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HGFF] 컨벤션을 벗어난 자리에서
단편 <버드샷>, <손 없는 날>, <사랑의 세레나데>
지난 12월 7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영화제 《2025 HGFF》가 열렸다. 'ON YOUR MARK'라는 부제처럼, 이 자리는 4년간의 습작을 마치고 영화라는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이들의 출발선이었다. 스크린 위로 펼쳐진 작품들에서는 미숙함보다 패기가, 정돈보다 열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COAR의 평론가들이 그 현장에서 포착한 신진 감독들의 시선을 전한다.
죽은 새 앞에 선 얼굴들 ― 이유진 <버드샷>
한 고등학교에서 죽은 새가 발견된다. 이 일을 중심으로 배드민턴 선수 생활 중인 한주와 그녀가 질투하는 동급생 고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주의 시점에서 고은을 바라보는 1부가 끝나면 화자는 고은으로 넘어가고, 고은이 배드민턴 국가대표인 친오빠 우성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질투하는 자가 그 대상의 불완전을 깨닫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은 주제이지만, <버드샷>은 그 깨달음의 순간에서 활력을 잃지 않고 나아가 범죄 스릴러 장르로서 그만의 톤앤매너를 구축하길 시도한다. <버드샷>은 하나의 거대한 몽타주다. 각기 다른 세 인물의 시점을 따라 파편적으로 사건을 더듬어댄다는 점에서 영화 전체가 일종의 몽타주 시퀀스를 연속하는 형식을 띤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마치 쿨레쇼프가 그러했듯이, 아이들의 얼굴과 그들이 쳐다보는 무언가의 이미지를 집요하게 이어 붙인다는 면에서 몽타주의 영화다. 욕망에 찬 얼굴, 의뭉스러워하는 얼굴, 그리고 순수의 얼굴. 피 흘려 죽은 새라는 강렬한 이미지 앞에 붙은 이 얼굴들은 시차와 시점에 따라 반복되고 변주된다. 즉,<버드샷>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건과 상황이 아니라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를 근심과 혼란의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이의 얼굴들이다.
25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서 3부 구조의 복잡한 서사를 따라가기는 어렵지만, 그 거대한 얼굴의 몽타주가 만드는 희미한 감흥 내지는 정서적 폭발이 이 영화를 작동하게 만드는 주요한 메커니즘이다. 시네마스코프의 화면을 가득 메우는 이 얼굴들을 따라오는 것은 피 흘리는 하얀 새를 중심으로 복제되고 증식하는 연상 이미지들이다. 쏟아지는 셔틀콕에서 휘날리는 깃털, 떨어지는 액자, 쓰러지는 케이크 위의 딸기까지. 이 추락하는 이미지의 연쇄들을 따라가 결말에 도달하면 영화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다. 두 번째 죽음. 새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이들은 무언가를 저질렀다. <버드샷>을 본다는 것은 이러한 연상의 연쇄들을 따라 기묘한 이미지적 모험을 떠나는 일이며, 그 끝에서는 미결의 징후만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 징후적 이미지 앞 아이들의 얼굴은 <벌새>에서 볼 수 있던 성수대교 앞 은희의 얼굴과 다르다. (마찬가지로 포스트-<벌새>에서 볼 수 있던 포스트-은희들의 얼굴과도 다르다.) 동시대 한국영화의 아이들은 기성세대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억압되거나, 기성세대들이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표현되곤 하는데, 어른들이 실종된 세계 속 <버드샷>의 아이들은 자신이 직접 심판하고 집행하며, 끝내 책임을 져야 한다. 어쩌면 죽은 새 앞에 놓인 한주와 고은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아이들이다.
밥솥을 든 시지프스 —임수빈 <손 없는 날>
한 신혼부부가 신혼집에 놓을 밥솥을 나른다. ‘이삿집에 밥솥을 먼저 갖다 놓으면 잘 산다더라’는 미신에 대한 믿음이 그 이유다. 감독은 이 작고 단순한 이야기에서 블록버스터에 가까운 어트랙션을 보여준다. 처음엔 주차장에 자리가 없거나 엘레베이터가 고장 나는 등 일상적 차원에 머물지만, 이 장애물들을 점진적으로 쌓아가던 영화는 폭우와 침수라는 거대한 재난의 스펙터클로 나아간다. 쉴 새 없이 달리는 순간으로 가득한 이 영화가 어트랙션을 쌓아가는 방식은 버스터 키튼을 포함한 무성 시대의 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일차적으로 <손 없는 날>을 즐거운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모든 코미디 영화가 그러하듯 마냥 즐겁지는 않다. 감독은 황당무계한 신혼부부의 하루를 귀여움과 발칙함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찍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남편 병수의 미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만드는 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사뭇 진지한 서스펜스로 다가온다. 왜 우리는 이것을 보고 편하게 웃을 수 없을까. 다시 말해,<손 없는 날>에서 스크린과 안락한 의자 사이의 거리를 잡아당기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병수는 ‘잘 살 수 있다’는 막연한 이유만으로 영화의 모든 장애물을 헤쳐나간다. 심지어 그것이 폭우와 침수를 동반한 재난이어도 말이다. 그저 밥솥을 신혼집에 놓고 오려던 이들이 왜 상상초월의 재난을 겪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갑작스러운 재난의 상황에 의문을 던지기보다는 어떻게든 그것을 헤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이 질문 앞에서 다시 시작한다. 끊임없이 만나게 되는 관문들. 계단을 뛰어내리고 뛰어오르며, 무언가를 손에 쥔 채 힘겹게 움직여야만 하는 시지프스의 몸짓들. <손 없는 날>은 이 관문과 몸짓 사이에서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런 운명에 처해야 하는지 질문을 이어나가야 하는 영화다. 이 질문들이 가리키는 곳에는 어쩔 수 없이 지금의 청년세대가 있다. 동시대 한국의 청년은 예측불가능한 재난들 앞에서 ‘잘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부딪혀야 하는 세대다. 이 무기력의 시대에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믿는 병수의 무모함에는 순수한 감동이 있다. 이것이 갑작스레 내리친 번개로 밥이 완성되어 버리는 말이 안 되는 결말이 지닌 낙관을 끝내 긍정하고 응원하고 싶은 이유다.
연희동에 자라난 정글 — 김동혁 〈사랑의 세레나데〉
<사랑의 세레나데>의 숲은 아피찻퐁의 정글인 것만 같다. 난데없이 연희동 한복판에 자라난 나무 숲으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가면, 총을 든 남자들과 납치되는 여자들, 그 여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추격하는 또 다른 남자들의 느와르가 펼쳐진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이야기. 이때 감독은 그럴듯한 설정을 통해 관객을 납득시키기 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데 집중한다. 여기서 ‘재미’는 순수하게 다음내용이 궁금해지는 ‘호기심의자극’을 의미한다. 『천일야화』 이래로 계속되는, 혹은 어느 순간 잊힌 스토리텔링의 본질. 이 영화의 숲은 이러한 서사가 지닌 욕망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는 ‘이야기의 장소’이며, 그곳을 떠도는 이야기의 양태들은 끝내 바다라는 세계의 양수로 모여든다. 여자의 다리 사이에서 세상의 모든 게 나온다는 다소 도발적인 대사가 지목하는 것은 이러한 스토리텔링의 산파술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다시 또 낳는 과정. <사랑의 세레나데>는 아트하우스 계열의 영화에서 비교적 터부시 되는 스토리텔링의 순수한 쾌락을 되살리고자 하는 시도이며, 그런 면에서 동시대 영화의 전선에 있는 라우라 시타렐라, 마리아노 지나스, 미겔 고메스 같은 시네아스트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이 영화의 숲은 지금까지의 한국영화가 보여준 지정학적 장소를 교란하는 풍경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연희동 아파트 안의 인물들은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던지고 그 시선의 대상에 해당할 숲의 풍경이 따라오지만, 그 시선의 연결이 숏의 관습을 교란하는 방식으로 반복될수록 숲의 위치는 불명확해진다. 다시 말해, 관객들이 이 영화 안에서 비선형적인 서사와 구조에서 논리를 찾아내려거나 시선 간의 교환을 통해 공간의 지각을 명확하게 하려는 시도는 번번히 실패한다. 숲으로 대표되는 <사랑의 세레나데>의 세계는 장르, 사운드, 공간의 지각을 가능하게 만드는 숏의 데쿠파주 등, 영화가 지닌 컨벤션을 모두 해체하고 다시 봉합한 자리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 영화는 그만의 사실성을 지닌 각자의 사실(real)과 세계를 보여주기 마련이지만, 동시대의 적지 않은 한국영화들은 이런 점을 잊곤 한다. <사랑의 세레나데>는 한국영화가 수년간 빠져나오지 못한 사실성의 강박을 벗어던지고 한국이라는 땅을 재감각하고자 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한국 아닌 한국의 풍경들, 그럼에도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들은 지금의 한국영화에서 거의 보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단연 한국독립영화의 새로운 계보에 놓일 만한 작품이다. 그리고 와이드한 픽스 숏 하나로 진행되는 총격 씬과 그 프레임 한가운데를 열어젖히는 거대한 나무의 흩날림은 쉬이 잊히지 않을 것 같은 활력으로 가득하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