고 사건을 헤집어 놓는다. 이들은 모두 장르라는 게임 안에서 속고 속이며, 게임의 말로서 때로 생각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들이 자기자신을 향한 자기 비평적 텍스트로서 확인하는 것은 장르적 인물로서 처한 운명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이러한 행동이 장르이자 하나의 영화적 세계관을 유지할 것인가 혹은 말 것인가의 문제와 연관한다는 것이다. <길복순>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이 영화가 전도연이라는 배우이자 어머니의 메타적 텍스트라는 관점의 연장선에서, 길복순은 남의 자녀를 보고 자신의 딸을 떠올리며 킬러의 정체성과 어머니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때부터 그는 엠케이의 규칙 아래 조직된 세계 자체를 의심하며 끝내 차민규를 살해한다. 그리고 딸에게 솔직할 수 있는 어머니가 되기를 도모한다. 길복순이 '작업'을 거부하고 차민규와 결투하며 딸에게 돌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장르라는 세계 그 자체와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를 둘러싼 한국식 사회생활과 학부모 커뮤니티가 반복해서 건들고 있는 것은 길복순과 <길복순>을 장르에서 이탈하게 만들려는 욕망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길복순은 딸과 관련한 사회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속이면서 장르를 유지하고 있던 셈이다.

<길복순>의 서사적 경로가 장르를 벗어나는 욕망에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변성현의 인물은 위장을 통해 장르를 유지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 의무를 놓아버린다. <불한당>에서 조현수와 한재호가 서로를 속이는 것은 언더커버라는 장르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이자 합의다. 그 관습을 삐걱거리게 만드는 것은 멜로의 정서다. 이 정서는 서로를 속이고 이용해야 한다는 장르적 관습 사이를 파고들어 인물들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물론 <불한당>에서 변성현은 멜로의 정서 자체를 누아르 장르의 남성성으로 위장한다. 익히 회자된 엘리베이터 장면에서 멜로의 정서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레이어를 통과해야 한다. 하나는 언더커버 장르에서 경찰과 조직원이 갖는 장르적 관계성이며, 다른 하나는 동성 간의 퀴어적 관계성이다. 관객은 조직에 잠입한 경찰을 향한 의심으로부터 행해지는 결박의 몸짓에서 성애의 제스처를 읽어내야 하며, 동시에 이 영화가 굳이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한재호의 동성애적 코드를 감지해야 한다. 이 장면에서 한재호와 조현수가 펼치는 몸짓이 더욱 복잡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조현수를 대상으로 한 내러티브 내부의 위장과 장르를 대상으로 한 메타적 위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퀴어의 장르가 익숙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당시 한국과 그것을 의식한 제작적 상황으로 인해 변성현이 택한 이중의 위장은 <불한당>의 서스펜스와 에로티시즘을 보다 은밀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불한당>을 비롯한 <킹메이커>의 서창대와 김운범, <굿뉴스>의 서고명과 아무개의 관계성이 비교적 우회적으로 멜로의 정서를 가리키고 있다면, <길복순>의 액션 장면들은 보다 직관적으로 성애를 연상하는 경우다. 차민규가 차민희의 목을 조르고, 차민희가 그것을 성적인 제스처로 응수할 때 느껴지는 근친상간의 코드. 길복순과 차민규가 서로 칼을 찌르고, 서로 엉켜 바닥 위를 구르고, 피를 뿜어대는 폭력의 모습들은 지극히 성적으로 다가온다. 그 장면은 길복순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능한 수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차민규와의 금지된 성적 상상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노골적으로 성애적 코드를 드러내는 이 장면들은 공통적으로 금기 혹은 금지된 사랑과 연관한다. 근친상간이라는 금기. 혹은 기업의 변절자를 향한 금지된 사랑. 하지만 <길복순>이 결정적으로 건들고 있는 금기는 어김없이 퀴어의 코드다. 길재영의 동성연애 사실은 장르의 논리로 작동하지 않는다. 길재영의 멜로에 위장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아직까지 금기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르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많은 관객들은 <불한당>의 그것을 즐겼다. 그렇다면 그것이 자기 자식과 관련한 문제라면 어쩔 것인가? 차민규와 차민희의 관계, 차민규와 길복순의 관계를 우리는 장르 안에서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다음 세대라는 현실은 어떤 고민으로 다가올 것인가?

길재영의 사례가 말하듯, 변성현의 영화 속 멜로의 정서란 단순한 성애적 감정을 뜻하지 않는다. 현대의 관점에서 멜로드라마란 개인의 강력한 욕망이 사회의 질서에 가로막힌 순간이 만드는 비극이다. 그렇기에 길재영이 지닌 퀴어의 서사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인정받아야 하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멜로드라마적이다. <청춘 그루브>의 창대와 민수를 향한 아라의 정서와 <나의 PS 파트너>의 윤정을 향한 현승의 정서, <불한당>의 조현수를 향한 한재호의 정서, <길복순>의 길복순을 향한 차민규의 정서가 표면적으로 성애를 연상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애를 넘어서 그가 그리는 멜로적 정서의 본질은 계약과 역할의 관계 안에 사적이 감정이 스며드는 순간에 있다. 세계의 규칙을 가로지르는 저항과 일탈의 감정. 그 감정은 언제나 비극을 낳는다. 서로의 이익을 위한 시작된 관계는 점차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내지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는 감정으로 변질된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전달되지 못하거나 뒤늦게 전달되며, 끝내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대방에 대한 열패감으로 남는다. 세트 기반의 컨셉적인 로케이션, 캐릭터 간에 펼쳐지는 위장의 기술, 계약 관계라는 상호 간의 합의는 장르의 구축을 위해 자연스럽게 동원되지만, 장르를 유지하기 위해 연기하는 사람들이 멜로적 정서를 드러내는 순간 각자의 역할이 흔들리고 장르가 붕괴한다. 장르는 규칙으로 유지되지만 감정은 규칙을 어기기 마련이다.

 

4.

<청춘 그루브>의 창대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멍청한 사람'을 자신의 팀으로 삼는다. 그는 이 사실을 들킨 적 없다고 생각했지만, 뒤늦게 자신이 들켰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한당>의 조현수는 천인숙의 작전을 위해 조직에 잠입한다. 하지만 상대편이 이를 반대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렇듯 변성현의 영화 속 인물들은 게임의 묘수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가 속고 이용당하길 반복한다. 이는 한국이라는 한 국가를 무대로 할 때, 보다 두드러진다. <킹메이커>의 서창대는 김운범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사명 아래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자 하며, <굿뉴스>의 서고명은 더블 하이재킹 작전을 통해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겠다는 출세의 기회로 삼는다. 이들은 세계를 통해 증명받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모두 게임메이커로서 게임의 말이 되길 자처하지만, 어느 순간 그 처지를 망각하고 추락하거나 홀로 남겨진다. 부조리로서의 세계. 그리고 이 세계의 시스템은 바뀔 수 없다는 패배의 정서. 혁명과 출세를 꿈꾸던 이들은 선거판과 관료주의 체계 안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굿뉴스>의 공항 안에서 블랙 코미디의 쇼를 한껏 벌이던 관료들은 게임이 끝나는 순간 차를 타고 각자의 자리로 쏜살같이 빠져나간다. 이때 홀로 남은 서고명의 얼굴은 장르 안에서 말의 역할을 수행하고 몸부림치던 개인의 씁쓸한 초상이다.

장르이자 세계를 향한 게임을 마친 게임의 말들은 승패와 상관없이 홀로 남는다. <길복순>의 엔딩이 불안으로 가득 찬 이유는 길복순이 세계의 규칙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차민규를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만끽하기보다는 사람을 죽인 어머니로서 딸 앞에 홀로 남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르의 안락한 쾌락 끝에서 우리를 잡아끄는 것은 보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다. 그렇기에 변성현의 영화는 장르를 사랑하면서도 장르를 끝까지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장르적 세계 너머를 꿈꾸다가도 장르가 지워진 자리에 홀로 남은 외로움을 끝내 직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세계는 지나치게 스타일리시하고, 인공적이며, 장르적이었기에 그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오는 현실의 기척과 정서는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변성현의 영화에서 잠시 멈추어 설 수밖에 없는 순간은 이런 때였다.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살의를 갖고 노려보던 인물이 망설이고, 서로를 속여야 하는 인물의 얼굴에서 그 이상의 감정이 넘쳐흐르던 순간. 그때 그의 영화는 장르의 외피를 걷어내고 동시대 한국의 장르 영화 가운데 가장 낭만으로 가득 찬 얼굴을 드러낸다.

한국이자 한국이 아닌 장르적 세계를 뚫고 나오는 이 외로움은 어쩌면 변성현의 영화가 놓지 못한 가장 현실적이고 동시대적인 정서다. 세계를 잃은 자들에게 드리우는 난감한 얼굴들. 가상적 세계의 균열을 통해 현실의 암부를 마주한 이들의 패배감. 그 흘러넘치는 정서를 지닌 얼굴들이야말로 변성현의 영화에서 한국이라는 리얼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패배의 정서로만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국가 내지는 공동체라는 아버지를 잃은 서창대와 서고명에게 남는 것은 유사-아버지에 가까운 형상이다. 거대한 욕망으로 가득했던 인물들이 세계로부터 버려졌을 때,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김운범과 아무개라는 유사-아버지다. 비록 그것이 상상적일지라도 말이다. 이때부터 이들의 실패담은 장르를 우회해 유사-아버지를 찾는 이야기로 다시 쓰인다. 변성현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에 맞서는 갈등과 저항의 순간보다 그 상실감을 껴안을 인간적인 위로다.

[글 김민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