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델 토로 '프랑켄슈타인', 용서하는 용기에 관하여

"델 토로가 괴물과 나눈 마지막 대화"

2025-10-22     김경수

"<프랑켄슈타인>은 하나의 주기를 마무리하는 영화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최근 『엠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당분간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찍지 않으리라는 파격적 선언을 했다. <크로노스>(1992)부터 신작 <프랑켄슈타인>(2025)까지 그의 필모는 하나의 고유한 미학과 리듬, 감정을 정립하고 진화시키는 과정이었으며, 이제야 그것을 마무리한다는 이야기다. 왜 하필 <프랑켄슈타인>일까. 그는 7살 때 '프랑켄슈타인'을 처음 접했고, 크리처가 자신만의 예수라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프랑켄슈타인은 피노키오와 함께 그의 유년기에 깊숙이 각인된 캐릭터로 자리를 잡았다. <프랑켄슈타인>의 영화화는 그에게 필생의 소원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2007년에는 <쇼생크 탈출>(1994)의 프랭크 다라본트이 쓴 각본으로 제작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다음에는 해머사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애정을 담아 <프랑켄슈타인>과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를 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나 무산되었다. 2023년에야 그는 넷플릭스의 힘을 입어서 <프랑켄슈타인>을 본격적으로 촬영하기 시작한다. 좌초를 거듭한 끝에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의 정확한 영상화를 넘어서 노년기로 접어든 본인의 인생을 깊은 사유로 정리하는 자전적 영화로 발전했다.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1800년대 중후반 앤더슨(라스 미켈슨)의 배가 북극으로 가다가 빙하에 갇히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피로에 지친 선원을 본 뒤에도 앤더슨의 집념은 꺾이지 않는다. 그때 배 인근에서 의문의 폭발 사고가 일어난다. 선원은 앤더슨의 명령에 따라 만신창이인 남성 '빅터'(오스카 아이작)를 부축해 배로 데려온다. 이윽고 기괴한 외양의 크리처(제이콥 엘로디)의 거대한 그림자가 배로 접근한다. 그 크리처는 인간보다 덩치가 두 배 큰 데다가 배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만큼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회복력이 빨라서 선원이 제아무리 총을 쏘아도 죽지 않고, 빙하 아래에 가두어도 되살아나서 빅터를 추적한다. 빅터는 숨을 거두기 직전 선장에게 본인의 사연을 전하려 한다. 어떻게 크리처가 탄생했고, 그 크리처가 왜 자신을 추적하는지 말이다. 빅터의 이야기가 끝난 후 크리처가 선장실에 도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왜 빅터를 자신에게 내놓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둘의 이야기는 마치 편지를 읽는 듯한 나레이션으로 펼쳐진다. 이 형식은 감독이 어릴 적 매혹당했던 서간체의 매혹을 인간과 크리처 사이의 대화로 펼쳐 보이는 듯하다. 둘의 대화는 유려하고 섬세한 카메라워크와 꼼꼼한 스토리텔링으로 펼쳐진다.

 

원작의 독자는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각색에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이 각색에는 빅터의 시점과 크리처의 시점으로 옮기는 등 서사의 전반적인 틀을 가져온다. 대신 세부 사항에서는 델 토로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모티프가 새겨져 있다. 우선 둘은 시간대가 다르다. 영화 속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는 1855년부터 시작한다. 메리 셸리가 1851년 죽었으며 1818년에 쓰인 원작이 1700년대를 배경으로 삼는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파격적 각색이다.

감독이 1850년대 이후를 선택한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1800년대 중반 무렵은 스팀펑크 장르의 시간적인 배경으로 유명하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크리처를 조립하고 되살리는 실험실에 있는 장치는 <헬보이2>(2008)에서도 드러나 있는 스팀펑크 장르에 대한 그의 애호를 반영한다. 또 하나는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만국박람회가 열린 시기라는 점을 짚고 넘어갈 수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지금껏 전체주의와 그것을 윽박지르면서 수행하는 권위주의적 남성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적 있다. 특히, <피노키오>에서 파시즘이 싹튼 1920년대부터 40년대를 배경으로, <판의 미로>(2006)에서는 세계 2차 대전을 배경으로, <셰이프 오브 워터>(2017)에서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나치즘을 비판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근대성이 탄생한 시기에 도착한다. 역사에서 반복되는 파시즘의 정신적인 근원을 탐색하는 시도인 셈이다. (또 서브플롯으로 등장하는 선장의 서사는 멜빌의 『모비 딕』을 빌린 듯하다. 이 소설도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근대적 야망의 한계를 시험하는 소설로, 그 힘과 한계를 동시에 직시한다.)

각색의 또 다른 당황할 만한 점은 빅터의 동기다. 원작의 빅터는 파라켈수스나 대 알베르토,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등 신비주의와 연금술 등 근대적인 과학이 생기기 전의 중세의 오컬트에 열중하다가 자연과학 전반을 학습하고 해부학에 골몰한다. 빅터가 과학을 공부하고 크리처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서양 근대 과학의 역사와 맞물린다. 빅터가 동물 사체를 연구하고 나아가 공동묘지의 시체를 발굴하는 동기는 철저히 학문적인 호기심에서 기인한다. 델 토로가 해석한 빅터는 전혀 다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델 토로의 빅터는 원작의 빅터가 파생한 수많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전형에 가깝다. 원작 속 빅터의 과학적 열정이라는 동기가 사실은 개인적 콤플렉스에 기인하고 있음을 더하고, 그가 과학을 수단으로 본인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는 원작과 달리 아버지와 원만하지 않은 사이다. 빅터의 아버지는 명문가의 의사로 자신이 가진 명망을 빅터가 계승하기를 바라면서 그를 혹독하게 의사로 훈련한다. 다만, 빅터는 어머니의 우울한 성격을 물려받았으며 결국 아버지와 불화한다. 원작 속 어머니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건이었으나 영화에서는 (수술 실패를 빙자한) 아버지의 살인에 가깝게 그려진다. 그 죽음은 어머니가 가진 멜랑콜리(담즙질)을 살인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고 우울해 하는 어머니를 죽임으로 그가 그런 성격을 물려받을 수 없도록 통제한 셈이다. 따라서 "죽음을 정복하겠다"라는 빅터의 동기는 어머니를 죽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생긴다. 결국 빅터는 이단적인 과학으로 세상에 저항하는 삶을 선택한다. (원작에서 배다른 여동생으로 그려져 있으며 결혼한 사이로 나온) 처제 엘리자베스(미아 고스)를 차지하려고 한다. 과학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분노와 원한, 성적 욕망이 과학이 발전한 원동력으로 보는 셈이다. 빅터가 신경질적으로 보일수록 관객은 엘리자베스에 주목하게 된다.

 

델 토로는 빅터와 엘리자베스에 창작자가 가지는 명암을 투영한다. 이는 그의 오타쿠적인 자질과 이어진다. 어릴 적 그는 해머 영화사의 괴물, <고지라>(1954) 등 일본의 특촬물까지 온갖 크리처를 탐닉했다. 이후 특수촬영 분장 회사를 차린 후 그 경력을 거쳐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델 토로의 괴물 사랑은 자칫 위험한 욕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학과 영화에서의 괴물은 사회적·정치적 상흔으로 그려진다. 괴물의 어원은 주로 불길한 징조로, 신이 인간에게 파국을 알리는 신호로써 그려졌다. 일례로 프랑켄슈타인도 부르주아가 역사에 잊힌 노동자의 상흔을 짜깁기해 만든 누더기로 볼 수 있다. 괴물은 정상사회가 추방한 편견과 혐오가 응축된 이미지다. 이를 흔히들 프로이트의 개념을 빌려와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 부른다. 괴물에 대한 사랑은 자칫하면 괴물을 통해 소수자와 외톨이를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델 토로는 이런 윤리적 위험성을 스스로 자각한 듯하다. 이런 자각은 괴물의 역사를 혐오가 아니라 사랑으로 재서술하는 지적이고 오타쿠적인 계보 탐색으로 이어진다. 그의 영화는 수많은 레퍼런스를 동원하며 괴물을 둘러싼 사랑에 윤리적 이유를 더한다. 그의 영화는 프란시스코 고야, 르동, 롭스, 뵈클린 등 상징주의 회화를 빌린 미장센, 아서 래컴과 버니 라이트슨의 일러스트레이션과 해머사의 괴물에게서 영향을 받은 크리처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나아가 고딕 호러와 스팀펑크, 코즈믹 호러, <건담> 시리즈 등 일본 애니메이션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든다. 거기에 루이스 부뉴엘과 빅토르 에리세 등 스페인의 독재에 저항했던 영화사의 걸작에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그의 혼종적 미학은 크리처의 디자인을 아름답게 그리려 하는 미학적 욕망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을 통해 괴물에 대한 패티시즘은 애정으로 진화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델 토로는 빅터가 괴물을 만드는 과정을 길게 드러낸다. 원작에서 크리처를 창조하는 과정은 길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델 토로는 해부학에 기반한 정확성으로 빅터가 사람의 시체를 부분부분 떼어내서 크리처를 조립하는 순간을, 건프라를 조립하는 과정처럼 길게 드러낼뿐더러 빅터가 투자자인 하를란더(크리스토프 왈츠)에게 기획을 피칭해 투자를 받는 과정도 상세히 그려낸다. 프랑켄슈타인은 본인이 만드는 특수효과 장치처럼 묘사된다. 빅터는 창작이 본인의 콤플렉스를 투사하는 과정임을 드러내는 창작자의 어둠을 그려낸다. 크리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엘리자베스는 크리처가 가진 성대의 구조를 이해하고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덕후다.

델 토로는 빅터의 나르시시즘을 부각하고 천재 예술가의 허구성을 고발하고, 진정으로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애호가의 삶을 예찬한다(빅터는 과학자라기보다는 동양의 기氣라는 모호한 개념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우연히 성공에 실험한 듯 보인다). 나아가 빅터의 욕망을 실현하도록 이끄는 주체가 자본가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하를란더는 매독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새 육체를 얻으려 이 연구를 독촉한다는 점에서 둘은 실상 다를 바가 없다.

 

여기에 <프랑켄슈타인>은 하나의 층위를 더한다. 바로 이 영화가 육아일기라는 점이다. 원작의 크리처는 결국 분노에 사로잡혀서 빅터의 주위 인물을 차례대로 죽인다. 빅터는 크리처를 본 순간 달아나고 크리처는 곧장 분노에 사로잡힌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부터 시작해 아버지까지 모두 살해한다. 영화의 크리처는 더는 마냥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막 태어난 아이 같은 마음으로 빅터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만, 불타는 성에 버려져 배신당한다. 빅터는 이 크리처가 탄생한 후를 고민하지 않았음을 걱정하면서 크리처를 기르려고 하나 포기한다. 전작 <피노키오>가 아이의 성장기이듯이 이 영화도 그 흐름을 따라가는 셈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빅터와 엘리자베스가 창작자의 이중성을 담은 캐릭터이듯, 이 영화와 <피노키오>도 아버지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피노키오>의 제페토가 사라진 피노키오를 따라가는 것과 다르게 <프랑켄슈타인>의 빅터는 어떻게든 육아의 책임을 회피하고 크리처를 죽이려 한다. 왜일까. 두 작품 사이에는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며, 그 사이에 신세대의 문화는 아버지의 시선으로 더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초반에 크리처의 그림자가 H.P 러브크래프트의 코즈믹 호러 속 크툴루를 보는 듯한 거대해 보이는 이유도 이 두려움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빅터에게 아이는 크툴루다. 빅터가 아버지라는 하나의 단어만 되풀이하는 크리처에게 미지의 공포감을 느낀다. 결국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할뿐더러 아이에게 두 차의례 살인죄를 덮어씌운다. 이는 신세대를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기성세대의 시선을 닮아있다. 빅터를 괴물이라고 말하는 대사가 없어도 그는 이미 괴물로 보인다. 이는 <피노키오> 이후 델 토로가 인셀 등 10대의 비윤리적 문화를 아버지의 시선에서 볼 때 생기는 무력감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은 2부에서 마구간에 숨어 (아마 1994년도판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의 오마주로 보이는) 눈이 먼 노인 캐릭터를 만나는 과정을 그려낸다. 눈이 먼 노인은 외양에 편견을 가지지 않는 존재로, 크리처를 숲의 정령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델 토로는 언제나 괴물의 다의성에 주목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속 해양괴물은 해양크리처의 개성을,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는 순간 코가 늘어나는 피노키오는 식물의 개성을 펼친다. 이처럼 크리처와 자연을 빗대는 작업을 진행한 점으로 볼 때 의미심장한 대사다. 델 토로의 세계에서는 괴물은 본인 몸에 깃든 자연의 속성을 인지하고 각성할 때 무한한 힘을 얻는다. 이 영화 속 괴물도 본인의 신체가 무한으로 재생하는 자연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인간의 언어와 교양, 문화를 배우고 성장한다.

나아가 영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면서 외로움을 느낀다. 델 토로는 눈이 먼 노인을 제외하고 빅터를 포함한 인간이 크리처가 성장하는 과정을 볼 수 없도록 설정하고 크리처를 오해할 수밖에 없는 우연을 꿰어나간다. 이 설정이 비-인간 크리처를 인간중심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델 토로는 인간과 괴물을 자연이라는 큰 카테고리에 두고 동기화한다. 동양의 기를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크리처의 몸은 자연과 인간이 뒤엉킴으로 함께 진화하는 공-진화의 장이다. 이처럼 델 토로는 원작과 다르게 어떻게든 크리처를 이해하는 시선을 보이려 한다. 물론 원작의 설정대로 크리처는 빅터에게 본인의 친구를 만들어 달라고 호소하나 이 호소는 제법 정중하다. 다만 이를 오해한 사람은 빅터다. 오해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지고, 크리처는 본인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엘리자베스를 잃으며 원한에 사로잡힌다.

 

델 토로의 엔딩은 원한의 연쇄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세상에 경종을 울린다. 델 토로가 그려내는 빅터와 크리처의 관계는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 『가장의 근심』을 보는 듯하다. 이 소설 속 화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오드라데크라는 크리처로 비유한다. 오드라데크는 영영 이해할 수 없으며 내가 사라진 이후에도 영원히 살아갈 크리처다. 아버지에게 아들의 존재는 마치 오드라데크를 보는 화자의 시선을 보는 듯하다. 빅터가 친구를 만들어 달라는 크리처의 부탁을 거절할 때도 크리처가 영원히 살아가면서 번식해 인류를 대체하는 미래에 대한 공포를 토로한다. 빅터의 예감대로 크리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폭탄을 써서도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영원히 재생하며, 끝까지 빅터를 죽이려 추적할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크리처와 빅터의 추격이 마치 서부극처럼 그려진 것도 이 전쟁이 영원히 이어지리라는 암시에 가깝다.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원한은 영영 되풀이될 것이다. 빅터는 사과하라는 크리처의 부탁에 애써 사과를 건넨다. 이 사과는 죽기 직전에 어릴 적에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본인의 트라우마에 기인한 것으로도 보일 수 있다. 빅터의 사과는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 빅터와 크리처의 화해에 이르기까지의 감정의 축적이 부족하나 그 비약이야말로 리얼하다는 인상을 준다. 결국에 크리처는 빅터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한다. 이때 크리처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죽는 빅터를 포옹한다. 그는 그제야 빅터를 처음 만난 날처럼 쏟아지는 햇살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짓게 된다.

이 무조건적인 용서는 그 기표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빅터의 진심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바탕이다. 델 토로가 그리는 엔딩은 의미심장하다. 사과가 곧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취약함이 되어가는 시기다. 사과는 타인의 진정성에 트집을 잡으며 자신이 가진 원한을 푸는 또 다른 복수의 수단이 된다. 용서를 통해 원한의 고리를 끊을 용기와 그 상대의 말이 빈 말일 뿐일지라도 그 말을 그대로 인정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용기에 기반해 있다. 델 토로가 빅터의 눈빛을 통해 이야기하는 용서는 용기의 다른 말이라 할 수 있다. 델 토로는 용기야말로 21세기에 우리가 가져야 하는 태도라고 믿는 듯하다. 이제 델 토로에게 하나의 주기가 끝났으며 그가 괴물로 할 이야기는 끝났다. 결론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인상은 지우기 어려워도 수십 년에 달한 그의 사색을 생각했을 때 받아들일 만한 결론이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