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2] 그 미로 안에는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다

"찜찜하고 찝찝한 기분, 어딘가 불편하고 불쾌한 기분, 스산하고 으스스한 기운, 차갑고 어두운 감각들"

2025-09-28     배명현

1.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가 끝나는 순간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이다.

러닝타임이 끝났음에도 왜인지 종결되지 않은 것 같은 찜찜하고 찝찝한 기분, 어딘가 불편하고 불쾌한 기분, 스산하고 으스스한 기운, 차갑고 어두운 감각들. 란티모스가 일관되게 유지하는 이 정서를 무엇이라 말해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느낌을 언어로 담으려는 시도 자체가 실수인지 모르겠다. 정의되지 않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감각을 언어화하려는 행위가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감정의 형태는 늘 언어의 범주를 넘어서니깐.

다만, 이런 생각도 든다. 정확한 기술은 불가능할지라도 이 기묘한 감정의 기원을 찾다 보면 그 끝엔 어떤 식으로든 응답이 있지 않을까. 비록 정답이라 부를 순 없겠지만 감독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응답이 영화라면, 영화에는 그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감독의 어떤 대답이라 불러도 무방한―인식이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왜소한 개인으로서의 정의가 아닌, 하나의 감정을 발명해낸 창작자가 찾아낸 세계에 대한 '어떤 진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2. 미로 앞에서

국내에는 <더 랍스터>(2015)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을 완성하기 전까지, 줄곧 그를 따라다니던 단어는 '환상성'이었다. 특정 기간 안에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이 된다(더 랍스터)거나 행복한 가정에 저주가 깃들어 가족 한명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킬링 디어)는 설정은 분명 현실감각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오해에 빠지기 쉽다. 가령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만 보더라도 환상성은 찾을 수 없다. 또한 초기 장편인 <송곳니>(2009)나 <알프스>(2011)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도 환상성이라는 단어는 정확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송곳니>는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혹은 그렇다고 믿어지는)이며 기괴한 폭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여기에 환상은 없다. 망자의 빈자리를 살아있는 타인이 대신 채운다는 설정의 <알프스>도 마찬가지이다. 두 작품은 기묘하고 비현실적이지만 환상적이진 않다. 근작인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 다루고 있는 18세기 영국의 세 여성이 겪는 미묘한 삼각관계는 앞선 두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카프카식 부조리'조차 찾을 수 없다. 그 때문에 환상성은 란티모스의 작품 전체를 꿰뚫는 단어라기보다는 작품을 창작할 때 발휘하는 작가적 취향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물론 란티모스의 영화 대부분이 현실감각과 동떨어진 설정과 대사 그리고 연기로 인해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이 분위기가 서두에서 언급한 '불쾌'와 연결되기에 절대 사소한 특징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환상성을 감독의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이라고 부르기엔 충분치 않아 보인다.

그보다 넓은 의미에서 작품의 설정을 포괄하는 단어는 '왜곡'이 아닐까. 가족의 왜곡된 형태 <송곳니>, 망자에 대한 왜곡된 애도 <알프스>, 사랑과 (혹은) 생존을 향한 왜곡된 의지 <더 랍스터>, 등가교환이라는 신의 왜곡된 권능 <킬링 디어>, 세 여성의 왜곡된 소유욕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거친 요약이지만 왜곡이란 어휘는 란티모스의 작품을 묶어주는 꽤 유용한 키워드가 되어준다.

여기서 '왜곡'을 보다 심도 깊게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그의 영화를 성립시키고, 작동하게 하며 왜곡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관계성을 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식 중 한 명이라도 탈출에 성공했다면 <송곳니>는 영화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산 사람이 죽은 자를 떠나보냈더라면 <알프스> 역시 영화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데이비드와 근시 여자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더 랍스터>도, 스티븐이 수술에 성공했더라면 <킬링 디어>도 영화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치세, 사라, 아비게일, 셋 중 한 명이라도 관계에서 탈출했다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도 영화가 되지 못했다.

이렇게 란티모스의 영화 속 인물들은 '관계 맺기'에 실패했기에 비극의 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맺어진 '관계를 끊어내지 못' 했기에 영화가 된다. 란티모스의 영화는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의 영화는 실패로 고통받는 인물이 아니라 성공해서 고통스러운 인물을 보여주는 비극이라고. 뒤에서 말하겠지만, 란티모스는 이 아이러니를 동력으로 관객을 어디론가 데려다 놓는다. 우리도 모르는 새 인물들의 성공이 만들어낸 기묘한 정동에 이끌려 어디론가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의 고통의 근원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을 보고 있는 관객도 알지 못한다. 영화가 끝났을 때 마주하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고약한 작품들은 미로처럼 우리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관객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작품이 끝난 자리를 역행해 미로 안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우리는 결말에 와 있으니까. 만약 그의 영화가 미로라면, 미로는 입구보다 출구에서 시작하는 게 더 유리하니까.

 

3. 출구로 들어가기

이미 말했다시피 <더 페이버릿>은 란티모스의 이전의 영화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이며, 감독 자신이 아닌 각본가(데보라 데이비스, 토니 맥나마라)가 시나리오를 썼다는 점 또한 그렇지만,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매우 현실적이라는 점이 특히 그렇다. 서사에만 집중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인 영화를 만들면서도 비현실을 포기하지 않았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엔딩 시퀀스는 권력을 노골적으로 시각화하며 시작한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라(레이첼 와이즈)는 궁전이 아닌 곳에서 창을 내다보고 있다. 아비게일(엠마 스톤)은 소파에 몸을 눕힌 채 여유롭게 책을 읽다 문득 발아래 돌아다니는 앤(올리비아 콜맨)의 토끼를 밟는다. 토끼의 비명을 들은 앤은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린다. 아비게일은 앤을 부축하지만 앤은 아비게일에게 자신의 발을 문지르라 명령한다. 몰락한 귀족 출신인 아비게일은 여왕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 앤은 무릎 꿇은 아비게일의 머리를 거칠게 붙잡는다.

이러한 장면만 보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이전 작품들과 달리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엔딩의 마지막 순간 영화는 비현실이 된다. 고통스러워하며 다리를 문지르던 아비게일은 무언가를 본 듯한 뉘앙스의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곧 멍한 눈으로 프레임의 바깥을 응시한다. 바로 다음 쇼트로 앤의 얼굴이 나온다. 앤은 다리가 아프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떤 뒤 눈을 살짝 감았다 뜬다. 그리곤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다 곧 멍한 눈으로 프레임 바깥을 바라본다. 앤과 아비게일의 얼굴이 디졸브로 겹치고 또 다시 그 위로 토끼들이 겹쳐진다. 프레임 속 토끼의 수가 늘어날수록 화면은 점점 더 어두워지다가 완전하게 암전이 된다. 이상한 엔딩이다. 엔딩에서 사라-아비게일-앤의 순서로 이어지는 등장은 톱니바퀴처럼 서사와 맞물려 정확하게 굴러가지만, 영화의 끝자락에서 란티모스는 시간을 아주 잠시 겹쳐 놓은 뒤 얼려버린다. 아비게일이 마사지를 하다가 멍해지는 순간까지 순행하던 영화는 숏을 전환하여 앤의 얼굴을 보여준다. 이 숏에서 시간은 아비게일이 멍해져 있는 시간이 아니라 마사지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영화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레 시간을 역행한다. 그다음으로 아비게일과 앤 그리고 토끼(들)을 디졸브로 겹쳐 놓은 뒤 시간을 정지시켜버린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서사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굴러가던 인물들이 암전과 함께 멈춰버린다. 영화는 관객에게 어떠한 것도 손에 쥐어주지 않은 채로 떠나버린다. 그 어떤 사건도 맺어지지 않았고, 그 어떤 관계도 끊어지지 않았다. 이를 본 관객은 분명 영화가 끝났다기보다 멈추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떠오르는 인상은 마침표라기보다 '물음표'이다.

<킬링 디어>의 엔딩은 어떠한가. 식당 안으로 마틴이 들어온다. 그의 옆으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스티븐의 가족이 보인다. 마틴은 자리에 앉은 다음 가족을 응시한다. 잠시 후 가족은 가게를 빠져나간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엔딩 시퀀스에서 그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다. 엔딩 바로 이전의 시퀀스는 러시안룰렛의 방식으로 밥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두 시퀀스 사이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를 추론해낼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스티븐의 가족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공석이 밥의 죽음을 증명할 뿐이다. 심지어 엔딩 시퀀스는 서사적으로도 개연성이 없다. '신'인 마틴은 밥의 죽음을 확인할 필요가 없으며 관객은 밥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스티븐의 가족은 말할 것도 없다. 엔딩의 상황이 벌어지는 장소가 영화 초반 스티븐과 마틴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엔딩 시퀀스는 영화의 중심과 동떨어져 있다. 잠깐,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식당에서 이루어졌다는 것도 관객의 시점에 불과하지 않나.

러닝 타임 바깥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상상해보자. 관객인 우리가 식당에서 두 사람의 만남을 목격하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마틴의 아버지가 심장 수술을 받은 이후부터 두 사람은 만남을 지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영화의 시간을 심장 수술 이후 바로 식당으로 이어 붙였다. 그리고 엔딩에서 이 식당을 다시 가지고 왔다. 우리는 '두 식당'이라는 '공간' 바로 앞에 있었을 '시간'을 알 수 없다. 시간을 알 수 없다는 건 그동안 벌어졌을 사건을 알 수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관객이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곤 스티븐의 오만이 불러온 무능과 무력과 마틴의 권능이다. 관객은 두 식당 사이에서 스티븐과 마찬가지로 서사를 수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무기력과 시간적 무기력에 결박되어 있다. 관객은 철저하게 영화의 목격자로 남겨진다. 시작과 끝이 연결된 끝없는 미로의 모양으로 영화는 관객을 붙잡아버린다.

 

<더 랍스터>의 엔딩도 다르지 않다. 데이비드는 스테이크 칼을 자신의 눈으로 겨눈 뒤 거울을 보며 망설인다. 여자는 테이블에 앉아 그를 기다린다. 가게 안은 적요하다. 문득 나타난 종업원이 물을 따라주자 여자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기다림이 이어진다. 여자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광경을 본다. 지루할 정도로 길고 차분하다. 영화는 이 기다림으로 끝이 난다. 데이비드의 결단으로 두 사람이 공통점을 만들어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영화가 보여준 사건을 토대로 어느 정도 유추해보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다. 러닝 타임 이후의 시간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열린 결말 앞에서 우리는 거대한 허무를 맞이하게 된다. 결말 이후의 내용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인물의 몸부림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온전한' 상태를 지키기 위해 러닝 타임 내내 몸부림쳤다. 살기 위해 없는 공통점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숲으로 도망쳐 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데이비드는 호텔과 숲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두 공간 모두 데이비드를 선택하지 않았다. 동물이 된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가 동물이 된다면 영화가 멈추기 때문이다. 그가 동물이 되는 것은 영화가 거부한다. <더 랍스터>라는 세계에서 데이비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근시 여자와 공통점을 만드는 것뿐이다. 하지만 전체(데이비드 자신)를 살리기 위해 부분(눈)을 죽이는 선택은 그에게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영화는 자꾸만 인물의 기대에 불화하고 공통점을 찾기 위해 나눈 마지막 대화조차 어긋난다. "처음엔 불편해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다른 감각은 더 예민해져 촉각, 청각 모두."라는 여자의 격려에 데이비드는 "알아"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가 현재 두려워하는 것은 앞으로의 불편이 아니라 당장의 고통이 아닌가. 소통의 불가능성은 이 순간부터 두 인물을 화장실과 식당으로 분리해 놓는다. 자연스레 감정도 공간에 따라 분리 배치된다. 두려움과 지루함으로. 이 분리는 눈여겨 볼만하다. 그의 손에 자신과 그녀의 생이 달려 있지만 도망치고 싶고, 그녀는 그의 손에 자신의 목숨이 온전히 달려 있지만 따분하다. 하나를 바랐던 두 인물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된 채 끝나버린다. 영화는 시간을 멈추어버리고 인물의 선택을 은폐시킨다. 데이비드의 시간은 화장실에서 멈추었고 여자의 시간은 식당 안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관객은 멈추어버린 영화의 시간 안에 갇혀버린다.

그런데 <더 랍스터>의 이 엔딩, 어디선가 본 듯하다. 다급한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의 기다림,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화면 속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광경. <송곳니>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자신의 손으로 송곳니를 뽑은 큰딸이 아버지 차의 트렁크에 몰래 숨어든다. 가족들 모두가 이 사실을 모른 채 큰 딸을 찾는다. 카메라는 사람 없는 실내를 훑은 뒤 정원에서 다급하게 뛰어다니는 가족을 보여준다. 이들은 개 짖는 소리를 내며 큰딸을 찾는다. 다음날 날이 밝자 아버지는 차를 끌고 공장으로 간다. 공장에 도착한 아버지는 자동차를 세운 뒤 공장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이때부터 자동차의 트렁크를 비춘다. 트렁크에선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지만 카메라는 계속해서 바라본다. 영화는 응시의 어느 순간에 끝나버림으로서 다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시간을 얼려버린다.

이 시간의 멈춤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두려움? 기다림? 자유? 혹은 절망? 공포? 이 자리는 텅 비어있기 때문에 그 어떤 단어도 들어갈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건 불쾌하다는 것이다. <송곳니>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스스로를 호명할 이름 '부르스'를 만들어냈고, 탈출을 가능케 하는 규칙인 '송곳니를 뽑았'음에도 영화는 너무나 어둡고 모호하다. 차가 주차된 공간이 영화에서 보여준 집 바깥의 유일한 공간인 공장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부르스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기에 느끼는 우리의 불안감 때문일까. 둘 다 일리가 있지만 보다 눈여겨보고 싶은 부분은 자신에게 이름을 붙인 존재인 부르스가 탈출을 위해 '규율'을 따랐다는 점이다. 이름이 없는 공간에서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창조인 동시에 '혁명적'인 것이다. 이는 예술의 은유로도 읽어낼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다. 그런데 그 행위의 결과(탈출)가 규율의 이행이라니. 그렇기에 만약 러닝타임 이후 부르스가 탈출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정말 다시는 가족과 만나지 않더라도 이 탈출을 완벽한 성공이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응시로 끝나는 마지막 쇼트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이 아닌 그간 있었던 사건의 연장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러닝타임과 함께 달린 관객은 영화가 끝난 뒤 현실로 돌아가지만 기분은 여전히 영화의 연장선을 따라 달린다. 영화는 끝에서 시간을 정지시키지만 이 선택은 역으로 영화의 러닝타임을 확장 시키는 결과를 불러온다. 결국 관객은 영화 안에 갇힌 것이다.

<알프스>는 이러한 란티모스식 연장선의 근원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두 인물의 대비를 보여주며 끝을 낸다. 간호사는 죽은 테니스 선수를 대신해 가족을 연기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반면 체조선수는 안무를 완벽하게 연기한다(공교롭게 체조에서도 정해진 안무를 수행하는 행위를 연기라 부른다). 그리고 코치에게 달려가 품에 안긴 뒤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간호사는 닫힌 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체조선수는 코치의 품에 안겨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간호사는 밖으로 내쫓겼고 체조선수는 실내에 있다. 간호사는 밤중에 있고 체조선수는 낮에 있다. 간호사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니고 체조선수는 여전히 가족이다. 여기서 결말을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간호사는 가족임을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지만 고독하고, 체조선수는 가족임을 보여주었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증명해야 한다고. 러닝타임은 끝이 났고 관객에게 보이는 연기는 끝이 났지만 영화 바깥에서 벌어질 연기가 남아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엔딩의 순간 설핏 보았던 체조선수의 굳은 표정은 의미심장해진다.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닌 배우로써의 연기가 계속될 인간의 표정이기 떄문이다. 그렇기에 <알프스>의 마지막 쇼트는 끝이 아닌 연장선의 시발점이다. 다만 공교롭게도 영화의 러닝타임은 끝이 났다. 관객은 영화 끝과 이야기의 연장선 사이, 멈춘 시간에 끼어 있다.

 

4. 입구로 빠져나오기

란티모스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 시간을 멈추어버리거나 시간을 변형 또는 왜곡시키는 방식으로 관객을 영화 안에 가두어버린다. 인물들의 욕망은 엔딩의 엇갈린 시선처럼 상응하지 못하고 얽히기만 하며, 그로 인해 왜곡된 감정은 토끼의 번식처럼 끊임없이 증식하고 범람하며(더 페이버릿), 인과의 법칙은 신의 왜곡된 권능과 같아서 필연적으로 지켜져야만 한다(킬링 디어). 또한 소통의 불가능성이 얼마나 끔찍한지를(더 랍스터) 보여주고, 실패는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미 내재화된 논리에서 탈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말한다(송곳니). 그리고 고독함과 고유성은 인간이 인간임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위태롭게 만든다(알프스). 그의 영화는 더 나아질 징조도 징후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암담한 세계에서 대안이나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종결되지 않은 시간 내에서 관객이 빠져나갈 틈은 보이지 않는 것만 같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란티모스의 세계를 단순히 염세라고 결론짓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생각을 할수록 정말로 그런가, 라고 영화는 자꾸만 되문게 만든다.

창작자가 세계를 조소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미셸 프랑코의 <애프터 루시아>(2012)처럼 절망하는 세계를 가만히 전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2006)처럼 '이곳'이 아닌 '저곳'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전자의 엔딩은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남학생을 바다에 빠뜨리는 과정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러닝 타임의 막바지 순간 우리에게 보이는 거라곤 그저 바다와 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과 엔진소리 뿐이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스크린 안에는 건조한 움직임뿐 어떤 성취도, 분노도, 해방도, 파토스도 찾을 수 없다. 카메라는 그의 행동을 무의미화 한다. 영화는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고 건조하게 보여준다. '괴물을 파괴하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피해자'로 함축 할 수 있는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 엔딩에서 조차 복수를 마친 허무한 '인간'이 존재했다. 하지만 <에프터 루시아>에는 인간이 없다. 물론 여기서 가해자의 육체를 제아무리 가해한다 해도 가해자가 느끼는 고통은 피해자의 영혼을 조각낸 정신적 고통과 등가교환이 되지 않기에, 영화 속 복수는 실패이며, 실패가 예정된 행동의 공허와 허무를 객관적으로 보여준 그 자체가 작품의 성취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복수 서사의 힘은 실패의 불가피함을 성찰하면서 인간의 감정적 논리를 깊게 보여주는 데 있으며, 우리가 진정 들여 보아야 할 지점은 그것이 어떤 실패인지, 그것이 결국 인간의 어디에 도달하였는지 생각해 보았을 때, <애프터 루시아>의 텅 빈 엔딩을 비호하려는 말은 힘이 약해 보인다. 더욱이 염세적 객관주의의 모습을 한 작품은 인간에 대한 의미를 무의미화하고 그렇지 않은 세계를 조소한다는데 혐의가 있다. 그렇다면 후자는 어떨까. 후자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문장만 놓고 본다면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에 대한 아름다움, 그러니까 형식 그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단적으로 말해 이것은 회피다. 이러한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현실을 판단하고 진단할 능력의 부재를 창조적 재능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순수성이거나 지금-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은 무의미하기에 저곳에 대한 이야기한다는 무기력이다. 전자는 순진하긴 하지만 현실을 욕망한다는 점에서 인간적이고, 후자는 작품을 자신의 무기력에 대한 면책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소아병적 심리의 향이 짙게 난다.

 

하지만 란티모스는 둘 다 아니다. 그는 비현실을 경유하여 우리의 세상을 암담하게 만들지만 이 비현실성은 세계를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으며 창작의 독창성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아 보인다. 그의 상상의 방향성은 늘 스크린 밖의 어딘가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곳니>가 지시하고 있는 실패와 현실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주인에게 충실한 개를 연기하는 자식과 주인인 부모는 단순히 비현실적인 '한 가족'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더 큰 단체나 집단 혹은 국가를 상상하게 한다. <알프스>가 보여준 고독과 상실은 세계의 근간인 동시에 가장 작은 세계로서의 개인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더 랍스터>는 두 공간으로 나뉜 인물과 감정의 대비 그 이후를 관객에게 요청한다. <킬링 디어>는 스티븐이 밥을 죽이면서(밥이 총을 맞는 순간, 란티모스는 쇼트를 할애하는 친절을 베풀며 스티븐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을 보여준다)까지 가부장적이며 오만한 태도를 지키려는 과정을 기록하고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은 권력과 욕망의 소용돌이를 세 명의 인간과 토끼로 축소시킴으로써 인간 세계의 지난함과 그 안에서 무언가가 자꾸만 번식하고 있음을 넌지시 전달한다.

란티모스의 염세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지금-여기의 현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고 어긋나있는지를 집요하고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이상한 이질감을 보여준다. 다만 '리얼(리즘)'하게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그가 다루는 '현실'은 켄 로치와 같은 감독이 다루는 '현실'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란티모스 감독은 사건의 결과로써 드러나는 현실, 그러니까 목격 가능한 현실(reality)이 아닌 드러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어떤 사실들(actualities)에 가깝다. 때문에 현실을 재현하는 영화는 그에게 적합하지 않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영화는 역설적으로 보다 은유적이고 모호해져야 한다. 그렇기에 란티모스가 비현실적 화법을 택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R. G. 콜링 우드가 말한 "예술은 최초의 기본적인 정신활동이다. 그것은 모든 다른 활동이 자라는 토양이 된다"라는 말은 영화(상상)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예술철학개론』, R.G.콜링 우드, 정음신서, p.55) 그의 영화는 어떤 가능성이 되고, 그 가능성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피어날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여기서 관객에게 요구되는 건 상상력이다. 막다른 시간 너머를 상상할 힘과 왜곡된 서사의 연장선을 새롭게 그릴 수 있을 만한 서사적 상상력 말이다. 관계 맺기에 성공했기에 고통받는 인물들이 지금의 우리들이라면 우리는 정말 우리의 비극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있는가. 우리의 눈앞에 다가온(올) 불쾌를 보고도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란티모스의 정지된 시간을 불가능한 희망 혹은 불가능한 가능성을 상상해낼 일종의 유예 기간이라 바꾸어 말하는 건 어떨까. 우리의 시야(스크린)를 덮어버리는 어둠의 증식이 소통의 불가능(같은 공간에서 조차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인물) 때문이라면, 불완전한 소통을 작은 촛불 삼아 타인의 왜소함을 바라봐 줄 수는 없는지(<더 페이버릿>). 밥의 죽음 이후 벌어진 시간의 비약을 무능한 인간을 향한 신의 장난이 아니라 절대 공고하리라 믿었던 가부장 시스템이 무너지는 상상의 기록으로 재독하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전복하고 다른 이야기를 새로 써낼 순 없는지(<킬링 디어>). 인간이 더 이상 인간적인 선택을 할 수 없을 때 개인을 훼손해가며 비인간적 생명을 유지하는 대신, 인간과 인간의 믿음 그 이상을 발견해내어 인간적인 선택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지(<더 랍스터>). 완전한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서사를 상상해낼 수는 없는지(<송곳니>). 고독의 고통을 지우기 위해 타인이 되는 지옥을 선택하는 대신 타인을 향해 새로운 포옹을 시도할 수는 없는지(<알프스>). 영화는 이렇게 관객에게 미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연장선을 그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상상은 결코 쉽지 않다. 더 나은 건 완벽하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결말의 끝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완전히 새로운 서사를 써야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라는 주문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이 요구는 '불쾌'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마주한 이상한 감정은 사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이라고.

 

5. 다시 입구 앞에 서

우리는 미로의 입구를 빠져나오고서야 새로운 이야기를 쓸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서사를 쓰기 위해선 다시 미로의 입구를 통해 들어가야 한다. 그의 영화는 <송곳니>의 시작처럼 단어의 의미를 왜곡해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고, <더 랍스터>처럼 외화를 삽입해 놓고는 영영 풀리지 않을 미스터리로 남겨두기도 한다. 미로는 시작부터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그 의미를 내부에서 끊임없이 생성해낸다. 지금도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는 미로는 계속해서 세계의 수면 아래를 비집으며 우리가 지금껏 마주한 적 없던 기괴한 사실들을 길어 올리는 중이다(이 글을 쓰는 2023년 3월 현재에도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4개의 작품을 촬영, 준비하고 있다). 마치 비현실적인 모습을 한 몬스터가 꿈틀거리며 미로를 막고 있는 것 같다. 문득 던전의 입구에 서 있는 용사가 된 기분이 든다.

그렇기에 선택해야 할 것이다. 다시는 그의 영화를 거들떠보지 않기를 다짐하며 불쾌함과 마주하지 않을지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무기로 미로 속 은폐되어 있던 사실을 넘어 새로운 서사로 나아갈지. 무엇을 선택하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 다음 스텝은 "우리의 내면에 대한 삶의 경험,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거짓말이다. 진실은 외부에 우리가 하는 행동 속에 있다."라는 지젝의 지적처럼 행동과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폭력이란 무엇인가, 슬라보예 지젝, 난장이, 2011, p. 83)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