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th BIFF] 무심함의 정치학: '프랑수아 오종의 이방인'이 던진 도발
"도발적 퍼포먼스인가, 패션 화보인가"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는 매 차례 예상이 어렵다. 물론 그가 지금껏 영화에서 거짓과 진실, 성적 정체성, 죽음과 삶 등 이분법을 흩뜨리고 전복하는 시선을 그린다는 일관성은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각 영화에서 모티프나 연출, 캐릭터의 전형이 반복되는 일관성이 포착되지 않는다. <피터 폰 칸트>(2022)에서 퀴어의 멜랑콜리를 파고드는 오종과 <신의 은총으로>(2018)의 고발자로의 오종, <썸머85>(2020)의 유년기를 회상하는 오종은 하나의 감독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오종을 작가주의라는 틀로 보았을 때 당혹감이 생긴다. 그의 캐릭터는 한 성격으로 수렴하지 않는 다중성을 품고 있으며 그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영화는 매번 다른 스타일과 도발적 퍼포먼스로 오종다움을 허물고, 자신의 정치적인 목소리를 특정한 스펙트럼에 가두지 않는다. <프랑수아 오종의 이방인>(원작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구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표기하겠다)도 지금껏 오종의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알베르 카뮈의 원작을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당황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다. 이 영화는 오종의 또 다른 문제작 반열에 오를 만하다.
『이방인』은 여러모로 영화화하기 어려운 텍스트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는 역사적 도입부를 어떻게 영상으로 살리느냐의 중압감부터 시작해 수많은 문제가 있다. 우선 『포스트맨은 벨을 세 번 울린다』이나 레이먼드 챈들러 등의 영향을 받은 하드보일드한 정서와 반과거와 복합 과거,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한 나레이션이 담긴 자유간접화법 등을 쓴 카뮈의 문체도 영화문법으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나아가 뫼르소의 외양과 행동, 과묵한 언행뿐만 아니라 오랑의 풍경까지 이미지를 최소한으로 그리는 카뮈의 중립적 글쓰기도 영화적 상상력이 펼칠 틈을 차단한다. 롤랑 바르트가 백색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의 영도라고 부르는 그의 글쓰기는 보는 이의 감정과 인물의 시점에 연루될 수밖에 없는 카메라의 본질적 한계로는 담을 수 없다. 물론, 오종 이전에도 영화화가 한 번 진행되었다. 1967년에 제작된 루키노 비스콘티의 <이방인>(1967)은 원작의 하드보일드한 감수성을 살리려 뫼르소를 심문하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그다음 실험적인 장치를 배제하고 원작 속 뫼르소의 행동을 충실히 옮기는 데에 집중했다. 반면 오종은 이 『이방인』의 스타일에 의문을 품는다. 아니, 그 스타일에 깃든 정치적 함의를 파고들어서 관객을 급습한다.
<프랑수아 오종의 이방인>의 오프닝은 영화가 펼쳐나갈 논의를 명백히 소개한다. 『이방인』을 포함한 카뮈의 작품은 그의 고향이자 그가 평생토록 살았던 알제리의 오랑을 배경으로 한다. 카뮈의 산문 『결혼/여름』에서 오랑은 끊임없이 내리쬐는 태양과 바다와 사막이 공존하는 낭만적인 도시로 그려진다. 카뮈는 그 자연이 선사하는 감각의 한가운데에서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모티프인 부조리와 행복을 발견한다. 특히, 결혼에서 그는 “압생트 풀밭에 몸을 던져 그 향이 몸에 배게 할 때, 나는 모든 편견에 맞서 진리를 실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그 진리는 태양의 진리이고, 또한 내 죽음의 진리일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자연과 합일하는 초월적 체험이 선사하는 “부질없으나 핵심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삶과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문명의 규율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프랑수아 오종의 이방인>은 오프닝에서 오랑을 소개하는 푸티지와 뉴스를 삽입함으로 카뮈의 실존주의를 둘러싼 정치적 맥락을 드러낸다. 문제적 캐릭터인 뫼르소를 논하기 전에 그가 사는 오랑의 풍경을 먼저 보게끔 해 관객에게 낯설게하기의 효과를 만든다. 원작에서 오랑은 자연이 아름다운 도시로 그려지지만 사실 오랑은 아랍인에 대한 혐오가 가득한 도시다. 나아가 타이틀에서 『이방인』의 제목은 아랍어로 먼저 삽입되고, 그다음에 그 삽입된 자막에 빗금이 그어진 다음에 프랑스어로 쓰인다. 오종이 원작을 프랑스인이 아랍인을 억압하는 식민주의의 텍스트로 재배치한다. 이 영화에서 뫼르소(벤자민 부아쟁)의 첫 번째 대사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가 아니라 나는 오늘 아랍인 한 명을 살해했다로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수아 오종의 이방인>은 『이방인』의 이야기를 따른다. 과묵하고 세상에 무심한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에 장례식장에 가고, 돌아와서는 직장에 복귀하지 않고 마리(레베카 마르더)와 하룻밤을 보낸다. 노견을 잃은 난폭한 노인 살라마노(드니 라방), 아랍인 여자친구를 때린 포주 레몽 셍테스 등 이웃 주민이 뫼르소의 일상에 침입하기 시작한다. 다만, 그는 모두에게 무심하다. 결혼을 은연중에 바라는 마리에게도. 뫼르소는 어느 날 레몽 셍테스를 따라서 해안가에 있는 마송의 별장으로 갔다가 레몽 셍테스를 미행하는 아랍인 패거리와 다툼을 벌인다. 그는 아랍인 중 한 명을 권총으로 쏜다. 칼에 반사된 빛에 눈이 부셔서 세 발을 더 쏜다. 뫼르소는 법정에서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죄가 아닌 어머니의 장례식에 슬퍼하지 않았다는 죄로 고발당하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신을 믿으라 권하는 신부(스완 아를로)의 제안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묵묵히 사형을 기다릴 뿐이다. 『이방인』의 이야기와 명백히 달라진 점은 마지막 신부와의 대화 정도라 할 수 있다. 멀리서 보았을 때 영화는 『이방인』의 훌륭한 영상화로 보인다. 흑백 미장센에 각인하는 알제의 아름다운 풍광, 탐미적인 흑백 촬영, 두 배우의 비주얼은 샤넬 화보를 보듯이 아름답다. 칼날에 반사된 해 등 원작의 핵심 이미지도 생생히 살아나 있다. 반과거 시제를 살리는 플래시백도 있어 원작을 무리 없이 옮긴 듯하다. 오종은 이야기의 원형에 굳이 변형을 가하지 않고, 그 모호성을 살리되 이야기의 사각지대에 구체성을 더하기만 한다.
아랍인에 주목하는 해석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출생임에도 7년 가까이 진행되는 알제리 독립 전쟁에 반대했다. 폭력을 동반하는 인민해방전선의 투쟁을 비판하면서 알제리 독립보다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연방체의 설립을 바랐다. 1950년대 초반 그는 사르트르를 포함한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 그룹과 갈등한다. 정치적 투쟁에 소극적이고 개인주의로 일관한 그의 태도는 알제리인에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거기에 『이방인』이 아랍인을 살해하는 소설임에도 아랍인을 둘러싼 서술이 거의 없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아랍인은 이름도, 외양도 자세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마치 사물처럼 그려진다. 이는 레몽 셍테스나 살라마노의 행위를 자세히 그려냈기에 더 두드러지는 한계다. 프랑스 소설가 카멜 다우드는 한계를 지적하며 『뫼르소, 살인 사건』에서 살해당한 아랍인의 이름을 더하고 그의 형 시점으로 『이방인』을 반대로 쓰는 문학적인 실험을 감행했다. 카멜 다우드에게 이 소설은 세상에 대한 갈망과 해명이 사라지는 순간 태어나는 시대의 악을 포착한 작품이다. 프랑수아 오종은 카멜 다우드가 쓴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이야기한다. (카멜 다우드도 <Le point>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쓰기도 했다.)
오종이 영화화에서 도발적으로 비트는 점이 바로 뫼르소의 중립적이고 무감정에 가까운 심리다. 영화는 정적인 카메라로 이 심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관객이 뫼르소의 심리를 이입하는 데 방해한다. 이때 심리 서술을 배제한 뫼르소의 대사는 맥락에 상관없는 대사로 들리며, 관객은 뫼르소의 태도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살라마노와 레몽 살레스와 어울리는 과정은 인과가 붕괴한 듯한 의문을 만든다. 오종은 무정한 뫼르소의 태도를 지금 프랑스의 정치를 은유하는 알레고리로 작동하면서 관객에게 당혹감을 남긴다.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겠다'는 뫼르소의 태도는 지금 프랑스의 정치적 문제인 극중도(l'extrème centre)의 문제와 이어져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드노가 말하길 극중도의 극단주의는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태도다. 다시 말해서, 좌우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의 틀을 제거하고, 자기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토대로 자신의 담론에만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는 태도다. 그 정당성의 기반은 자신이 합리적이면서 이성적이라는 태도고, 감정적인 판단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근대적 합리성이다. 절대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으려 하는 뫼르소는 살인을 저지르나 법정에서도 그 감정을 결코 해명할 수 없다.
이 맥락에서 영화의 가장 섬뜩한 순간은 뫼르소가 창 아래에 있는 아랍인을 보는 순간이다. 그는 아랍인을 보았을 뿐이나 아래를 내려 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한 섬뜩함을 감지할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카메라는 카뮈의 중립적인 글쓰기와 이어져 있으나 한편으로는 그 시선의 폭력성을 담는다. 중립적 시선은 카뮈의 개인주의적인 태도와 이어진다. 오종은 『이방인』이라는 텍스트가 정치적 중립이라는 환상을 추구하는 또 다른 극단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을 알레고리로 그려낸다. 이 극중도가 혐오와 환경 파괴 등 지구적 문제를 감정적인 것으로 대하고 그 심각성을 축소하듯이 뫼르소는 정치적인 문제에 직관적인 판단을 안 하고 중립을 택한다. 뫼르소가 딱 한 차례, 폭언하는 순간이 신부와의 항변이라는 점도 이 맥락에서 인상적이다. 이미 세속화로 비이성적인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상황에서 전자가 후자를 간섭하는 상황이어서다. 나아가 이 상황은 가해자가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역전된 피해자주의의 강변이기도 하다.
자칫 도발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의 패착은 이 중립적인 시선을 위해서 영화 전체를 지루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방인』이 불친절한 소설인데도 읽을 때 잘 따라갈 수 있는 이유는 카뮈가 곳곳에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의 영향을 받아서 추리소설과 법정 영화 등 장르 영화에서 볼 법한 장치를 소설에 심어두어서다. 이 소설의 실존주의의 일부는 하드보일드 소설 속 고독에서 비롯하기도 한다. 물론, <프랑수아 오종의 이방인>의 재해석은 충격을 선사한다. 충격이 심정적으로 와닿지는 않은 이유가 이 영화가 장르적 장치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아름다움에 치중하고 있어서다. 뫼르소의 기만적인 삶을 그리려 오종은 카뮈 소설의 핵심적인 이미지인 해와 물비늘, 빛 등에 집중한다. 이 연출로 관객은 뫼르소를 <태양은 가득히>(1960) 속 리플리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는 성공한다. 아름다움의 기능은 딱 기만을 고발하는 데에 그친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보는 시선을 제외한다면 원작의 스산하고 무서운 서스펜스는 온데간데없다. 아름다운 미장센과 두 배우의 비주얼만으로도 볼 가치는 충분한 영화인데도 개인적으로는 그 아름다움에 의심과 반감을 품게 된다. 좋든 싫든 이 영화가 문제작임이 분명한 이유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