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호러는 가장 핫한 장르가 되었나
아트하우스 호러의 전성기: 〈노스페라투〉, 〈씨너스:죄인들〉, 〈28년 후〉
2025년은 감히 호러의 전성기라고 불러도 무방한 해였다. 호러는 마이너한 장르라는 오래된 편견을 극복하고 어느덧 블록버스터를 웃도는 흥행을 기록했다. 2025년 미국 박스오피스를 볼 때 호러의 달라진 위상을 알 수 있다. <씨너 스:죄인들>, <컨저링:마지막 의식>, <웨폰>, <파이널 데스티네이션:블러드 라인>은 각각 박스오피스에서 6위와 14위, 15위, 16위를 차지하며 상위권에 자리를 잡았다. <블랙폰2>, <28년 후>, <노스페라투>, <투게더>, <컴패니언>, <브링 허 백> 등 호러 영화도 100위에 무사히 안착했다. 나아가 호러는 독창적인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장르로 대중뿐만이 아니라 평론가 사이에서도 화제를 불러왔다. 지금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상위권에 있는 영화 가운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정도를 제외하면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발견하기 힘들다. <마인크래프트 더 무비>, <F1 더 무비> 등 게임과 스포츠 등 서사가 없는 상징적인 IP를 영화화한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프랜차이즈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호러 영화 가운데에서도 <블랙폰2>와 <컨저링:마지막 의식>, <파이널 데스티네이션:블러드 라인>은 프랜차이즈다.)
특히, 오리지널 각본의 약세 가운데 <씨너스:죄인들>은 개봉 당시의 화제성에 힘입어 오는 3월 15일에 열리는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종 후보 발표에서 작품상, 감독상(라이언 쿠글러), 남우주연상(마이클 B. 조던) 등을 포함해 총 1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이는 기존 <타이타닉>(1997), <라라랜드>(2016) 등이 보유하던 14개 부문 최다 노미네이트 기록을 넘어선 신기록으로, 아카데미 역사상 단일 작품 기준 최다 후보 지명으로 평가된다). 작년에 칸과 아카데미에서 코랄리 파르자의 <서브스턴스>(2024)를 호명한 맥락과 같다. 왜 호러는 할리우드에서 대중성과 작품성 둘 다에서 주목받고 있을까.
아트하우스 호러의 전성기 : <씨너스:죄인들>, <노스페라투>, <28년 후>
아트 호러라는 호명이 생기기 전에 고전 호러는 스크린 속 괴물의 이물감을 통해 장르적 쾌감을 그리는 데에 리집중했다. 1970년대에 활동한 로빈 우드나 마이클 라이언 등 미국의 영화비평가가 능동적인 독해를 통해 호러를 텍스트화하는 데에 활력을 더했다. 로빈 우드는 억압된 것의 회귀(프로이트)라는 개념을 토대로 B급 영화 속 공포를 당시 사회적인 공기를 환기하는 코드나 장치로 봤다. 나아가 각 영화가 공포를 재현하는 방식을 분석하면서 그 영화의 급진성과 거기에 은연중에 드러나는 이데올로기를 발견하는 데에 집중했다. 일례로 로빈 우드는 <오멘>과 <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의 대비를 통해 호러영화가 어떻게 보수적 미국 가족주의를 그려내는지를 논의했다. 전자가 반동적이라면 가족을 난도질하는 후자는 저항적이다. 이렇게 빌런이나 크리처 등 공포 영화 속 악은 단순히 악에 그치지 않고 탄광 속 카나리나아처럼 동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체화한 존재로 다루어진다. 다만, 이 독법은 각 하위 장르가 가진 원초적 쾌감을 의미화한다는 단점을 품고 있다. 집단 무의식이라는 불분명한 실체를 논의하는 속류 사회학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항상 새로워야 한다”라는 모더니즘적인 명령에 충실해 이전에 없는 새로운 공포와 서스펜스, 스릴을 자아내려 고안된 새로운 기법은 항상 독해에의 열망을 불러온다. 존 카펜터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데이비드 린치의 호러 영화 속 TV 등 매체와 혼합되는 바디 호러의 이미지가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에서 해석의 욕망을 불러오듯이 말이다.
아트 호러 혹은 엘레베이티드 호러의 시작으로 지목되는 2014년 개봉한 제니퍼 켄트의 <바바둑>,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팔로우>는 이런 경향을 거스른다. <바바둑>에서 호러는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 경험해야 하는 정신적 공포를 외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주인공의 아들이 읽는 팝업북 속 괴물인 바바둑은 사랑하는 남편을 상실한 주인공의 우울감을 일종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그려낸다. 마찬가지로 <팔로우>에서 호러는 전작 <아메리카 슬립오버>와 마찬가지로 성을 둘러싼 10대의 불안을 보이지 않는 유령으로 그린다. <아메리카 슬립 오버>가 미국의 고등학교를 낭만적으로 그린 틴에이지 장르의 기호를 누벨바그의 문법을 더해서 의도적으로 탈-낭만화하는 영화라면 <팔로우>는 그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첫 성관계를 맺은 여성 주인공은 잠자리를 가질 때 전염되는 저주를 평생 안고 다니게 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수영장 씬에서 검은 물은 성적 쾌락과 사랑의 불일치감을 물화한 오브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두 영화에서 호러의 장르적 쾌감은 담론을 만드는 수단으로 설계된다. 더 정확히 말해서 호러는 비평에서 해독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담론을 흡수하고 비평을 소환하는 방법으로 진화했다.
아트 호러에서 감각적 체험은 곧 사회적 담론과 조응하고, 그에 따라서 설계되었다. 제작사 A24의 프로듀싱에 힘입어서 수많은 감독이 호러를 포스트-트루스부터 기후 위기 등 전방위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환기하는 체계적인 은유로 그려냈다. 아트 호러 전성기를 가져온 '아리 애스터'와 '로버트 에거스',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을 시작으로 '로즈 글래스'나 '알렉스 갈랜드', '데이비드 로워리' 등 감독이 이런 흐름에 합류했다. 거기에 마틴 스콜세지를 시작으로 시작한 시네마의 위기 이후의 담론에서 A24 호러가 차지하는 위상은 달라졌다. 마블과 시네마는 각각 공동창작과 거대 자본으로 이루어진 스펙터클과 소규모의 예산으로 작가주의에 기반한 교양적인 콘텐츠를 뜻하게 되었다. 시네마를 소비하는 관객은 영화적 체험이 교양이 되고 자신의 지적 역량을 드러내는 텍스트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A24의 아트 호러 영화는 정확하게 이 시대적 분위기에 부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힙한 중저예산 규모 독립영화를 제작/배급하던 A24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시빌 워> 등 대형 영화를 성공적으로 제작해 이제는 메이저 스튜디오 반열에 올랐다. <기생충> 등을 배급한 네온도 2024년 <롱레그스>를 배급해 A24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 가장 주목받은 호러 영화는 라이언 B.쿠글러의 <씨너스:죄인들>이다. A24가 아니라 워너브라더스에서 제작한 영화다. 마블의 <블랙팬서> 시리즈와 <크리드> 등 블록버스터의 문법을 익힌 그는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에서 드러냈던 정치성을 재소환한다. 나아가 혼령을 통해 드러나는 남부 고딕 호러의 정서에다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스의 <황혼에서 새벽까지>(1996)같은 B급 뱀파이어 영화, 블루스 등 온갖 소재를 더하고 서부극의 공식을 덧입히는 혼종적 상상력을 구현했다. 1920년대에 유행한 갱스터 무비를 보는 듯한 알 카포네의 술을 훔친 흑인 쌍둥이의 설정, 음악 영화의 요소까지 더한다. 이는 블루스를 대중음악에 흡수한 백인의 문화 전유의 구도를 미러링하는 방법론이다. 백인이 만든 영화사를 흑인의 관점으로 재구성하여 백인이 어떻게 흑인의 문화유산를 전유했는가를 드러낸 셈이다. 이 방법론을 통해 라이언 쿠글러는 BLM(Black lives matter) 운동 이후에 등장한 명목상 연대가 어떻게 현재 진행형인 인종차별을 희석하는가라는 정치적 주제를 자연스럽게 녹이는 데에 성공한다.
이는 콜슨 화이트헤트나 빅터 라발 등 백인 중심적인 장르를 전유하는 흑인 작가의 방법론을 영화에 적용하는 조던 필의 스타일과도 충분히 접점이 있다. 조던 필은 <어스>(2019)에서 (콜슨 화이트헤드의 스타일로 전유한) 토마스 핀천 스타일의 음모론적 세계관을 전유해 백인에 저항하는 흑인의 지하 공동체를 그려낸 적 있다. <놉>(2022)에서는 활동사진과 1960년대 TV쇼, 코즈믹 호러부터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에반게리온>, <아키라> 등 J-애니메이션까지 온갖 이미지를 빌려와서는 모든 것을 흡인하는 영화계를 은유했다. 그의 대표작 <겟 아웃>(2017)에서는 고딕과 포크 호러 등을 자유자재로 변형해 흑인을 둘러싼 백인의 숭배와 혐오를 그려냈다. 라이언 쿠글러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백인이 부르는 포크와 흑인이 부르는 블루스 사이의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냈고, 술집의 앞에 있는 수많은 뱀파이어를 그릴 때, 부두교의 희생자로 시작한 좀비 이미지를 배치한다. 이 둘이 한 데 뒤엉키는 순간은 뱀파이어에게 술집에 들어오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라이언 쿠글러가 이 둘을 섞을 순간을 감독 스스로가 통제한다는 주체성을 담는다. 흑인에 대한 문화 전유는 영화 속 쌍둥이의 비극적 운명과도 이어진다.
물론,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포크와 블루스의 대결을 강렬한 스펙터클로 끌고 나가고, 서사를 조금 더 정밀하게 구성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아 있다. 음악 영화로는 황홀했으나 호러영화로는 영화 속 모든 충격적 순간과 현실이 의미가 일대일로 대응하는 직유에 가까운 영화다. 1970년대 뉴할리우드 시기의 호러를 적나라하게 패러디하고 전복한 <서브스턴스>와의 비슷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서브스턴스>는 반항 정신과 도발로 무장한 영화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그 속은 온순하다. 프랑스의 영화학교 FEMIS를 졸업한 코랄리 파르쟈는 바바라 크리드의 『여성 괴물』에 사례로 나온 영화를 정확히 반대로 뒤집은 차원 이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시각적 충격은 그 충격이 만드는 잉여적 감정으로 가기보다 정확한 데에 가닿는다. 마찬가지로 지적이고 친절한 <씨너스:죄인들>는 충격을 안기기에는 충분했으나 결국 호러를 빌려와서 블록버스터의 스펙터클을 재생산한 것은 아닐까.
아트 호러의 쌍두마차 중 하나인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는 나름의 기대작이었다. 로버트 에거스에게 <노스페라투>는 그가 평생토록 제작을 바랐던 드림 프로젝트 중 하나다. 그는 10대 때 영화의 원작인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를 연극으로 올렸을 정도로 원작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다. 로버트 에거스의 개성으로 언급되는 그림자와 빛, 흑백 필름으로 그려진 폐쇄적 세계관과 그로테크스한 비주얼, 연극적 스테이징, 오컬트와 에로티시즘을 둘러싼 흥미도 무르나우의 스타일을 독창적으로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전작 <노스맨>(2022)으로 대형 스튜디오와 작업에 성공한 그는 이제야 본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판단한 듯하다. 거기에 팬데믹으로 100년 전 원작을 지금 리메이크해야 할 이유도 충분히 마련되었다. 원작 속 올록 백작이 전염병을 퍼뜨리는 악으로 존재해서다. 그럼에도 야만적인 호모소셜에 대한 풍자, 과잉된 행동 등 그가 지속적으로 다루어 온 동시대적 주제가 어떤 방식으로 그려질지에 대한 걱정도 생겼다. 과연 <노스페라투>는 걸작이었다. 이 영화는 엘렌과 트란실바니아의 성 등 고딕 호러의 눅눅한 분위기를 채택하면서도 슬로우번 호러와 점프 스케어의 적절한 조화로 전형적인 연출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거기에 몇 장면에서 무르나우에 대한 오마주와 엑소시즘 장르에 대한 애정 등 본인의 색깔을 덧입혔다.
영화는 올록, 엘렌, 토마스 등 원작의 캐릭터 구도를 최대한 따르려 한다. 그 대신 영화는 에로티시즘과 오컬트, 근대성과 전염병이라는 두 개의 대립항을 봉합하는 상상력으로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뱀파이어 장르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성적 욕망이 이글거리는 장르고, 송곳니를 통한 흡혈이라는 이미지는 그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장르 자체가 시대착오를 품고 있는 셈이다. 에거스의 전략은 심상찮다. 엘렌과 올록의 관계를 깊게 파고들면서 논쟁적인 지점을 만든다. 영화 속 배경은 빅토리아 시대인 19세기다. 여성의 성적 욕망을 은폐하던 시기이므로 엘렌도 마찬가지로 올록과 어릴 적 맺은 관계를 은폐해야 했다. 또한 올록이 엘렌에게 다가올 때 의사는 엘렌의 증상을 히스테리로 진단하면서 그녀의 성적인 욕망을 병으로 진단한다. 나중에야 의사는 (반 헬싱의 뒤틀린 버전인) 오컬트 연구자 알빈 에버하르트 폰 프란츠 교수에게 도움을 청한다. 프란츠와 엘렌은 둘 다 이성과 과학, 근대성을 중시하는 남성중심적 사회로부터 밀려난 소수자다. 둘은 비이성적인 존재가 세계를 쥐락펴락한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는 에거스가 오래전부터 다루어 온 주제이기도 하다. <더 위치>에서는 미국 건국 이전에 자행된 마녀사냥을 통해 미국이라는 국가의 기원을 고찰했다. <더 위치>(2015)는 마녀를 단순 희생자로 그리지 않는다. 마녀를 시대에서 해방된 존재로 그리며 마녀가 아니라 마녀사냥에 눈길을 가게 한다. 에거스는 한 번 더 엑소시즘을 본인 영화에 소환한다. 엘렌과 프란츠에게 올록의 퇴마는 올록을 퇴마함으로 올록보다 더 악한 근대성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에거스는 물론 라이언 쿠글러만큼 정교한 구도를 짜지는 않는다. <노스페라투>에서 그는 코로나를 의도적으로 환기한다. 물론 호흡기로 전염되는 대형 전염병은 00년대의 사스와 2010년대의 메르스 등 10년 단위로 유행했고, 팬데믹 상황을 다루는 영화나 문학도 적지 않다. 다만 코로나처럼 광범위로 영향을 끼친 데에 이어서 일상 자체를 뒤흔들었던 전염병은 없었다. 안티 백신 음모론 등 여러 정치적인 갈등이 더해지자 사태는 더욱더 심각해졌다. 이 맥락에서 프란츠가 오컬트를 통해 올록이 몰고 온 파국을 진단하는 일은 음모론으로 오해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았을 때 <노스페라투>는 백신 음모론을 지지하는 영화로 보일 수 있다. 영화는 그런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올록은 특수 분장으로 인해 거대한 육신을 가지고 있으나 영화 전반에서 디지털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오프닝에서 엘렌과 올록은 대면하지 않는다. 올록은 엘렌의 상상 속 실체가 분명치 않은 존재다. 엘렌과 올록 사이의 관계가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줌zoom으로 드러나는 비대면 소통에 가까운 존재다. 엘렌이 올록에게 갈 때 줌-인을 통해서 서로에게 닿게 되는데 이 관계는 물리적인 만남이 아니라는 신호로 보인다. 엘렌의 우울증과 성적 욕망을 해방할 수 있는 창구가 온라인뿐이며, 그것이 올록을 소환한 셈이다. 이렇게 올록의 전염병은 단순히 코로나를 은유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코로나가 은폐했던 비가시화된 폭력을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 특히 처음에는 올록이 육중하고 큰 육체를 가진 존재로 드러나지만, 그의 힘이 그림자로 도시에 드리운 순간 그는 초월적이면서도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존재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이 올록의 그림자는 느릿하고도 스산하게 도시에 드리운다. 사실 크기를 고려해 보았을 때 올록의 힘이 퍼지는 속도는 꽤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속도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에거스가 동시대적인 악을 감각화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에거스에게 악은 학문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존재다. 올록이 엘렌의 가족을 하나씩 죽일 때도 올록의 힘은 실체로는 파악되지 않고 전염병 등 물리적 외피를 입고 등장한다. 이때 우선 엘렌과 프란츠의 충고를 무시하는 자본가인 하르딩처럼 근대적인 이성에 따르는 이는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인과관계에 따라서 생각하고, 나아가 그 인과의 중심을 돈에 둔다. 이런 한계로 인해서 악이 다가와도 근본적 원인을 해명하지 못한다. 이 빈틈을 파고드는 존재가 올록을 숭배하는 병원 속 환자다. 에거스는 음모론과 대안우파의 발생을 느슨하게 그려낸 셈이다.
물론 기어이 올록을 해가 뜨는 곳으로 유인해 소멸하게끔 하는 결말이 다소 당혹스러울 수는 있다. 올록이 디지털적인 존재라는 맥락에서 생각했을 때 엘렌과 올록의 만남은 의미심장하다. 토마스와 싸우는 순간 엘렌은 올록이 주는 쾌감이 토마스가 주는 쾌감보다 컸다고 고백할 정도로 올록은 강한 정념으로 그녀를 옭아맨다. 다만 그 정념은 쾌락을 자극한 후 엘렌의 우울을 더욱 깊게 만들 뿐이다. 바깥에 드러낼 수 없는 성적인 쾌락은 죄책감을 통해 스스로 공격하게끔 하고, 자신을 수치심에 갇히게 만든다. 타인과 접촉을 불가능하게 하는 팬데믹은 이렇게 욕망을 왜곡한다. <노스페라투>의 상상력은 단지 오프라인을 긍정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온라인 속 존재인 올록을 오프라인으로 대면할 때야 상상 속 공포를 없앨 수 있으며, 그 공포를 다스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결단의 주체는 엘렌이다. 에거스는 자본도 파라켈수스 등 학계에서 추방된 오컬트라는 서브컬처도 코로나 이후의 악을 파악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대신 본인의 욕망과 그 욕망을 먹고 자라는 악을 두 눈으로 보아야만 그 정체를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포스트 코로나라는 맥락에서 정확히 A24 아트 호러의 계보에 위치해 있지 않지만, 그 영향에 있는 또 다른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대니 보일과 알렉스 갈렌드가 <28일 후> 이후 오랜만에 돌아온 <28년 후>가 그러하다. 이 영화는 00년대 이후 좀비 영화의 흐름을 뒤튼 전작에 이어서 좀비 영화의 틀을 뒤집는다. 알렉스 갈렌드가 A24에서 장르의 컨벤션을 뒤트는 여러 영화를 연출했던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28년 후>의 오프닝은 방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텔레토비>를 보는 장면을 드러낸다.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가운데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가 창궐한다. TV에 집중하는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고아로 남겨진다. 이후 세계는 중세로 돌아간다. 감독은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일부러 핸드헬드의 질감을 살려서 아이폰으로 촬영한다. 이는 <28일 후>에서 가정용 비디오카메라로 텅 빈 도시를 찍은 것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대니 보일이 보는 세계는 다르다. 2002년의 런던은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서바이벌의 공간이었다. 이제 2024년의 영국은 모든 지반이 무너져 있는 중세의 귀환으로 그려져 있다. 나아가 섬과 본토라는 구분에 갇힌 부족주의가 귀환한다. 이는 외부를 폐쇄한 브렉시트에 대한 은유로도 보인다.
<28년 후>의 구성은 이런 점에서 독특하다. 한 번은 아버지와 아들의 좀비 사냥을 통해서 마치 섬 바깥의 본토를 RPG게임처럼 여행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좀비는 여러 종으로 분류된다. 특히 처음 좀비를 마주했을 때 좀비가 꿈틀거리는 모양을 소개하는 숏은 마치 게임 속 몬스터가 처음 등장할 때의 숏을 보는 듯하다. 화살의 수는 제한되어 있으며 미션은 계속 갱신된다. 다음날 밤 최종 보스인 좀비를 피해서 둘은 간신히 섬으로 돌아온다. 그다음 아버지는 아들의 행보를 영웅적 행보로 포장한다. 이때 섬은 일종의 극단주의를 숭배하는 정치적 공동체로 보인다. 일상과 비-일상, 적과 아군이 구분되는 세계에서 그들은 약자에 대한 상상력을 상실한다. 아버지가 아픈 아내를 외면하자 아들은 이 세계를 벗어나기로 한다. 알렉스 갈랜드는 아들이 섬 바깥을 다시 어머니와 나와서 살아가는 구조를 택한다. 이때부터 영화의 리듬은 느릿하게 전개된다. 이는 달리는 좀비를 내세운 <28일 후>와는 상반된다.
본토에서 아들은 어머니의 병을 진단하는 의사 켈슨을 마주한다. 그는 사실 장의사다. 분노 바이러스로 죽은 좀비를 애도하면서 뼈로 된 탑을 쌓아서 추모하는 역할을 한다. 켈슨은 어머니를 암이라 진단하고 이 병이 불치병임을 알려준다. 그다음 씬에서 급작스레 어머니의 해골을 가져온다. 또 한편 좀비의 아이를 통해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엔딩에서 아들은 전대물 혹은 텔레토비를 보는 듯한 무리와 함께 본토를 돌아다니기로 마음먹는다. 그 무리의 대장은 텔레토비를 보던 아이 중 하나로 좀비를 소탕하기보다는 영국 하위 문화 속 차브처럼 방랑자로 살기를 선택한다. <28년 후>는 코로나 가운데에서도 작동하는 사회에 희망을 건다. 이 작품은 완성도 자체로만 보았을 때는 괴작에 속한다. 알렉스 갈랜드 감독·각본가의 작품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장르적 컨벤션을 뒤집어 그 장르 속 남성성과 폭력성을 해체하는 방법에 의존하느라 과잉된 이미지와 메시지가 완성도를 앞지르고 있어서다. 아트 호러의 정치적인 상상력은 직유가 아니라 체계적 은유와 논리루 구성된다. 나아가 관객이 강렬한 이미지를 해석하도록 강제한다. 지금까지 사례로 든 아트 호러는 힙스터를 위한 장르로 보일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아트 호러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작가주의 영화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최후의 저지선으로 보인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