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맥도나]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부활하고
"미묘하고 아이러니한 연대를 향하여"
제80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마틴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쉬>(2022)가 각본상을 비롯한 작품상-뮤지컬 코미디, 남우주연상(콜린 퍼렐)이라는 쾌거를 거두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전작인<쓰리 빌보드>(2017)가 거머쥔 작품상(골든 글로브), 최우수 작품상(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베니스 국제 영화제)과 그전에도 그의 첫 장편 영화인 <킬러들의 도시>(2008)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로 지목된 것을 상기하면 그렇다.
일률적으로 '각본'이라는 공통분모가 마틴 맥도나의 영화를 이루는 가장 독특한 지점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그가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연극계에 잘 알려진 극작가이며 아일랜드 출신의 부모 밑에서 자란 영국 태생이라는 점이 주요하다.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보면 아일랜드는 계속해서 가톨릭과 개신교, 게일어와 영어 등 종교와 언어의 문화적 공방을 지속해왔다. 또한 켈트족 전통의 영향에서 차츰 영국의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민족주의 방식으로 변모하며 예술 담론을 이어왔다. 아일랜드의 역사적 배경에서 식민주의의 트라우마를 겪은 세대와 점차 이를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세대의 대조는 마틴 맥도나 영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가동되는 글로벌화와 유럽 문화의 진보와 변화로부터 마틴 맥도나의 정체성이 탄생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두 종류(아일랜드와 영국)의 감각이자 정서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작품성, 혹은 주체성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과 직접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맥도나 스스로도 자신이 아일랜드 공화국 출신이며 아일랜드가 작품의 기원이 되는 곳이긴 하지만 조국에 관하여 무엇인가 이야기해야 할 필요에 의해 쓰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각본은 민족성과 결합하지 않는다. 영국적인 영화, 그 집단성을 유지하기 위해 볼모로 삼은 엘리트, 신사와 같은 문화는 그의 영화와 거리가 멀다. 다시금 영국 영화의 부흥을 촉발했던 휴 허드슨의 <불의 전차>(1981)와 리처드 애튼버러의 <간디>(1982) 같은 작품들의 흥행은 그의 어린 시절을 함께했지만, 그는 이러한 대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 서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마틴 맥도나가 이민자 가정에서 빈곤한 삶을 살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5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전전하다가, 27세에 런던에서 4편의 연극을 올린다. (셰익스피어 이후 런던에서 동시에 4편의 연극을 상연한 최연소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갈증과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비록 그의 극작은 열악한 배경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정착하고 싶었던 매체는 영화였다. 그는 공공연히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 극작가가 아닌 '마틴 스콜세지'나 '타란티노' 같은 미국의 영화감독이라고 말한다. 특히, 폭력과 유머가 난무하는 타란티노 영화의 표면에는 오락이라는 목적성을 가동하기 위한 총성이 즐비하다. 어떠한 정치화도 거부하는 그의 이미지는 미국 갱, 노예 제도, 나치즘, 액션 스타라는 배경에서 조명되지만, 이것은 모두 교훈과 윤리라는 관습을 탈피한 충동성을 지닌 소품들이다. 그는 자신이 미국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하는데, 그중에서 최고로 꼽는 작품은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1994)이다.
그런데도 <식스 슈터>(2004)전에 <필로우맨>(2003)이라는 연극에서 마틴 맥도나의 작품이 정치적이라는 논란을 야기한 적이 있다. 전체주의 국가라는 배경 아래 조명된 이 작품은 자극적이며 엽기적인 소재로 유아 살해, 강간, 신체 절단, 고문 등을 사용한다. 문제의 요지는 이러한 소재가 특정 체계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오해였다. 이를 비껴갈 수 있었던 것은 전체주의와 독재에 대한 비판이 가능한 공간이 아닌 불확실한 장소를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민족 정체성의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가 자기 작품의 정치화를 명확하게 거부한다고 밝힌 바 있듯이 첫 번째 영화인 <식스 슈터>와 최근 영화인 <이니셰린의 밴쉬>까지 정치적인 요소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 타란티노의 작품으로 표현하자면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에서 등장하는 나치즘이 개혁과 반성의 정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마틴 맥도나의 영화에서 장소성은 이런 오해와 관계하지 않는다. 그가 관계하고자 하는 건 타란티노의 화용론을 경유한 폭력성 뒤에 은폐된 정서인데,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가 선택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그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죽음은 중립적이면서도 선과 악에 대한 이원론적 진술이 아닌 극단적으로 인물이 처한 실존을 밀어붙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특징이 있다. 부당한 죽음과 폭력은 개인과 집단에게 있어 '복수'나 '용서'라는 결단을 내리게끔 요청한다. 그런데 맥도나의 영화는 결단을 요청 받은 인간에 대한 온정을 버리지 않으려 한다. 죽음과 폭력, 그리고 우정을 대동한 그의 영화는 서사와 인물을 공유하며 부활을 거듭한다.
죽음, 그 너무나도 이질적인 : <식스 슈터>와 <킬러들의 도시>를 중심으로
마틴 맥도나의 작품의 근본적인 테제에는 '죽음'이 존재한다. 특히, 초기 그의 영화에서 돌연히 찾아오는 죽음은 긍정도 부정도 없는 무정한 이미지로 보인다. 죽음을 보며 허무하게 한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인물은 오락성과도 거리가 멀고, 도덕과 윤리를 요청하지도 않는다. 죽음은 살아남은 자가 가진 무정하고도 서늘한 시선에 있다. 그 무정의 시선을 획득하기 위해 맥도나는 이질적인 이미지를 끊임없이 분산한다. 이것은 타란티노와는 다르다. 죽음을 통해 연쇄되는 궤적을 개인의 실존과 밀착하는 형식, 이것은 결국 오락성과 코미디로 독해될 수 없는 그만의 서사 양식이다.
우린 맥도나의 영화에서 계속된 죽음을 응시하며 발생하는 작용들의 점선을 추적하게 된다. 먼저 죽음을 대표적으로 설명하는 첫 번째 영화 <식스 슈터>는 제목을 직역하면 6연발 권총이지만, 오직 한 시퀀스에만 총격 씬이 등장한다. 6이라는 숫자에는 6명의 죽음이 존재한다. 도넬리(브렌단 글리슨)의 아내, 돌연사 한 두 유아, 아이의 죽음에 슬픔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 미치광이 청년, 그리고 청년이 살해한 그의 어머니까지 모두 6명이다. 도넬리는 아내의 죽음, 두 유아의 돌연사, 아들이 어머니의 머리를 쏜 사건을 말하며 바쁘다고 자리를 뜨려는 의사와 마주한다.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또 다른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이 영화에서 죽음은 계속 연쇄된다. 어머니의 머리를 쏜 미치광이 청년과 아이가 돌연사 한 사연을 가진 부모를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는 장면들은 이런 연쇄를 확증한다.
여기서 급사한 아이의 엄마 옆에 가서 죽음을 조롱하다가 “내가 실수했나? 조금은 사실인 것 같다”는 대사를 읊조리는 미치광이 청년의 음성은 마틴 맥도나의 영화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고약한 서사 작동의 방식이다. 찢긴 아이의 사진을 보며 자살을 선택한 여성에게 아무런 연민의 감정도 보이지 않는 청년의 모습 역시 맥도나 영화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죽음을 조각한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등장인물이 나와 폭력적인 행위를 허용하는 것, 영화의 내러티브는 이러한 심원함에 대한 반응을 관객에게 유도한다. “죽은 와이프 일은 유감이야”라며 마지막 인사를 하는 청년의 진심은 이 영화를 참으로 모호하게 바라보게 한다.
청년과 부부가 분명 상반된 사연일지언정 죽음의 정의를 계속해서 차갑게 되묻는 영화는 애도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시선으로 변용된다. 수배 중이던 청년이 결국 경찰과 대립하며 죽음을 맞이할 때 도넬리는 그의 품에서 총을 가져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죽음의 연대를 확립하기 위해 가져온 권총으로 자살할 계획을 세운다(머리를 향한 총구는 청년이 행했던 살인의 행위를 복사한 것으로 보인다). 남은 두 개의 총알로 먼저 반려동물인 토끼 데이빗의 머리를 쏘고, 자신을 향해 쏘려는 찰나 오발이 나오고 만다. 영화는 살아남은 도넬리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살아남은 자에게 하사된 말은 어떠한 의미도 없이 허무하게 자리한다. 이때의 이미지는 코믹하지만은 않다. 죽고자 했던 그가 살아날 수 있는 건 죽음의 세계관 속에 심어 둔 유머, 곧 그 안에서 산 자의 목소리만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첫 번째 장편 <킬러들의 도시>의 경우를 보자. 필연적인 죽음이 도래할 수밖에 없는 무정한 킬러의 이야기. 의뢰를 받고 살인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하지만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킬러라는 정체성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이 영화가 설계하고 있는 것은 '킬러라는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여기서 맥도나가 전략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것은 각기 다른 이미지와 음향의 이질적인 분배에서 착안한 서늘한 실존의 이미지이다. 배경, 연기, 대사가 하나의 톤으로 조합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기표는 대부분 허탈함 속에서 발생하는 것들이다. 영화에서 콜린 퍼렐이 연기하는 후배 레이는 과장된 연기를 하고, 반대로 <식스 슈터>에 이어 다시금 맥도나의 페르소나로 출연해 선배 켄을 연기한 브렌단 글리슨은 정반대의 톤을 구사한다. 임무 수행을 '여행'이라고 말하는 감정적인 켄과는 달리 레이는 여성과의 만남을 통해 욕망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벨기에의 아름다운 도시 브뤼헤(원작의 제목이기도 하다)라는 도시의 야경과 경치를 감상하는 초반의 장면은 쓸쓸한 정서를 내포하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위기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니셰린의 밴쉬>까지 계속해서 음악을 맡아 온 카터 버웰이 본격적으로 작업을 개시한 이 영화에서 진중하게 들리는 사운드트랙과 레이의 톤은 이질적인 구조를 제시함으로서 맥도나 특유의 유머가 부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죽음이 돌연 자신을 향해 연쇄 작용을 일으킨다. 임무 수행 중에 레이는 실수로 아이를 살해하는데, 이 장면은 어떤 표식처럼 그를 추적한다. 레이는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켄으로부터 저지당한다. 이것이 켄이 레이를 죽이려고 할 때 일어난 반사적인 행위일지언정 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식스슈터>에서 죽지 못했던 도넬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손 씻고 착하게 살아. 다른 아이를 살려”라는 켄의 말은 이 영화가 얼마나 죽음을 아이러니하게 설명하고자 하는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황금률에 의거한 이 죽음의 율법은 결국 다시금 폭력을 소환해 낸다. 레이를 뒤쫓는 킬러 해리(레이프 파인스)는 레이와 같이 총을 쏘다 실수로 난쟁이 지미(조던프렌티스)를 죽이고 만다. 그 역시 응보를 치르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지만, 해리에게 총을 맞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레이는 산 자의 이름으로 이렇게 토로한다. “난 죽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자살을 결심했던 것과 달리 모순적으로 마지막에 자신을 애도한다. 맥도나의 영화에서 죽음의 무게를 측량하는 저울은 이런 인과응보의 세계관 속에서 끊임없이 연계된다. 누군가의 죽음이 자기 죽음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그 연장성과 유기적인 관계성을 관객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맥도나의 영화에서 죽음과 복수의 서사는 캐릭터, 장소의 이질적인 이미지를 조합함으로서 킬러 영화의 클리셰를 수정한다.
폭력성 뒤에 무엇이 남는가 : <세븐 사이코패스>를 중심으로
마틴 맥도나의 영화 중 유독 폭력이 난발 되는 영화가 있다면, 바로 <세븐 사이코패스>다. 초반에 이 영화가 어떤 형식을 가지고 구현될지 예고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마티(콜린 퍼렐)와 빌리(샘 록웰)이 극장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그 남자 흉폭하다>(1989)를 보는 장면이다. 일본의 야쿠자 문화가 가진 마초적 공격성을 또 다른 풍광으로 경유한 이 영화가 등장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폭력성을 무엇보다 미학적인 방식으로 잘 간직하고 계승하고 있는 작가인 기타노 다케시와의 결합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돌아가 <식스 슈터>에 총으로 자결을 시도하는 마지막 장면과 묘한 결합을 이루는 <소나티네>(2000)를 떠올려보자. 영화에서 수도 없이 일어나는 많은 죽음, 상실과 망각, 그리고 그사이를 비집고 기이하게 보이는 해변가에서의 놀이 시퀀스는 죽음을 염세적으로 채색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이와는 다르게 맥도나는 영화 전체의 리듬을 해학적으로 묘사하려 한다. 극작가인 마티는 빌리에게 자신의 시나리오 <세븐 사이코패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난 더 이상 총질해대는 놈들 영화는 싫다고. 나는 사랑과 평화에 대한 걸 원해. 폭력을 믿지 않지.” 이 대목은 어불성설처럼 느껴진다. 이 대사에 설득력이 없는 이유는 <세븐 사이코패스>는 맥도나의 작품 중 가장 잔인한 묘사와 총질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팔과 목을 톱으로 자르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손등의 정중앙에 칼을 꽂고, 온몸에 기름을 부어 불로 태우고, 머리를 총으로 박살을 내는 등의 신체 묘사는 분명 시나리오 작가로 등장했던 <필로우맨>과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븐 사이코패스>는 그의 영화에서 가장 발랄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가 구성하고자 하는 극단적 이미지와 그 이질성에 부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우린 이 제목에서 마틴 맥도나의 영화에 등장하는 공통된 인물상을 찾아보게 되는데, 그의 모든 영화에선 공감 능력과 도덕의식이 결여된 인물인 사이코패스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죽고, 죽이고, 죽는 이 폭력의 연장선에서 맥도나가 현상하고 싶은 이미지는 탐미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단 폭력성으로부터 이어지는 연대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이다. 야쿠자가 아닌 너무나도 미국적인 범죄 집단인 마피아라는 집단이란 소재로 말이다.
방금 언급했듯이 <세븐 사이코패스>에서 서사를 구현하는 방식은 <필로우 맨>과 비슷하다. <필로우 맨>의 폭력성의 예시들이 실제로 사건화되어 나열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각본가 맥도나 자신의 메타-이미지처럼 보이는 이 양상은 시나리오 작가로 등장하는 마티의 각본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여기서 사이코패스를 다루는 이야기가 재현되고 현실의 이야기가 교차 편집을 이룰 때 그 이야기를 안내하는 주체는 마피아의 두목인 찰리(우디 헤럴슨)다. 그의 폭력이 모종의 당위를 부여할 수 있는 매개가 되는 건 그가 키우는 강아지로부터이다. 찰리는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여 빌리와 함께 개를 납치하여 판매하는 사업을 벌이는 한스(크리스토퍼 워컨)의 아내에게 강아지의 소식을 묻는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죽이기까지 하는 잔혹함을 보인다. 복수극을 가정한다면 이는 그에겐 합당한 일이다. 빌리와 한스를 찾은 찰리는 결과적으로 복수에 성공한다. 이때 찰리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빌리는 자신이 인질로 붙잡고 있던 강아지를 향해 손바닥을 뻗고, 강아지는 이에 화답하듯 손을 올린다. 7명의 사이코패스 중 하나였던 빌리는 각본을 수행하는 수행자로서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그 연대의 가능성을 쉽사리 망각하지 않는다.
특히, 동물은 맥도나의 영화를 위장시키는 매개가 되는데, <식스슈터>에서의 소와 토끼, <쓰리 빌보드>에서의 말, <이니셰린의 밴쉬>의 강아지와 당나귀 등은 모두 인간의 죽음과 가까이하고 있다. 맥도나 영화에서 동물은 이러한 폭력성에 계속 노출된 무력한 존재이지만 연대 환원하기 쉬운 편의성을 제공한다. 전체적으로 거창한 복수극으로 보기엔 초라했던 <세븐 사이코패스>의 폭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이코패스의 공감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복수극이자 동물을 순수하게 사랑했던 한 남자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로 치환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성은 그가 가진 가장 순결한 사랑의 은유와 동기를 제공함으로 연대의 가능성을 증폭시킨다.
복수를 수정하는 우정 : <쓰리 빌보드>와 <이니셰린의 밴쉬>를 중심으로
맥도나의 이름을 가장 크게 알렸던 <쓰리 빌보드>의 성공은 그가 개인에서 타인으로 향하는 변칙적 사례의 출발점이다. 미주리 주에 위치한 에빙이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브뤼헤에 이어 다시금 특정한 장소를 소환하는 영화다. 첫 번째 장편인 <킬러들의 도시>의 영어 제목이 도시 이름인 <In Bruges>인 것처럼,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지역 이름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이다. 이것은 한편으론 연극적인 서술이기도 한데, 관객들이 마을이라는 비좁은 공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어디서든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 나아가 맥도나의 영화가 서로 밀착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다름 아닌 배우의 반복적인 기용 때문이다. 콜린 퍼렐과 브렌단 글리슨이 최근 <이니셰린의 밴쉬>에서도 호흡을 맞췄듯이 맥도나의 영화에서 연기자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 메시지의 변화를 즉각적으로 유도한다. 이 두 영화에서 우정의 윤리는 타자를 프레임 속에 담기 위해 위치한다. 여기서 중첩되는 인물이 있다. 전작 <세븐 사이코패스>의 문제 인물이었던 빌리는 <쓰리 빌보드>에서도 소동을 일으키는 경찰관 제이슨 딕슨 역할을 맡아 유사한 톤을 연기하고, 마피아 보스 역할을 맡았던 찰리는 이 영화에선 모범적인 경찰을 연기한다. 영화는 주인공 밀드레드 헤이스(프란시스 맥도맨드)가 딸 앤젤라 헤이스(캐서린 뉴튼)를 강간치사로 잃게 된 후의 삶을 다룬다. 이 영화에서도 맥도나 영화가 축적했던 언표인 '복수'는 동일한 코드로 도입된다. 밀드레드는 지지부진한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세 개의 광고판에 신망이 두터운 경찰서장 윌로비(우디 해럴슨)를 비판하는 문구를 새김으로 마을 사람들의 표적이 된다.
점차 외부(Outside)에서 내부(Inside)로 확장되는 이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윌로비의 자살은 밀드레드에 대한 의심에 강도를 높이는 계기가 된다(흥미로운 점은 <세븐 사이코패스>에서 빌리의 머리에 총을 쏜 찰리가 이번엔 자기 머리에 총을 쏜다는 것이다). 특히, 그에게 충성을 다했던 경찰관 딕슨은 밀드레드를 향한 분노를 광고판의 주인인 레드 웰비(케일럽 랜드리 존스)에게 쏟아낸다. 그 후 세 광고판이 불에 타고, 딕슨을 의심하는 밀드레드가 경찰서에 불을 내는 복수로 이어지는 확장은 맥도나의 도덕률에 부합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쓰리 빌보드>에서는 그 규칙에 머물지 않는다. 딕슨은 밀드레드에 대한 연민을 버리지 않고, 앤젤라를 살해한 범인으로 추측되는 이의 DNA를 추출한다. 그리고 자동차 번호와 지역을 알고 있던 딕슨과 함께 범인에게 향하는 길에서 밀드레드는 경찰서를 전소시키려 했던 범인이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그때 딕슨은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럼 누구겠어요'라고 응답한다. 그리고 곧이어 밀드레드가 (범인을 죽이러 가는 것이) 정말 괜찮겠냐는 물음에 딕슨은 사실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때 다시금 동일한 대답을 하는 밀드레드의 모습에서 복수가 차단되고 연대가 공명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서로를 마주할 때 희미한 미소와 얼굴에 반사되는 빛의 파장은 무정함에서 벗어난 맥도나의 새로운 개척지를 예감하게 한다. <쓰리 빌보드>가 유난히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도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숭고하기까지 한 이 마지막 시퀀스에 집약되어 있다.
<이니셰린의 밴쉬>는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눠온 패드릭(콜린 퍼렐)과 콤(브렌단 글리슨)이 <킬러들의 도시>이후 다시 함께 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우정을 파기하며 서사를 촉발하기에 적합한 이 둘의 이미지를 극단으로 몰아가기 위해 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절교를 패드릭에게 시행한다. 두 사람 사이에 회복의 가능성을 억제하기 위해 심어둔 장치는 신체의 절단이라는 자극적인 방식이다. 말을 걸 때마다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콤의 협박은 이 자그마한 섬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유발될 수밖에 없다. 왜 이전처럼 다정하지 않으냐는 패드릭의 말에 콤은 그것보다 음악, 그림, 시가 남는다며 그와의 관계를 차츰 도려내고자 한다. 그렇게(말을 걸지 말라는) 규칙을 어긴 패드릭에게 콤은 손가락을 잘라 그의 집 앞에 투척한다. 비참하게도 패드릭은 자신이 각별하게 여기던 당나귀 제니가 손가락을 삼키려다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여기서 복수의 시작과 끝은 콤이 키우는 개로 전염되지 않고, 콤의 주변부인 집을 향한다. 그 집은 아일랜드를 형상화하는 또 다른 섬으로 그려진다. 마치 <쓰리 빌보드>에서 광고판과 경찰서를 태우는 행위가 그 지역과 영화의 주체가 되는 장소를 소각하듯이 이번에도 불꽃은 콤의 집을 점거한다. 불타는 집에서 살아서 나온 콤의 모습은 죽음을 죽음으로 응수했던 맥도나의 초기 영화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전쟁의 총포 소리 후면에 위치한 아일랜드섬 밖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은 우정의 윤리가 깃든 장소를 침범하지 못한다. 이제는 총성이 들리지 않는 그 시공간에서 두 사람은 화해를 시도한다. 내 개를 돌봐줘서 고맙다는 콤의 말에 언제든 말하라는 패드릭의 말에서 연대를 회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영화에서 일률적으로 등장하는 복수는 대표적인 주제다. 하지만 필모그래피 중 최근작인 <쓰리 빌보드>와 <이니셰린의 밴쉬>에선 염세적이자 실존적인 죽음은 희미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남은 복수를 완료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투 숏은 <쓰리 빌보드>와 같이 진행형으로 마감된다. '가는 길에 결정하는 것'(<쓰리 빌보드>)과 '언제든'(<이니셰린의 밴쉬>)이라는 대사는 복수의 대상에 대한 위협을 거둘 뿐만 아니라 이를 수정하기까지 한다. 죽음을 죽음으로서 처리하던 그의 영화는 가감하고 분명하게 이 엉겁의 끈을 끊어낸다.
무엇보다 <이니셰린의 밴쉬>가 아일랜드에서 촬영되었고, 아일랜드 이민자 집안을 배경으로 삼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맥도나 감독은 다시금 아일랜드로 돌아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던 황금률을 고사하고, 우정을 상실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그것은 패드릭이 소리쳤던 다정함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일랜드 내전의 공포와 전쟁에 관한 은유가 둘의 관계를 시발점으로 기획된 것이라면 우정이란 낱말은 이 영화를 상징하는 데 결코 부족함이 없는 단어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전에 관측할 수 없었던 애도를 목격하기도 한다. 아버지에게 구타와 성폭행을 당하는 청년 도미닉(배리 키오건)은 패드릭의 여동생 시오반(케리 콘던)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거절당한다. 그 거절은 그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는 말로 몰아친다. 그녀의 말에 도미닉이 자살을 택하고 아버지는 그 모습을 황망하게 응시한다. 이것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애도의 방식이다. 애도의 변화, 이는 맥도나의 주제 의식의 갱신을 어렴풋이 관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전의 영화들이 '홀로' 남아 있었다면 <쓰리 빌보드>와 <이니셰린의 밴쉬>는 2인 구도의 투 숏이 두드러진다. 마치 <킬러들의 도시>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켄과 레이가 부활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이렇게 극적으로 복권되는 인물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정해야 해, 착하게 살아야 해'라는 말을 속삭이는 것 같다.
맥도나의 영화에서 죽음, 폭력, 우정을 통해 인간의 유형을 목격한다. 인과 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우발적인 사건의 유형은 배우들에게도 연기를 상상하는 동력이 된다. 한 예로 <이니셰린의 밴쉬>에서 맥도나에게 브렌단 글리슨이 왜 콤이 패트릭에게 절교하자는 건지 설명해줄 수 있느냐는 말에 '닥치고 연기나 하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미묘함을 계속해서 시도한다. 남녀의 애정이 제시되지 않는 그의 영화의 독창성은 에로스적 사랑이 아닌 플라토닉한 남성들의 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욱 미묘하다.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와 딕슨의 관계도 에로스로 보기는 힘들다). 남성의 우정을 단순히 버디무비로 치장하지 않는 맥도나의 작품은 기존의 영화 형식과 서사를 수정하려는 의도에서 아이러니를 추출한다. 등장인물의 역동성, 점차 다른 톤을 마찰시켜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는 이 모든 장치는 아이러니한 연대를 향해 <이니셰린의 밴쉬>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캐릭터를 죽게 만들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수상한 창작자 마틴 맥도나는 이번에도 실험을 감행하고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시끄러운 미국을 떠나 조용한 아일랜드섬으로 귀환한 것을 많은 비평가가 환영한 이유는 그의 작품에 틈입하고 있었던 '타란티노처럼 멋있어야 한다'라는 강박을 벗었기 때문이다. 타란티노를 강력하게 지지하던 그가 타란티노를 벗어난 것이 아이러니처럼 보이는 것도 그 이유다. 그러나 이런 아이러니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죽음과 폭력을 통과하여 우정을 발견한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