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메타 코멘터리] '소마이 신지'를 거울 삼아 #1

소마이 신지와 아이들의 영화

2025-08-12     이상용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며 13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었던 소마이 신지의 작품은 국내에서 영화제와 시네마테크를 통해 소개되다가 최근 정식으로 개봉되었다. 지난해 1980년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태풍클럽>(1985)에 이어 올해 <이사>(1993)와 <여름정원>(1994)을 연이어 개봉하면서 극장가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은 재개봉 영화의 유행에 합류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소마이 신지의 영화들은 재개봉 작품은 아니다. '오래된 새 영화'다. 그것은 한국 극장가의 주요한 특징이다. 과거 검열과 수입 개방의 역사 속에서 바깥의 영화들이 온전히 통용되기는 어려웠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나 형성된 해외 영화의 수입은 초창기부터 교과서에 등장하는 기지의 영화들을 미지의 영화로 소환하였다. 백두대간에서 선보인 타르코프스키의 <희생>(1986)을 비롯하여 '오래된 새 영화'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지니게 되었다. <희생>은  십만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오래된 새 영화'의 개봉은 어느새 30년의 역사를 지녔다. 심지어 <희생>을 개봉했다는 사실도 희미해지자 2024년에 아트나인을 통해 재개봉되기도 하였다. 당분간 어떻게 바라보든지 '오래된 새 영화'들은 주요한 문화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이 현상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불릴만한 우리 시대의 포스트 모던한 문화적 단면이다.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에서는 한 작가의 작품을 두고 몇 차례 이상의 상영을 하기가 어렵지만, 극장 개봉으로 전환되면서, 어느 정도의 관람 자유를 허락받는다. 이 작품들을 극장에서 경험하지 못한 현재 세대와 이름만 알았던 과거 세대 모두에게 호응을 일으킨다.

오래된 새 영화의 흐름에는 MK2를 비롯하여 판권을 보유한 해외 배급사나 세일즈사를 중심으로 오래된 영화를 4K나 그에 준하는 화질로 '디지털 리마스터링'하는 탓도 있다. 영화 마켓에서는 심심치 않게 복원 리스트 혹은 복원 예정 리스트의 팸플렛을 볼 수 있다. 새롭게 리마스터링한 작품들이 수입 후보 리스트에 오르면서 새로운 관객을 기다린다. '오래된 새 영화'는 대부분 필름으로 제작되었지만, 이 작업을 통해 디지털로 복원된 동시대의 영화로 탄생한다.

 

일본 영화의 유행 속에서

그 가운데 다소 덜 알려져 있던 '소마이 신지'가 들어왔다. 눈 밝은 수입사로 인한 유입인지, 일본 영화에 대한 한국 관객의 호응을 고려한 것인지는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최근 국내 관객들의 '일본 영화'에 대한 충성도는 높아졌다. 이와는 달리 유럽영화에 대한 호응도는 다소  누그러졌다. 과거 상업영화를 제외한 수입 영화의 주요 후보가 유럽 예술(작가, 아트) 영화와 맞물려 있었다면, 최근 5년 사이에는 일본 작가 영화에 대한 반응이 크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여전히 칸과 베를린의 주요한 화제작은 유럽영화이며, 영화제의 프리미어를 통해 수입된 작품은 국내 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후, 이듬해에 개봉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유통 방식을 두고 상투적이라고 하기에는 불가피한 조건들이 있다. 하지만 해외영화제를 통한 선별과 선정, 국내 영화제의 선공개 후 개봉되는 과정은 루틴이 되었고, 그 결과 국내에 선보일 유럽 영화의 리스트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서 우선적으로 선택되는 것은 전통적인 유럽의 강호(켄 로치, 다르덴 등)들이다. 시장이 견고하게 짜여졌을 때, 그 분야의 스타를 선호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국영화의 경우, 2000년대 초반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류승완 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감독들이 등장하였고, 2010년대부터 독립영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감독들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이 감독들은 이전 감독들과는 달리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지 못했다. 여전히 한국영화의 대명사는 2000년대 초반에 데뷔한 이들이다. 한국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대체적인 문화를 찾아 나선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가 교환되는 방식도 유의미하다. 그 어느 때보다 상호방문하는 관광객 수가 많은 현실에서(20대를 중심으로 가장 방문하길 원하는 국가는 각각 한국과 일본이다) 일본에서는 K드라마와 K팝의 영향력이 오래전부터 영향을 끼치며 친밀함을 형성하였고, 한국에서는 넷플릭스의 시대와 더불어 더욱 강력해진 재페니메이션(지브리와 <진격의 거인>, <귀멸의 칼날>의 경우처럼)과 극장을 통해 공개되는 영화들에 눈을 돌리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제페니메이션을 접할 수 있는 애니계의 넷플릭스 '라프텔'의 성장도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린다.

 

그 가운데 역사적 격변을 통해 갈등을 겪어 온 두 나라의 문화가 상호적으로 호응하는 지점은 서로의 차이와 결핍을 해소하는 집단적 욕망의 발견은 여전히 집단적, 개인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이자 현재의 관심사로 이어진다.

유럽 영화에 대한 피로함, 한국의 새로운 감독에 대한 기대감의 저하 그리고 일본과의 물리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하마구치 류스케'를 필두로 '미야케 쇼'의 뒤를 잇는 감독들의 영화가 선보이기 시작했고, 올해 화제작이라 할 수 있는 <해피 엔드>(2024)는 올해의 롱런 영화가 되었다. 그 가운데 일본의 거장들의 '오래된 새 영화'들도 유럽 거장들 이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마무라 쇼헤이', '스즈키 세이준', '오즈 야스지로'의 일부 작품이 개봉되었고, '이와이 순지'나 '구로사와 기요시'는 현재의 감독들이기는 하지만, 이들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호응도는 현재 영화보다는 과거의 대표작들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경우는 좀 예외적으로 국내에서 꾸준히 각광을 받아왔는데, 해외에서 제작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2019), <브로커>(2022)를 통해 다소 멀어지는 듯하였지만, 본연의 현실로 돌아간  <괴물>(2023)과 함께 일본적인 것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재인준되면서 과거의 영화들과 현재의 영화 모두 환영받는 대표적인 일본 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고레에다처럼 초기 다큐멘터리를 제외하고(대부분 방송용이었다), 전작이 꾸준히 소개된 감독도 드물 것이다. 유일하게 개봉되지 않은 작품은 2001년도에 선보인 <디스턴스>가 아닌가 싶은데, 1990년대 말 옴진리교 사건 이후 피해자들과 그 주변인들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흥미로운 영화다. 어쩌면 <환상의 빛>(1995) 이전에 고레에다의 주요 경력인 다큐멘터리의 특징이 가장 잘 녹아있는 극영화여서인지 몰라도 이 영화는 정식으로 개봉하지 않은 그의 유일한 극영화가 되었다.

올해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초기작을 상영하는 기획전까지 열리고 있다. 하마구치 감독이 직접 출연한 8mm로 찍은 영화 <아무렇지 않은 얼굴>(2002), 소메타니 쇼타 주연의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2013), <우연과 상상>(2021) 배우 현리가 나오는 <천국은 아직 멀어>(2016), 또 다른 워크숍 영화이자 <해피아워>(2015)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친밀함>(2011)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각본(하마구치는 거의 자신의 대본으로 영화를 준비한다)으로 찍었던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2009)에 이르기까지, <친밀함>을 제외하면 한 시간 미만의 영화들을 거의 망라한 초기작 상영전이 진행된다. 그것은 영화 시장에서 그 누구도 누리지 못했던 경우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장 이상한 일본의 감독은 '기타노 다케시'다. 한때 부산국제영화제의 단골 주인공이었고, <소나티네>(1993), <하나비>(1998), <키즈리턴>(1996), <키쿠지로의 여름>(1999), <자토이치>(2003) 등의 영화가 호응을 이끌었지만, 이제 다케시 월드는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최근에도 <브로큰 레이지>(2004)를 선보였는데, 극장과는 거리가 멀다. 이 격세지감이 일본 영화에 대한 국내의 선호도를 생각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 1990년대 다케시의 전성기에 일련의 야쿠자 영화로 대변되는 폭력성은 재개봉의 형식을 통해서라도 소환되기 어려운 조건으로 작동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 가운데 '소마이 신지'는 이전의 일본에서도 보기 어려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로 나타났고, 공교롭게도 현재의 한국영화와 가까이 놓여 있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 영화의 유년성 혹은 소녀성

소마이 신지의 영화가 동시대의 한국영화와 다른 혹은 동시대 일본 영화와는 다른 매력과 차이는 무엇일까. <태풍 클럽>, <이사>, <여름정원>으로 이어지는 개봉작의 공통점은 아이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소마이 신지는 닛카츠 로망 포르노의 기획으로 제작한 일부 영화와 몇몇 성인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는 근래의 한국영화와 비교를 가능케 한다. 한국 영화에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2016)과 김보람 감독의 <벌새>(2018) 이후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제작한 장편 독립영화들이 꾸준히 증가해 왔다. 이러한 흐름은 2010년대 중반에 일어난 한국 영화사의 의미있는 사건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어린이나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2000년대부터 새로운 전성기를 누린 한국영화는 이미 유년기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천만 영화라는 가시적 성과 앞에서 환호하던 2000년대 초반의 한국영화를 바라보던 허문영 평론가는 「한국영화의 소년성」이라는 글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국영화가 소년기 혹은 성장영화 시대를 경과해왔고 이제 그 마지막 단계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를 특징짓는 젊음은 실제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양자의 육체적 연령의 문제를 포함한다.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시작된 1990년대 후반부터 이른바 1천만 관객시대가 개막된 현재까지의 시기를 한국의 젊은 감독과 젊은 관객의 밀월기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60년대 세대의 감독들은 관객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70, 80년대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정서적 통로를, 전통적인 영웅상이 아니라 양자가 공유한 소년성에서 찾았다."

그런데 이 글을 쓴 2004년(나중에 단행본에 수정하여 수록하였다)에 주목한 것 중의 하나는 '소년성의 시효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예견이다. 전체 인구를 감안했을 때, 천만 관객 동원의 물리적 한계가 첫 번째 이유이고, 또 다른 이유는 더 이상 소년이 주인공이 아니라 어른 되기를 목전에 두거나 가족 중심 영화의 등장에 주목한다.

"소년들의 시련을 초래한 건 <실미도>(2003)에선 무자비한 국가권력이었고, <태극기 휘날리며>(2004)에선 참혹한 전쟁이었다. 홀로 남겨진 소년의 비극을 빚어내는 데 전쟁보다 더 강력한 소재를 찾긴 힘들 것이다. 먼 길을 걸어온 소년은 이제 막 가장 가혹한 시련을 경과했다. 어디에선가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겠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그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돼야 할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미국에서 폭발적으로 일었던 재난영화 붐은 토네이도, 화산폭발, 홍수 등의 온갖 재난을 거치고 난 뒤 1998년 <딥 임팩트>, <아마겟돈>에서 지구 일부가 파괴되는 가공할 스펙터클에 이르자 조용히 사라졌다. 2004년 충무로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효자동 이발사>를 비롯해 다수의 가족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2003년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희귀한 어른의 영화 <바람난 가족>의 성공 사례는 이미 한국영화의 주인공들이 어른이 돼가고 있다는 징조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그렇게 한국영화는 홀로 남겨진 소년들을 서서히 떠나보내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 영화를 보고 있으면 한국 영화의 소년들은 결코 어른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2000년도로부터 십 오년 뒤, 윤가은 감독과 함께 등장한 것은 소년성 이전의 유년기 탐색이거나 소년성과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소녀성'의 본격적인 등장이다. 여성 감독의 본격적인 등장, 페미니즘의 부상 등을 단순하게 말하고 싶기보다는 한국 영화는 어른의 길이나 가족 전체를 보여주는 것은 여전히 멀고도 험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한국 독립영화의 '가족'성을 탐색하며 '한국영화에서 '가족'은 무엇인가'에서 살폈듯이 오정민 감독의 <장손>(2023)이나 이미랑 감독의 <딸에 대하여>(2023)에서 가족 관계는 핵심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랑 감독의 <딸에 대하여>는 딸이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를 통해 '소녀성'에 대한 탐색을 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들과 함께 글을 통해 다룬 <언니 유정>(2024)은 두 사람으로 이뤄진 가족의 이야기보다는 자매의 소녀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허문영 평론가의 말을 빌려보자면,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젊은 관객들은 폭력의 현실과 역사 속에 발휘되는 소년성이 아니라 과거를 아련하게 회상하는 '응답하라 세대'의 유년성과 소녀성에 호응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60년대생 남성 감독들의 시대를 지나, 80년대와 90년대 초의 여성 감독들이 형성하는 주인공(자아)과 긴밀하게 공유하고 있다. 다만,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가족의 초상은 소년성이 중심을 이루는 영화보다 조금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스스로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 어른의 자리까지 상승하려는 욕망이 주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퇴행적으로도 보이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를 둘러싼 가족의 서사로 점철된다.

아이들과 소녀들을 위해 마련된 영화의 무대는 전쟁의 시련이나 국가의 공권력 같은 추상적이면서도 물리적인 남성적 권력(폭력)의 세트가 아니다. 보다 내적이고, 가족의 윤리적 갈등과 고통의 문제가 제기된다. <벌새>처럼 성수대교 붕괴라는 사회적이고 외상적인 상처, 한국의 근대화를 압축하는 시대적 사건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영화는 이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는다. 내밀하게 집중하는 것은 학업과 친구와 연인 그리고 가족 관계에 시달리는 자아의 초상이다. 그것은 주체적인 개인성과는 다른, 사회를 지향하는 개인이다. 여전히 사회(가족) 안에서 자아의 형성이 문제가 된다.

이지은 감독의 <비밀의 언덕>(2022)의 주인공 명은(초등 5학년)의 고민은 주변에 잘 보이고 싶다는 인정 욕구다. 학교 반장으로 잘 나가는 명은이지만, 시장에서 젓갈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명은은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작문을 통해 그럴듯한 가족을 만들어 내고, 상까지 탄다. 급기야 작문 속 가족이 진짜라고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러던 중 쌍둥이 자매가 전학을 오면서 거짓말은 위협을 받게 되고, 글쓰기의 문제라는 윤리적 심판대에 오르는 상황이 벌어진다. 

기존에 남성적 이데올로기로 치환되는 국가적 갈등, 이념적 충돌과 같은 거대 서사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짊어지고 있는 오래된 갈등이지만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거대 서사가 아니다. 윤리적 갈등이야말로 자아의 균열 뒤에 서 있는 '개인성'이나 '개인의 발견'으로 향하는 길이며, 작은 것들에 대한 주목을 통해 이뤄진다. 지난 십 년간 개인성의 화두로 등장한 욜로, 워라벨, 소확행 등의 언어적 유행도 이 영화들의 등장 시기와 맞물리는 것은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아이의 존재가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만한 태풍을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영화는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한계선을 그어버린다. 아이의 거짓말은 언젠가 멈출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예정된 결말의 방식이 진행된다. <남매의 여름밤>(2019)의 소녀가 짝퉁 운동화로 인해 자신의 행동과 거짓말이 드러나게 될 때, 드러나는 수치심은 이 영화의 핵심이다. 소녀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의 행동은 할아버지의 집을 차지하고, 기생하는 파렴치함에 대한 쪽팔림이다. 하지만 자신 또한 아버지 이상의 윤리적 존재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전면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소녀가 겪는 윤리적 갈등의 결말이 할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아련함으로 빠르게 치환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들이 중요하다. 수치심을 느꼈던 유년기가 아련하게 다뤄진다는 것, 우리의 현실과 일정하게 거리를 둔다는 것은 이야기를 안전하게 이끌어내기 위한 전략이지만 인물들이 풍경에 갇히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유년기 혹은 소녀기를 다루는 많은 한국영화들이 노스텔지어의 화풍 속에 담기는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아이들의 풍경은 현재와 맞서지 않는다.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처럼 교실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남중생의 이야기는 상상하기 어렵고, 태풍 속에 강당에 모여 속옷만 입고 춤을 추는 장면은 자기 검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소마이 신지의 영화는 주요한 참고점이 된다.  

물론, 새로운 영화들이 던지는 발칙함은 끊임없이 시도된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2023)에서 유년기부터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소녀는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상황에 이르자 '막걸리'와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현실에 도전이지만 동시에 판타지 속으로 현실 도피하는 유아성을 띠기도 한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소녀)가 어떻게 문제와 대면하는가는 핵심적인 문제다. 유아성과 소녀성의 한국영화들은 전면적인 폭력을 거부하면서도, 세계와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돌파에서는 자주 주저한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상상적 아이, 상상적 소녀로서의 한계 짓기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소마이 신지'의 영화는 한국 영화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유년성을 향해 있다. 

 

마음을 따라가는 영화

<이사>의 주인공이자 소녀인 렌은 별거 상태에 돌입하여 이혼 서류에 도장을 받기를 원하는 어머니와 혼자 사는 것을 원하는 아버지를 재결합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아빠의 이사 트럭을 따라 달리는 장면은 영화 초반부터 소녀의 적극성을 대변하는 액션 이미지가 된다. 그럼에도 현실은 만만치 않다. 렌이 최종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과거에 가족들이 놀러갔던, 과거에는 여관이었지만 이제는 호텔로 바뀌어버린, 교토 북동쪽에 위치한 일본 최대의 담수호인 비와호(Lake Biwa)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서 재회한 가족에는 오히려 불화가 일어난다. 부모들은 이 여행이 자신들을 속인 렌의 계획이었음을 알게 되고, 부모의 반응에 실망한 렌은 밖으로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렌은 도중에 쓰러진다. 노부부의 도움으로 깨어난 렌은 호수 주변에서 펼쳐진 마쓰리(축제)를 경험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꽤 긴 시간 동안 마쓰리를 방황하는 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토록 길고 섬세하게 축제의 장면들을, 다큐멘터리처럼 사람들의 사실적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세심하게 담아낸다. 그렇게 축제의 밤이 지나고 바닷가에 선 렌은 배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모습과 마주한다. 눈앞에서 배를 끌고 오는 부모와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가족들이 과거 축제에 참여했던 모습을 재현하는 이 순간은 배와 함께 다시 바다로 향하며 사라지는 부모의 모습과 남겨진 과거의 자신과 대면하는 렌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환상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녹아 있다. 렌이 오고자 했던 축제의 시간은 과거 좋았던 가족의 시간을 떠나보내는 과정이었지만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대면시키며, 과거의 가족을 떠나보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배를 비롯하여 많은 것을 불태우며 떠나보내는 축제의 장면들은 고스란히 렌이 성장하기 위해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의 집합이다. 

이후 바닷가에서 엄마와 재회한 렌은 축하 인사를 보낸다. 엄마는 새해 인사를 하냐고 반문한다. 새로운 시간은 그렇게 시작되고, 렌은 더 이상 부모의 결합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축제의 경험을 통한 급작스러운 전환은 소마이 신지가 <이사>라는 영화에서 도달하고자 했던 비약이다. 영화의 제목은 이사보다는 이혼이, 혹은 이동(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moving'이다)이 더 잘 어울리는데, 이혼에 맞서 달리던 소녀가 어느새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는 순간으로 이동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사>는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1990년대식 일본 부모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직장에서 꽤 잘나가는 듯 보이는 엄마는 자주 담배를 피우고 있으며, 소심한 듯 보이는 아버지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눈빛을 드러낸다. 한국과 엇비슷하게 자식들에게 목을 매달고 있는 부모들의 모습이 비치지만, 1990년대 이후 개인화된 일본 부모 세대의 단면들이 비친다. 렌 또한 무남독녀의 핵가족 현실을 대변한다.

이러한 부모의 이미지는 2000년대 초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2004)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등장한다. 더 이상 엄마는 아이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아이들 스스로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아이들을 방치하여 사망하게 이르게 했던 '스가모 아동방치 사건'을 바탕에 삼고 있다. 그런데 고레에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아이들을 방치한 엄마를 나쁘게 그리지 않으려고 했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1988년은 버블경제의 호황을 시작한 시기였고, 일본 사회는 자본주의의 쾌락과 함께 개인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사>는 핵가족의 붕괴를 보여주는 작품이지만(렌의 친구들 또한 이혼 가정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동시에 개인성이 전면에 떠오르는 시대의 풍경으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격변의 시기를 통해 바라보게 되는 신인류의 탄생이라는 명제에 부합한다. 

렌은 가족이라는 전근대적인 형태에 대한 집착을 떠나보내며, 자신의 길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판타지를 통한 성장이다. 이제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인 렌은 거리로 나온다. 거리는 영화 세트 현장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 등장한 여러 인물들 ―가령 결혼을 결심한 젊은 커플,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 등― 이 등장하고 렌은 이들 사이를 누비며 카메라 앞쪽으로 전진한다. 그리고 잠깐 동안 사물에 가려 렌의 모습이 보이지 않다가 다시 등장한다. 이때 렌은 더 이상 어린 소녀인 과거의 렌이 아니다. 이 모든 관계 속에, 영화적 연출 속에 어느새 성장해 버린 모습으로 등장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급작스러운 전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비약적인 결론에 놀라움이 있다.

이러한 비약은 소마이 신지 영하의 장기이기도 하다. 마쓰리를 경험하는 장면들은 가족의 해체와 이혼이라는 문제를 뒤로 한 채 렌이라는 아이가 멈춰서 다른 시간인 축제를 관망하는 것으로 향해간다. 그것은 내면의 혼동이 멈추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부모의 이혼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달리고 움직이고 이동하던 소녀는 '비와호'의 호텔에 도착한 후 부모의 반응을 살핀 후 빠르게 이탈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녀의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축제의 광경들을 보며 비로소 '산책자'(플라뇌르)가 된다. 

산책자의 관망과 걸음걸이는 다른 인생의 호흡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질주하던 렌이 정지하는 본격적인 순간은 호텔에서 뛰쳐나와 달리던 중 골목에서 쓰러지게 되는 순간 일어난다. 앞서 설명했듯 렌은 노부부의 도움으로 다시금 깨어난다. 노부부는 자식이 좋아하던 음식을 건네주는데, 이 음식을 좋아하던 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렌의 말에 할아버지는 하늘에 있다고 가리킨다. 부모의 이혼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녀의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 '죽음'을 환기시키고 정지시킨다. 이 대목은 전통적인 일본의 가옥에서 자식을 떠난 보낸 노부부의 애잔함으로 채워져 있다. 렌은 밝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만 부모의 시간과 자식의 시간이 항상 공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부모의 이혼이라는 상처를 경험하는 렌도 있지만, 자식의 죽음을 겪는 가정도 있는 셈이다. 노부부의 집을 나온 렌은 비로소 다른 걸음으로 축제를 누빈다. 

렌의 방황은 더 이상 현재에만 충실한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을 동시적으로 생각하는(그것은 곧 다른 삶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습을 보여준다. 동시에 렌의 감정을 전환하는 한밤중과 새벽의 시간이 펼쳐진다. 그것은 렌의 감정적 질주를 축제의 빛과 열기로 이어주는 만남인 동시에 렌의 성장을 비약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죽음과 축제

소마이 신지의 영화에서 죽음은 자주 등장한다. 최소한 개봉된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죽음을 다룬다. 아이들의 이야기이고, 아이들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내용이 핵심이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추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삶의 가운데 드리워져 있다. 

<태풍클럽>의 주인공 미카미는 태풍이 오는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의 자살을 선택한다. 진지한 중학생 소년이라 할 수 있는 미카미는 영화 중반에 형에게 질문한다. "개는 종을 초월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대화는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죽음이란 종의 개에 대한 승리야." 

특별한 개(개인)은 종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종이 유지하려는 체계, 특히 생명과 죽음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니체의 '초인'이라는 개념도 기존의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이라는 종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의 등장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탄생이나 실존성에도 불구하고, 개는 종의 전제인 죽음을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종의 특성을 벗어날 수 없다. 

태풍의 밤이 지나고, 아이들이 모두 잠든 이른 새벽. 미카미는 창밖을 바라보며 태풍의 밤을 돌아 본다. "이제 깨달았어. 너희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라며 미카미는 죽음은 삶의 전제임을 받아들인다. 다만, "우리에겐 엄숙한 삶을 위한 엄숙한 죽음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생각하면서 이를 행동으로 옮긴다. 핵심적인 고민은 "종"의 문제다. 

미카미가 고민하는 종(種)은 인류 혹은 사회 혹은 일본 사회(내셔널리즘)를 가리키는 말이다. <태풍클럽>이 중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영화이고, 태풍이 오는 밤 동안 일탈의 시간과 사회적 질서로부터 분리되는 경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단순히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미카미의 자살 때문이다. 소년의 통찰에 따르면, 태풍은 아이들을 광란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종으로부터 벗어나는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부모와 선생님의 통제와 명령으로부터 일탈하는 시간을 경험한 것이다. 다만, 태풍이 끝난 오늘이 시작되면 아이들은 다시 종의 질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태풍이라는 외적 격변의 풍경 속의 기존 질서로부터 벗어나 일탈을 하는 것을 목격한 미카미의 선택은 그 연장선에서 '성인이 되는 길'을 거부하고, 차라리 거대한 에너지가 되어 사라지려는 저항적 선언을 떠올리게 한다. 존엄한 죽음을 겪을 때 비로소 존엄하게 살 수 있음을 직시한 미카미의 모습은 영화에서 꽤나 연극적으로 연출되어 있으면서도, <이사>의 마쓰리 장면처럼 비약적인 순간을 통해 아이의 마음을 표출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죽음이라는 문제를 보다 본격적으로 다루는 영화는 <여름정원>이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야마시타를 둘러쌓고, 친구 카와베와 키야마는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급기야 이들은 낡은 집에, 풀들이 마구 자라나 있는 정원에 사는 덴포 키하치라는 노인을 관찰하기로 한다. 문폐에 노인의 이름은 몇 글자가 지워져 있었고, 노인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을 지나서다. 그런데, 이 이름의 확인 과정을 통해 노인의 과거 사연이 드러난다. 노인은 태평양전쟁 기간 필리핀에 나간 일본 군인이었고, 태풍이 치던 날 밤 코스모스의 씨를 뿌려둔 것이 걱정된 아이들이 노인의 집으로 모여들자, 호기심 어린 질문에 자신의 전쟁경험담을 들려준다. 영화의 중반을 넘기는 때이다. 그 순간 이 영화의 죽음은 단순히 아이들의 호기심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역사적 문제, 일본 내셔널리즘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임이 드러난다. 노인은 도주하던 중 만난 일가족 중에 임산부를 살해했음을 고백한다.

<여름정원>은 십대인 아이들이 죽을 것 같은 노인과 친구가 되어 지내던 중 노인의 과거를 파고 들면서, 노인의 은폐된 삶의 실체를 드러내는 영화다. 그것은 잡풀을 거둬내기 전 노인의 정원에 있던 우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었지만, 정리를 하고 나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종의 상처이자 종의 질서다. 영화는 현재의 세대인 아이들을 통해 노인의 부인을 찾아나서는 장면을 보여주는가 하면, 아이들의 선생님이기도 손녀와 노인의 대면 장면 등을 후반부에 등장시킨다. 죽음에 대한 호기심은 곧바로 일본 사회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통찰이 되고, 일본 역사의 이면을 들추는 과정이 된다. <여름정원>은 궁극적으로 90년대를 살아가는 유년 세대들과 태평양 전쟁 시대의 전쟁 세대와의 만남을 통한 화해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영화다. 쉽사리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이들의 만남은 직접적으로 일본 사회를 가로지른다. <태풍클럽>에서 죽음이 개인적인 것에 대한 질문에서 촉발되었다면, <여름정원>의 죽음은 일본 사회, 즉 종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셈이다. 

죽음의 형태는 조금씩 다르다. <태풍클럽>처럼 사회화 되기를 거부하면서 개인의 존엄을 선택한 미카미의 '개인적' 자살이 있고, 부모의 이혼을 막기 위해 질주하던 렌이 노부부로 부터 듣게 되는 '가족의 죽음'이 있으며,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았던 아이들이, 일본 역사의 해소되지 않는 '전쟁의 살인'이라는 역사성이 있다. 

미카미의 질문처럼 이것은 종(사회)과 개(개인)의 투쟁을 둘러싼 여러가지 양태들이다. 소마이 신지 감독을 전공투 세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감독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의 생물학적 연대기는 대학 시절 전공투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나이다. 전공투 세대의 대부분은 1940년대 중후반으로 1960년대 중후반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이었다. 소마이 신지는 1948년 출생이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지라도,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새로운 사회를 요청했던 전공투 세대들이 던진 개인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여러 모색들이 녹아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개인과 사회의 갈등과 대립은 직접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통해, 아이들의 행동과 언어를 통해, 그리고 장르적 특징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다루져 왔다. 그 가운데 해방의 경험을 위해 태풍을 불러들인다. <태풍클럽>에는 태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교정과 가출을 선택한 후 도쿄에 간 리에가 있다. <여름정원>에는 태풍으로 인해 세 명의 소년들이 노인의 집에 모여드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곳에서 소년들은 노인의 가장 은밀하고, 핵심적인 전쟁의 경험을 듣게 된다. <이사>에는 마쓰리 장면으로 후반부가 빼곡히 채워져 있지만 초반부에는 친구와 길을 걷던 중 부모의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순간 멀쩡한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소마이 신지의 영화에서 태풍 혹은 쏟아지는 비는 질서를 무화시키는 시간이자 인물들의 탈출과 저항하는 마음을 대변하는 순간이다. 

이 비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섬나라인 만큼 날씨가 변화무쌍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비가 오는 장면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에 반해, 소마이 신지의 영화에서는 절정의 순간, 핵심의 순간, 인물의 혼란을 드러내는 순간 비가 쏟아진다. 어떤 것이 더 진짜 같은 현실인가이기보다는, 이러한 차이를 통해 소마이 신지는 자신의 환경에 놓인 자연물들을 아이들의 마음으로, 자연스러운 표출로 이끌어 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통제되고 절제된 오즈의 날씨보다 더 일본적인 감독은 소마이 신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처럼 날씨가 흥미롭게 보이는 또 하나의 일본 감독은 이마무라 쇼헤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따라 공간이 보여질 때, 자연도 이를 따라간다. 그 움직임이 소마이 신지 영화의 저항성과 현재성을 이룬다. 무엇보다 소마이 신지의 아이들은 행동이나 결단이 완전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들의 마음이 알 수 없는 마음의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고 했던, 그의 영화는 태풍, 비, 축제와 같은 자연적이고 문화적 조건 속에 담긴 전쟁, 이혼, 학교와 같은 사회적 요소들을 담아내고자 했다. 거대한 빗방울들과 인간의 질서의 대립이야말로 개(빗방울)와 종(학교, 전쟁, 결혼제도)의 또렷한 대립이다. 

그 가운데 물은 종의 질서와 제도를 초월한다. 노인의 죽음 이후 <여름정원>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물 속으로 나비를 비롯한 곤충들이 날아다니고, 말랐던 우물이 채워져 터지는 장면은 일본의 어두운 과거 역사가 새로운 아이들 세대와의 대화를 통해 해소되기를 갈망하는 비전이자 규격화된 우물의 형태가 해방되는 순간을 표출한다. 물론 관습과 제도는 그의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다. 치매에 걸린 노인의 부인이 장례식장에 뒤늦게 도착하여 "오셨습니까"를 외치는 장면은 뭉클할 수도 있지만 일본 사회를 의식하는 동시에 일본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보게되는 클리셰들이다. <이사>에도 "축하합니다", "사요나라" 등의 말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등장한다. 

그러나, 이 클리셰가 밉지만은 않다. 그것은 종의 사회가 어느 정도 상투성의 반복 속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끔찍한 사회는 클리셰조차 외면하는 현실이 아닐까. 소마이 신지의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은 아이들이 우물 속을 바라보며 노인을 향해 '사요나라'라고 하는 상투적인 인사를 던지며 이 말을 재발명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외침은 뻔하지 않다. 그것은 말의 질서에 맞서, 말을 사용하는 이들의 재발명이자 재인식이다. 

 

쉼 없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사>의 전반부는 렌의 재잘거림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과 투덜거림, 목적을 향해 있으면서도 목적이 없어보이는 움직임,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정지하는 순간들(<이사>의 렌, <태풍클럽>에서 새벽에 의자를 쌓아올리고 성찰하는 미키마의 모습) 등이 변증법적으로 말과 침묵 사이에서, 행동과 정지 사이에서 영화를 역동적으로 이끈다. 아이들이 멈추는 순간 세계는 달라진 것이고, 우리는 그 뒤에 다다를 죽음과 쓸쓸함의 인사를 지켜보기도 하지만 넘치는 에너지의 영화 속에서 숨 가쁘게 달려왔던 영화의 축제에서 생의 다른 가능성을 엿보기도 한다. <이사>가 귀여운 것은 영화 세트 현장과 같은 곳을 누비며 성장하는 렌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 마지막 이미지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태풍클럽>에서 도쿄에서 돌아온 리사의 귀환을 보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름정원>의 우물이 터지는 순간을 목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소마이 신지의 영화는 끝내 멈추지 않는다. 귀환을 하든, 폭발하며 사라지든, 성장을 하든, 자라는 생명은 반드시 이동한다. 죽음의 밤을 통과하면서, 때로는 그 안에 정지한 채 우리는 여전히 움직이는 호흡의 순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소마이 신지의 영화가, 우리의 현실, 우리의 영화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거울의 움직임이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