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빈의 영화의 파편으로부터] 스킨십 없는 미래
NETFLIX <이 별에 필요한>을 중심으로 본 SF와 멜로드라마 사이 신체
근미래가 시공간적 배경으로 설정된 영화에서 어느덧 익숙해진 이미지는 인물이 홀로그램 따위를 조작하는 모습이다. 인물들의 신체는 더 이상 조작하려는 사물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는다. 현실 공간에 띄워진 입체 영상과 상호작용하기 위해 우리 신체는 물리적인 맞닿음 없이 공중에서 팔 따위를 가볍게 휘적이곤 한다. 부피와 면적과 무게를 지님으로써 실제로 감각되고, 그 감각을 거쳐 감상이 촉발되는 물성 개념은 동시대의 현안이 아닌 기원적인 것으로 퇴장한다. 물리적 접촉을 요구하는 사물의 특성은 이제 극복하고 대체되어야 하는 무언가로 그려지는 셈이다. 2050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영화 <이 별에 필요한>(한지원, 2025)의 인물들은 PC나 휴대폰과 같은 기계를 다루지 않는다. 기계적인 몸체의 구속에서 벗어난 가상의 인터페이스를 응시한다. 이들은 인간을 실물 크기로 구현한 홀로그램 화상 통화 시스템을 통해 멀리 있는 상대와 소통한다. 원거리의 존재를 눈앞의 실체와 다름없이 인식하고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는 지구와 화성에 거주하는 두 인물의 멜로 서사를 상상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급기야는 뇌의 신호를 인식하는 초연결 기술 시대에 인간의 신체는 더 이상 전자 기기를 향해서조차 손을 뻗지 않는다. 신체가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정지된 움직임에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정말 혁신이 되어가는 걸까. 말하자면 영화가 예견하는 미래의 풍경은 원거리를 극복하는 시각의 활성화에 편향된다. <애프터 양>(코고나다, 2021)의 화상 통화 장면은 각 인물을 원 쇼트로 담아 컷을 이어 붙이는 고전적인 편집법을 통해 표현된다. 두 인물을 담은 쇼트가 연결되는 것만으론 이들 사이 거리가 통신 장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예측하기 어렵다. 기계 장치의 몸집을 노출시키지 않는 대신 영화는 '본다'라는 행위만을 남긴다. 안드로이드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디스플레이는 안경과 닮은 모양새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 이외의 신체 움직임은 불필요해 보인다. 양의 기억 내부로 접속하는 기계 프로그램은 흡사 은하계를 연상시키는 CG의 비현실적인 질감으로 디자인되었지만, 그걸 응시하는 인간의 몸짓은 지나치게 일상적이다. 부동한 채 렌즈를 응시하는 몸짓이 곧 접속인 이 프로세스는 몸-살의 접촉 개념과는 멀다. 응시가 공간을 가로지르는 행위인 이 세계에서 자발적으로 마비된 신체 대신 정확도를 요구하는 기계음(“정확히 명령하세요”)에 응답하는 인물의 혼잣말이 간간이 울릴 따름이다.
원거리를 근거리로 전환하는 미래 기술이 인간 신체에 제공하는 분리의 체험은 사물과 인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점점 인간과 멀어진다. <이 별에 필요한>을 좀 더 말해 보면, 애초에 영화가 일차적으로 극복하려던 원거리의 문제는 단지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물리적인 감각으로 성취하는 문제가 아니던가. 화성이라는 원거리 시공간에 신체가 진입하고, 닿고, 접지하고 각종 현실 감각으로 얽히며 개입을 주고받는 것이 극의 주요 목표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 주인공 난영에게 있어서 화성 탐사라는 목표는 화성 기지에서 사망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을 회복하는 통로인데, 그것은 그가 직접 화성이라는 시공간으로 이동해야만 회복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이때 원거리에 따른 제약은 단순히 대상을 볼 수 있단 사실로 극복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가 제약으로 작동해 극에 위기 상황을 불어넣는다. 그러니 대상과의 직접적인 접촉 과정을 생략하는 기계와 기술이 혁신으로 여겨지는 문제는 인간의 근원에 깊숙이 접근할수록 그것의 불충분 조건이 되는 셈이다.
멜로드라마로써 <이 별에 필요한>을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구의 제이는 우주로 떠난 '홀로그램화된' 난영을 보고, 대화하고, 손을 맞잡는다. 그런데 이 환경은 사랑의 충족 조건으로 치자면 과연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일까. 출연하고 퇴장하는 일회적 이미지를 붙잡는 응시의 힘이 아무리 강렬하다 한들, CG와 AI와 같은 가상의 이미지가 범람하며 시선을 현혹하는 때 그 일부로 뒤섞인 신체는 멜로드라마의 미래를 긍정하는 수식이 될 수 있을까.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2046>은 주인공이 쓰는 SF 소설을 통해 2046년의 가상 현실을 상상하지만, 그 격차가 무색할 만큼 두 세계의 풍경은 유사하다.
인물들은 하나의 시공간에 공존하며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를 탐미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붙잡지는 못한다. 이들에겐 오차 없는 이진법에 근거한 데이터값이 아니라 엇갈린 시선이나 모호한 표정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정보가 필요하다. 주인공은 벽의 구멍을 통해 타인을 훔쳐본다. 그러나 비밀이 쏟아지는 이 구멍(시선)은 인간의 신체 능력을 넘어서는 기계의 그것이 될 수 없다. 보는 것은 모호하다. 모호한 것은 수많은 경계를 지닌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하지만 이는 소설의 허구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인공은 왜 미래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는가. 미래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거듭해서 그 허구를 실제로 불러들이려 하지만, 2046년의 미래가 상상하는 것은 안드로이드에게서 느껴지는 '체'온이다. 체감할 수 없는 우주의 원대한 거리 개념은 옆의 존재를 욕망하는 인간을 이야기한다. 이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려는 쪽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에 대한 태고적 근심을 지속해야 하는 문제다.
지금까지의 한국 SF 영화들이 그러했듯 <이 별에 필요한> 역시 우주라는 공간을 도약의 무대로 확장하지 못한 영화다. 우주의 광활함은 외려 탈출하고 극복해야 할 무대로 모델링되고, 따라서 회복과 복귀의 스토리를 위해 통과해야 하는 통로쯤으로 활용된다. 다만, 한편에서 바로 그 통로로서의 우주에 대한 이해를 연인 관계의 서사를 구축하기 위해 투입한 것으로 본다면 좀 다르게 느껴진다. 요컨대 한 번의 터치로 가볍게 통과해 버리는 반투명한 신체들이 우리의 미래 모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루기 쉽도록 고안된 디지털 기기가 아니라 정교하게 합을 맞춰 작동하는 LP판이나 악기와 같은 사물이 지닌 예민한 성격은 인물에도 적용된다. 공중을 휘적이거나 비켜남으로 이어지지 않고 맞닿은 것에 동등한 맞닿음으로 되돌아오는 두 신체의 합. 아날로그적인 몸짓을 통로로 나타나는 온갖 상념이 이 영화에 남아 있다.
한지원의 전작들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여름>의 인물은 상대와 포옹하며 (원작의 구절을 인용하긴 했으나) “뼈와 살과 피부를 가진 존재라는 것에 감사”를 느낀다. <럭키미>의 고두식에게 대형 스크린 속 모델 티티는 동경의 대상 그 이상이 아니다. 기계적 스크린에서 빠져나와 그 스크린의 아우라가 제거된 인물의 실'물', 곧 신체라는 실제의 물성이 인물들의 관계를 특별하게 만든다. <코피루왁>에서도 다르지 않다. 한지원은 물과 불과 빛과 같은 물성의 촉각적 텍스처를 기민하게 포착한다. 작금의 영화가 실제 배우의 신체를 가상의 그래픽 이미지로 대체하며 싱크로율을 대조하는 동안, 한지원은 응시에 집적된 2D 애니메이션의 표면성을 확장하는 오감을 충만하게 자극한다. 그러면서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우주의 절대적인 힘에 관해서도 사유한다.
물질로서의 신체는 떠나고 죽는다. 상실을 느끼는 헛헛한 신체들이 뜨겁고 차가운 온도 차를 구분하거나(<코피루왁>) 주변 공기의 짓누름에 저항하려 오감의 반경을 넓힌다(<사랑한다 말해><이 별에 필요한>). 신체에 주어지는 쾌락의 경험에는 있었던 것이 떨어져 나가는 슬픔까지도 포함된다. 인간의 지혜를 구하던 <아득히 먼 춤>의 안드로이드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물었다. 어쩌면 인간은 고철 안드로이드보다 더 단단한 피부를 가진 모양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