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박근영, "시의 운율로 찍은 영화, 영화의 언어로 쓴 시"
영화 <한강에게>(2018), <정말 먼 곳>(2020)
박근영의 영화에서 '시' 또는 '시인'은 주요한 영화적 소재가 된다. 국문학과 출신의 이력과 더불어 시의 운율에 따른 몽타주, 메타포적으로 다가오는 풍광들을 보고 있다보면 그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시적'이라는 표현은 불가피한 것만 같다. 그렇다면, 박근영의 시적 연출을 가능케 하는 영화적 방법론은 무엇인가.
그의 영화가 지닌 시적 감흥 너머에는 대상과 세계에 대한 끝없는 관찰이 있다. <한강에게>(2018)의 시인과 포스트 세월호의 시대적 감각. <정말 먼 곳>(2020)의 퀴어와 화천. 그는 한국이라는 땅이 지닌 공동체적 아픔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애도가 가능케 되는 순간을 오롯이 기다린다. 또한, 그는 한국 독립영화 안에서 자신만의 프로덕션을 밀어붙인 작가 중 한 명이다. 많은 장면을 1인 체제로 촬영하며 리얼의 감각을 한껏 끌어올린 <한강에게>와 더불어 강원도를 부지로 운영 중인 봄내필름과 협업한 <정말 먼 곳>까지. 그는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 때로는 자신이 감각하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지속가능한 필름 메이킹을 고민한다.
신작 촬영을 마치고, 다음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그에게 이러한 고민은 현재진행중이다. 어쩌면 새로운 변곡점이 될 그의 다음 챕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와 함께 이전의 영화를 되짚는 시간을 가졌다.
김민세 영화평론가
최근작 <정말 먼 곳> 극장 개봉 이후로 4년이 지났다. 그간 어떻게 지내왔는가.
박근영 감독
<정말 먼 곳> 종영 후에 강원도로 이주를 했다. 춘천과 강릉 등, 강원도 권에서 매년 강의를 하고 있고 영화제 관련 일에 종종 참여하며 지내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새로운 장편 영화 촬영을 마쳐서 후반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제목은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이다. 강원도에서 살게 되면서 접하게 된 일들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원주 아카데미 극장이 철거된 일이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고, <정말 먼 곳> 작업을 함께 했던 스태프와 배우들과 함께 했다. 원주를 주요한 배경으로 하고 전국의 단관 극장들을 다니며 찍은 영화다.
김민세
국문과 출신으로 알고 있다. 학창시절부터 문학을 비롯한 창작에 욕심이 있었는가.
박근영
고등학생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꾸었다. 대학을 준비하며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영화과를 가야 된다는 생각을 했었고, 부모님을 통해 알게 된 영화과 교수님께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근데 영화과를 말고 인문 대학에 갈 것을 권하더라. 다만, 인문 대학에 가더라도 영화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학과에 진학하고 싶었고, 국문과에서는 시나리오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국문과에 진학했다.
결국, 시나리오와 관련된 수업은 없었지만 문학과 희곡에 관심을 가지며 공부했고, 이후 문예 창작단에 들어가서 시를 열심히 쓰게 되었다. 그러나 국문학과 수업만으로는 영화에 대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고, 시나리오 교육원과 영화학교를 다니며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과 그룹을 만들어 시나리오 스터디를 진행하기도 했고, 서로의 단편 영화 제작 현장에 가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김민세
어린 시절 영화에 대한 기억은 어떠한가.
박근영
어린 시절 대전의 자운대 근처에 살았다. 영내에 거주 공간과 문화 공간, 학교 등이 있는 큰 군부대였는데, 그곳에서 매달 한 편씩 무료로 상영하는 영화를 보며 여러 영화들을 접할 수 있었다. 영화를 꿈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때는 1999년 개봉 당시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보았던 순간이다. 중학교 3학년 당시 타이틀 시퀀스에서 나카야마 미호가 눈 쌓인 언덕을 걸어 내려가는 장면을 보고 이전에는 느낄 수 없던 굉장한 감흥을 받았다. 그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저런 장면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독서실에 있는 비디오테크에서 거의 매일 같이 <러브레터>를 돌려봤다. 장면 하나하나를 거의 모두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보면서 영화감독에 대한 꿈과 열망이 점점 커졌던 것 같다.
김민세
감독님의 영화는 '시적'이라는 말로 종종 설명되곤 한다. 문학과 영화에 모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어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박근영
말했다시피 시의 속성을 가진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국문학과를 가고 시를 쓴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의도하고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것들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영화를 꿈꾸는 것과 별개로 시에 몰두했던 시기가 있었고, 그 시기에 영화와 시가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 영화를 만들 때나 영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영화에서 시적인 순간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시 창작의 방법론이 영화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고민하곤 했다. 그런 면에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는 그 시기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감독이었다.
김민세
<한강에게>와 <정말 먼 곳> 모두 '시'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한강에서>에서는 엔딩 부분에, <정말 먼 곳>에서는 후반부에 극중 인물이 시를 낭독하는 목소리 위에 몽타주 시퀀스가 겹쳐진다. 시의 형식과 몽타주라는 영화의 형식에서 어떠한 연관성을 느끼는가.
박근영
일단 영화 속에 시를 삽입한다면 그 시 전체를 온전히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히 전문으로 담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장면과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테렌스 멜릭을 대표적인 리듬의 감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영화 속 몽타주 시퀀스의 리듬과 무드로부터 시 형식과 몽타주의 연관성을 잘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김민세
<한강에게>는 애도에 관한 영화인 면에서 세월호를 떠올리게 만든다. 초반부에 304 낭독회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언급이 되기도 한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세월호에 대한 담론을 어떻게 녹이게 되었나.
박근영
<한강에게>는 20대의 내가 겪었던 것들과 나를 둘러싼 것들을 바탕으로 만들게 된 영화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많은 부분이 재구성되었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조각들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많다.
나아가 이 사회 속 시인의 존재를 고스란히 담고 싶다는 생각에 시인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시인은 어떤 시대와 공동체의 아픔에 있어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항상 시대의 아픔이 있고 <한강에게>를 구상하던 당시에 가장 큰 아픔은 세월호였다. 실제로 그 시기에 세월호의 애도에 관해 활동하는 시인들을 지켜봐왔고,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영화 안에 담기게 되었다.
김민세
말한 것처럼 시인의 삶을 여러 각도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시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사전 조사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국문학과 시절의 생활이 도움이 되었는지.
박근영
국문학과 문예창작단 동기, 선후배들 중에 시인들이 많다. 그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고, 소개를 통해 여러 시인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일상에 대한 사소한 것부터 개인이나 공동체의 아픔에 대해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진아라는 캐릭터를 조금씩 그려나갔다.
김민세
영화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서점에서의 낭독회 장면은 시인의 일상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내러티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서사 구조에서 잠시 떨어져 현실 세계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그대로 단면으로 잘라낸 듯한 장면이다.
박근영
시와 관련한 세미나 혹은 낭독회의 풍경은 나에게 굉장히 익숙한 장면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시인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 내지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과 다르게 나에게 친숙한 풍경을 그대로 그리는 게 오히려 흥미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과 '영화와 무관하게 실재하는 것'이 영화 속에서 서로 충돌하고 간섭하면서 발생하는 감흥에 늘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 장면을 영화적으로 세팅해서 찍는 게 아니라 실제로 낭독회를 개최하고 그 실재하는 현장을 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일반적인 영화 현장처럼 리테이크를 하면서 찍기보다는 최대한 실제 현장을 그대로 담고 필요에 맞춰서 편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퇴근길 책 한 잔'이라는 지금은 사라진 독립 책방이 촬영에 동참을 해주었고, 낭독회와 동시에 영화 촬영이 진행된다는 것을 전제로 홍보를 해서 행사를 열었다. 영화 속 주인공 역을 맡았던 강진아 배우가 사회를 보고, 실제 시인을 섭외하고, 일반 관객 대상으로 참여자 신청을 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촬영 때에도 직접 개입해서 연기 디렉팅을 주지 않았고, 카메라 두 대를 적절한 위치에 배치해서 낭독회 행사와 별도로 촬영을 진행했다.
김민세
책방에서의 낭독회 장면 뿐만 아니라 실제 환경을 활용해서 촬영한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가령 영화 후반부에 길우가 연극을 하는 장면은 연극 무대를 담은 숏과 관객석에서 연극을 보는 진아의 얼굴을 담은 숏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숏을 낭독회 장면과 유사한 방식으로 촬영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박근영
책방에서의 낭독회 장면, 광화문에서의 304 낭독회 장면, 길우의 연극 장면이 그런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영화를 구상할 때부터 염두한 방식은 아니었다. 광화문 낭독회 장면의 경우, 사전 조사 과정에서 시인들과 만나며, 304 낭독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발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낭독회 현장에 강진아 배우가 와서 낭독을 하고, 그 장면을 영화로 촬영하면 어떻겠나 하는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나아가 그곳에서 낭독되는 시를 강진아 배우가 직접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결국은 직접 쓴 시와 세월호 유족의 수기를 발췌한 부분을 낭독하게 되었다.
길우의 연극 장면의 경우에는 강길우 배우의 실제 연극 공연 현장을 활용한 장면이다. 촬영이 이루어졌던 2016년 당시에 강길우 배우가 준비하고 있는 공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가 소속되어있던 '비로소'라는 연극 창작 집단에서 협조를 해준 덕분에 촬영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김민세
촬영 과정에서 있어서 즉흥적인 면모들이 주로 보인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시나리오와 콘티 작업은 어떻게 준비하는가.
박근영
<한강에게>는 작업 초반에 써둔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대사를 점점 지워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스태프 없이 혼자 작업하는 영화이기도 하고, 현장에서의 즉흥성과 기동성, 유연함 등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다. 대사를 지우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단편 소설 같은 형태를 띈 시나리오가 되었다. 사실 단편 소설이라 할 수도 없는게, 씬에 해당하는 정황들만 묘사가 되어있는 글이었고, 현장에서는 그 정황만을 파악한 상태로 촬영에 들어갔다. 구체적인 대사에 있어서는 내가 장면의 첫 대사 정도를 제안하고 배우들이 그 대사를 기반으로 즉흥적으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이어 나가는 식으로 만들어갔다. 6개월의 시간 동안 배우와 함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바탕이 있었고, 이미 각자가 이야기를 숙지하고 있으니 즉흥적인 연기 속에서도 생각하던 캐릭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이와 반대로, <정말 먼 곳>은 <한강에게>에 대한 반작용 같은 작품이었다. 스태프 구성과 시나리오에 대한 접근 등 모든 면에서 의도적으로 이전의 작업과 다른 방식을 취하려 했다. 그래서 전체 리딩도 몇 번 진행을 했고, 시나리오에 있는 대사들 거의 그대로 영화에 담겼다.
콘티 작업은 잘 하지 않는 편이다. 홀로 또는 촬영감독과 사전에 촬영장소에 가서 카메라의 위치와 샷 구성, 스테이징을 구상한다. 촬영에 들어가서는 그 당시의 빛이나 날씨, 환경, 아이디어에 따라 조정해가며 진행한다.
김민세
즉흥적인 연기로만 오로지 끌고나가는 듯한 장면들이 있다. 특히, 진아가 선배 부부의 집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은 부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길우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까지 긴 시간을 거쳐 대화가 이어지는데, 이 흐름과 호흡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거의 10분 가량 한 숏으로 진행되더라.
박근영
선배 부부 중 한 명으로 출연한 전고운 감독은 실제로 강진아 배우와 각별한 사이다. 시인 진아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한 선배 시인의 캐릭터가 필요했고, 실제로 인연이 있는 전고운 감독에게 부탁해서 전고운, 이요섭 감독 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서 촬영을 하게 되었다. 촬영을 위한 별다른 준비를 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집에 가서 요리를 하고 함께 식사와 술을 나누면서 촬영을 진행했다. 장면을 보면 가운데 식탁을 두고 인물 셋이 둘러 앉아 있지 않나. 그 인물 배치와 카메라 앵글을 잡아놓은 다음에 나를 포함해서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쯤에서는 촬영을 들어가도 되겠다는 순간에 내가 빠지고 촬영을 시작했다.
부부의 연애시절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신호를 주면 남편이 빠지고, 고은이 진아에게 길우의 이야기를 넌지시 건넨다는 식의 계획을 사전에 정했다. 대화 주제와 남편이 빠지는 타이밍을 제외하고는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대화하도록 지시했다. 두 감독님의 즉흥적인 연기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워 긴 호흡의 대화씬이 가능했다. 실제 테이크는 16분 정도의 분량이었고, 그 중 11분 분량이 영화에 들어갔다. 총 네 테이크를 촬영했는데 초반 부분 펼쳐지는 대화 주제는 그때마다 조금씩 변주와 수정을 거쳤던 기억이다.
김민세
그런 방식의 촬영에 있어 두려움은 없었나. 배우들도 여러 걱정과 고민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박근영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무모했다는 생각도 든다. 첫 영화였고 혼자 만든 영화였기 때문에 불안한 건 당연했지만, 이상하게도 실제로 촬영을 진행할 때는 두렵지 않더라. 반드시 이 장면을 어떻게 찍어내야 한다는 강박을 갖기보다는 때마다 감흥으로 다가오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다. 예산은 없지만 그만큼 다른 영화에서 갖지 못하는 우리만의 시간을 쓸 수 있다, 우리는 언제든 촬영을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을 배우들과 자주 나누었다. 여건의 부족함을 배우들이 감당해주고 채워준 부분이 많았다.
김민세
선배 부부와의 식사 장면은 스태프가 전혀 없었나.
박근영
대부분의 실내 촬영, 집이나 병원 등 작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촬영은 스태프 없이 배우와 나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한강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장면이나 책방에서의 낭독회 같이 야외에서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은 불가피하게 최소한의 스태프를 구성해서 촬영했다.
김민세
<정말 먼 곳>은 봄내필름이 제작한 작품이다. 크레딧에 따르면 장우진 감독이 제작을 맡았는데, 제작 과정에서 어떠한 협업을 주고 받았는가.
박근영
장우진 감독과 김대환 감독은 같은 시기에 대학원을 함께 다닌 동기들이고, 첫 장편을 찍기 전부터 여러 교류를 나누곤 했다. <한강에게>를 만들 때에는 미니멀한 제작 환경 안에서 카메라와 녹음기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 함께 논의했고, 그들이 앞서 찍은 영화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평소에 서로의 영화에 대한 작업 방식이나 지향점에 대해 공유하고 있던 것들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정말 먼 곳>의 구상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고, 강원도가 주 배경인만큼 함께 해보자는 의견에 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장우진 감독과 제작과정 전반에 걸쳐 많은 고민을 함께 했다. 특히 강원도에 대한 연고와 기반이 있다보니, 기획 과정에서 화천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에서 취재를 진행할 때 강원도 현지 도민들과 만나 여러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미리 염두에 둔 화천의 여러 공간을 함께 오가면서 이 공간을 영화 안에서 어떻게 담아낼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김민세
'화천'이라는 곳은 여러모로 이중적인 곳으로 영화에서 묘사된다. 이미지적으로 아름다운 순간이 많지만, 할머니가 실종되기 직전, 현민이 사라진 새벽의 장면 등에서 누군가를 집어삼키고 누군가는 떠나야하는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변모한다. 또한 굉장히 한국적인 풍경이다 싶다가도 이국적이고 나아가 초현실적인 공간 같기도 하다. <정말 먼 곳>에 드러나는 화천이라는 장소의 정체성에 대해 자세히 들어보고 싶다.
박근영
당시 화천의 공간들이 지닌 아이러니함에 매료되었었다. 사실 서울에서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은데 서울과는 굉장히 다른 풍경이 나온다는 것에 괴리감이 있었고, 압도적인 풍광을 볼 때 아름다우면서도 오히려 서늘해진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 공간의 역사에 대해 알아갈 수록 그런 것들을 느꼈다. 화천은 고지전이 펼쳐졌던 일종의 전쟁의 격전지 같은 곳이고, 다시 말하자면 수많은 죽음이 잠들어 있는 땅인데,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이지 않나. 영화의 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도, 극중 인물이 행복한 순간이든 비극적인 순간이든 변함없이 풍광은 아름답게만 존재한다는 게 더 잔인하게 다가왔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이 세계가 갖고 있는 속성이 아닌가 생각했고, 그런 부분들이 더 부각될 수 있게 촬영하려 했다.
김민세
섬 장면에 대해 자세히 묻고 싶다. 진우와 현민이 하루동안 머무르는 섬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정말 먼 곳'에 가장 어울리는 공간이라 생각한다. 새벽 즈음에 역광으로 촬영한 이미지나 윤슬을 배경으로 촬영한 이미지들은 초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 상에서 외딴 곳에 위치한 이미지라고 생각하는데, 그 공간에서의 촬영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나.
박근영
파로호 안의 섬에서 진행된 촬영이다. 파로호는 예전에 낚시터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그 장면을 담을 장소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고, 일단은 파로호 근방으로 시나리오 상의 스팟을 정했다. 이후 로케이션 서칭 과정에서 파로호라는 호수가 워낙 크다 보니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다가 배를 타고 호수 안으로 들어가게 된 거다. 그렇게 배를 타고 돌아다니는 와중에 호수 바깥에서는 볼 수 없던 섬을 발견했다. 섬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나무 한 그루 없이 호수 한가운데 땅이 살짝 올라와 있는 듯한 섬이었는데 여러모로 영화에 어울리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다른 씬과 이어서 촬영을 할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고, 해가 뜨는 순간부터 지는 순간까지를 카메라 안에 담고 싶어서 새벽부터 스태프들과 거의 하루동안 그곳에서 지내면서 촬영했다. 준비된 시나리오의 장면들도 있었지만 많은 장면들을 순간을 포착하듯이 찍었다.
김민세
영화에서 현민과 진우는 종종 서로를 껴안는다. 특히 화천에서의 첫 만남에서 현민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진우를 껴안는 장면에서의 몸짓과 표정은 굉장히 절묘하게 퀴어적인 공기를 영화 안에 불러온다. 이 장면을 포함해서 긴 시간 동안 포옹을 담은 롱테이크 숏들이 등장하는데, 유의했던 점들은 무엇이었나.
박근영
개인적으로 뒤에서 끌어안는 모습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의식한 건 아니지만 <한강에게>에서도 길우가 진아를 뒤에서 끌어안는 장면이 등장한다. 사실 허그의 형태는 다양하다. 예를들어, 친구 간, 연인 간, 부모 자식 간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허그가 있을텐데, 뒤에서 끌어안는 백허그는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허그라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이들의 관계와 감정을 굉장히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진우와 현민이 버스정류장에서 끌어안는 장면에서는 대사를 통한 표현을 최대한 배제하려 했다. 이들이 매우 오랜만에 만난다는 사실과 연인 관계의 느낌, 반가움을 비롯한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이 대사 없이 모두 표현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부터 끌어안는 자세, 말과 말 사이의 텀, 숨죽임 등이 잘 어우러지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민세
기주봉 배우가 맡은 중만 역의 캐릭터가 여러면에서 인상적이다. 진우와 현민의 관계를 엿보는 관찰자이면서, 그들에게 섣불리 교훈적으로 다가가지도 않는다. 진우와의 마지막 대화 장면에서는 그 세대의 어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그 관찰자로서의 중만의 캐릭터가 이 영화가 퀴어를 다루는 섬세함을 더했다.
박근영
영화의 시작 단계부터 기주봉 배우를 생각하고 구상했던 캐릭터이다. 개인적으로 기주봉 배우는 산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면 무언가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단정 짓지 않는다. 그런 면들이 캐릭터를 구상하는 데 있어서 많은 영감이 되었다.
<한강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숏이 많지 않은 영화를 만들다보니, 영화에서 어떻게 영화적인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한다. 이때 중만의 캐릭터가 영화에서 작은 긴장감을 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의 초중반에 현민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굳이 숏을 나눠서 중만이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나. 현민과 함께 하는 식사 장면도 그러하다. 관객에게 중만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보여주지만 중만이 이들을 보는 태도는 최대한 보여주지 않고 미뤄둔 것이다. 그렇다면 중만이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긴장감의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만의 이야기가 꺼내지는 때는 영화의 결말부다. 그만큼 결말부의 중만과 진우의 대화 장면은 중요한 장면인데, 그 중요성에 맞게 다른 대화 장면과는 달리 정공법으로 촬영하자고 촬영감독과 이야기했다. 각 인물을 오버 더 숄더로 잡은 두 숏이 이들의 말과 표정, 대화의 내용이 정확하게 오롯이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라 생각했다.
김민세
<한강에게>와 <정말 먼 곳>에 출현한 배우들은 지금까지 독립영화나 매체 연기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듯 배우와의 협업이 중요했으리라 생각이드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박근영
<한강에게>는 2016년에 촬영하고, 1년 동안 후반 작업을 거쳐 2018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거의 10년이 되어가는데. 당시 강진아, 강길우, 한기윤, 최원용 배우와 함께 영화를 준비하고 촬영하던 순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강진아 배우와는 다른 역 배우부터 해서 다양한 것들을 논의했고, 함께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다니곤 했다. 그때는 나를 포함한 배우들 모두 무모할 수도 있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그만큼 순수했고, 모두에게 처음 같은 작업이다 보니 학창시절의 추억처럼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김민세
강길우 배우와 두 편의 영화를 찍어왔다. 협업 과정에서 서로를 어떻게 느끼는가.
박근영
나에겐 각별한 존재다. 나를 제일 잘 아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함께 작업을 해온 시간이 쌓이다보니 연출적인 스타일부터 다른 사람은 말하지 않으면 모를 수 있는 나의 디테일한 부분들, 감각적인 부분들을 잘 이해해준다. 디렉션을 할 때도 많은 말 없이 함축적인 말만으로도 서로가 원하는 걸 알 수 있다는 면에서 호흡이 잘 맞는다. 거의 영화를 함께 시작했다보니 느끼는 각별함과 특별함이 있다. 연기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늘 신뢰하는 것들이 있기에 작품을 할 때 항상 먼저 떠올리게 된다.
김민세
최근 새로이 눈여겨 보게 되는 감독들이 있는가.
박근영
30대 초반에 영화에 막 달려들었던 시기에서 40대로서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대한 생각들이 조금씩 변화하게 되는 것을 느낀다. 이전에는 시야를 좁히고 강한 열정으로 집중하고 몰두했다면, 지금은 사회 현상을 보다 이성적이고 건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요즘은 '미카엘 하네케'나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를 다시 보고 있다. 이들의 영화는 상황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 차갑게 느껴지는 면이 있는데, 그 차갑고 냉정한 태도로 카메라를 사용하고 본질을 보려고 하는 점에 이끌린다.
김민세
그들의 카메라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나아가 영화에 있어서 몰두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박근영
카메라의 위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전 영화 작업 때부터 집착하고 있는 질문 중 하나이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결국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스와 노부히로 감독을 학교에서 보고 카메라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다. 카메라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촬영할 것인지가 영화의 중요한 형식적, 철학적 태도를 결정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가령, 우리는 대부분 카메라를 가상의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에 극영화 안에서 카메라를 어느 곳에든 위치시킬 수 있다. 하지만 만약에 극영화에서 카메라를 물리적으로 실재한다고 인식을 하고 촬영을 하면 카메라의 위치에 있어서 일종의 제약이나 원칙이 생길 수 있지 않나. 영화연출이라는 것은 카메라로 단순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어느 위치에 서서 바라볼 것인지, 그리고 컷이 바뀌었을 때 카메라는 어디에 위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결정의 연속인 것이다.
김민세
최근 인상 깊게 보았던 한국 독립영화들을 여쭤보고 싶다.
박근영
가장 최근 작품으로는 장병기 감독의 <여름이 지나가면>(2024)을 흥미롭게 보았다. 느와르 장르의 문법과 속성을 초등학생 아이들의 세계로 가져오는 점에서 잘 짜여진 각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정홍 감독의 <괴인>(2022), 이종수 감독의 <부모 바보>(2023)는 형식적인 면에서 흥미롭게 다가오는 영화였다. 김미영 감독의 <절해고도>(2023)와 유지영 감독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2023), 백승빈 감독의 <안녕, 내일 또 만나>(2023)도 최근 몇 년 간 인상깊었던 영화들이다.
김민세
<한강에게>와 <정말 먼 곳>은 다소 다른 작업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이제 막 촬영을 마친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을 포함해 앞으로의 작업을 이어가는 데 염두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박근영
앞서 언급한 카메라의 위치와 관련해 이야기해보자면. <한강에게>는 진아가 보지 못하는 것은 카메라도 보지 못한다는 원칙 아래서 한 사람의 시점을 따라가는 영화였다. 반면 <정말 먼 곳>은 인물 각각의 서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반대의 관점을 갖고 촬영했다.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은 규모나 여러가지 면에서 그 사이에 위치한 듯한 작품이다. 그리고 가족을 소재로 다음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정말 먼 곳>과 가까운 방식이 될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는 방식이나 감정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 요즘인데 그 변화를 반영하여 작업에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다.
김민세
한해를 절반을 보내고 있는 시점이다. 감회가 어떠한지, 그리고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박근영
올해 안에 <극장에 두고 온 것들>의 후반 작업 마치는 데에 집중할 것 같다. 앞서 말한 새로운 시나리오 작업 또한 이어갈 생각이다. 예전에는 스스로 채찍질하며 전력질주 하듯이 영화에 임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보다 멀리 보면서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떻게 페이스를 조절해야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는지 지속성에 대한 고민들 말이다.
[인터뷰 김민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