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빈의 영화의 파편으로부터] 텅 빈 포화

<셰임>과 <녹터널 애니멀스>를 중심으로 본 '벌거벗은 신체 이미지'에 관해서

2025-04-02     변해빈

인간의 맨몸(naked)을 볼 때 우리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의복을 갖춰 입는 문화권 아래 일상의 낯선 이미지인 맨몸 이미지와 마주한 인간은 제각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부자연스럽게 변한다.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의식하며 보게 된다. 타인의 맨몸이 보이는 쪽이든, 타인에 의해 자신의 맨몸이 보여지는 쪽이든 응시에 대한 자각은 이전과 다른 행동 반응을 촉발시킨다. 보는 이는 당혹감 내지는 (예술의 차원에서 누드(nude)에 관한) '의미'에의 심오함을 느끼곤 한다. 이미지의 외설적인 측면 앞에서 겉의 의식적인 판단과 속의 무의식적인 본능이 요동치는 이중적 경험을 하게도 된다.

 

톰 포드의 <녹터널 애니멀스>(2016)의 오프닝에는 벌거벗은 네 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화려한 컨페티에 둘러싸여 환호성을 터트린다. 불특정한 패턴의 유혹적인 춤사위를 선보이는 중이다. 이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한 춤인가. 좀처럼 알 수 없는 가운데 영화는 여인들의 나체를 클로즈업하고, 고속 촬영해 상세한 관찰을 유도한다. 역동성을 기만하는 슬로우모션의 지체된 속도 아래서 늘어진 피부, 흉터, 우둘투둘한 피부 표면, 음모와 성기가 연속적으로 클로즈업된다. 풍만한 몸체의 이들을 두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떠올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선뜻 아름다움을 읽어내기 쉽지 않고, 외려 불안한 구석이 있다. 이들이 자신의 몸을 흔드는 것 외에는 별다른 행위를 벌이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난잡한 느낌이 들고 방어적으로 보게 된다.

그 근원이 단지 누드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어진 장면에서 네 여인은 어느 미술관에 전시된 예술 작품의 일부임이 밝혀진다. 이 순간 우리는 이것을 어떤 식으로 (재)인식하게 될까. 무언가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는 점을 유심히 고심할 필요가 있다. 영화가 실재의 조작을 통해 특정 대상을 응시하는 조건을 포화시켰으나 우리는 무엇도 제대로 보지 않은 것일 수 있다. 혹은 무언가를 제대로 못 봤을 수 있다.

이를테면 벌거벗은 이미지의 자극에 밀려 네 여인이 우리에게 보내는 의중 모를 시선이, 그것도 무척 노골적으로 거기 존재했다는 사실. 무엇보다 앞서 보았던 여인들의 생생한 춤사위가 전시장 미디어 디스플레이 속에 전시된 무기적인 이미지임을 깨닫는 동시에, 전시 공간에 벌거벗은 채 드러누운 형상을 한 네 개의 몸이 조각상마냥 육중한 덩어리로서 등장할 때, 우리는 무엇을 더 실재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에 휩싸인다. 이 조각은 부피와 무게를 지닐 뿐 아니라 맨살에 싸여져 있으나 이때 느껴지는 감각은 실존하는 것이 주는 생동성이 아니라 죽음의 기운으로 이뤄져 있다. 그렇게 상이한 두 이미지가 나란히 배치된 광경을 보고 있으면, 네 개의 조각상들은 마치 감상자들의 응시 아래 죽은 이미지로 남을 운명에 대해 암시하는 것 같다.

 

자신의 누드를 피사체로 삼아 초상 작업을 이어온 사진가 '프란체스카 우드먼'은 일찍이 그 경계와 이에 영향을 주는 응시의 작용을 염두에 둔 이다. 우드먼의 작업물에는 전형성을 이탈한 격정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이 탄생하는 데 영향을 주는 시선의 문제만큼은 엄격했던 것 같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과의 상호작용에 집중하기 위해 인적 드문 폐가 따위를 전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촬영자의 시선조차 제약의 일부로 여겼던 그는 대부분의 작업물을 셀프 촬영을 통해 완성했다. 관습적인 사진 양식을 벗어나는 틈에서 본연의 무언가 나타난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 사진 예술에서 필연적이기도 한 인간의 몸 혹은 몸의 움직임이, 과연 (그 자신이기도 한 바로 그) 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선에 대한 '의식'을 가능한 최소화하는 것임을, 피사체로서의 자기 몸으로 체감했을 것이다.

더욱이 우드먼은 몸을 의도적으로 가파르게 움직여 잔상을 일으킨다. 그는 포즈의 전형성을 벗어나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고, 그렇게 확보된 잔상으로 하여금 시지각적 매체의 가림과 드러냄, 현존과 부재의 경계가 지닌 교묘하고도 내밀한 지점을 조준했다. 그렇기 때문인지 거울이나 창문을 경유하고 벽면 앞에 촬영되기를 기다리는 인물을 담은 '전시' 상태에서 외려 그 전시된 표면은 막연하고 때로 비어 보인다.

다시 <녹터널 애니멀스>로 돌아가서, 주인공 수잔(에이미 아담스)은 네 여인 작품에 인색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에 관심이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도심의 블루, 육중한 고철들, 덧없는 사물, 이를 보여주는 잦은 컷 전환, 그 전환 끝에 도달한 곳은 수잔의 공허한 눈. 그 눈은 인물의 과시된 부의 상징인 금속 출입문에 반사된 광선에 찌푸려진다. 미술관의 모두가 무언가를 '감상'하는 행위로 과열될 때 그녀의 클로즈업된 눈에는 무엇도 비치지 않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허는 물질에 대한 과욕으로 이어지는바, 수잔의 차림새는 화려함을 넘어 산만하다. 그녀와 주변 인물들의 치장은 거기 먼저 눈길을 가게 만들고, 서로를 바라보려 애쓸수록 시선은 경로를 이탈한다. 무엇보다 그것들은 수잔이 인간적인 존재처럼 보이려 애를 쓸수록 위선과 허영이 깃든 존재로 묘사하는 데 일조한다.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를 숨기려 할수록 숨기려 한다는 것 자체를 공고히 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공허는 수잔의 심연이 아니라 그녀가 입은 것 중 가장 화려한 껍데기를 가리킨다.

 

수잔이 표면 너머로 유입하지 못하는 또 다른 것은 전남편 에드워드가 쓴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이다. 수잔은 에드워드로부터 갱단에 의해 아내와 딸을 동시에 잃은 남자에 관한 소설을 받는다. 영화는 현재이자 실재계, 소설의 상상계, 이에 더해 인물들의 과거를 담은 시퀀스를 정신 없이 교차시킨다. 남자가 주어진 상황에 몸부림칠수록 수잔은 서서히 몰입되는데, 추측하건대 그녀가 그럴 수 있는 데에는 큰 오류가 동반되는 것 같다. 소설 시퀀스와 과거 시퀀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소설 속 남자와 과거의 에드워드 얼굴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얼마간 소설 속 남자가 에드워드의 심정을 대변하거나 이를 각색한 것이라 여기게 될 것이다. 에드워드는 아내 수잔에게 버림받았으며 그들 사이 아이를 떠나보낸 적 있으므로 더욱이 그렇게 보인다. 그러니까 수잔은 이 이야기가 에드워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는 틀렸다. 남자에 대입해야 하는 건 수잔이다. 에드워드의 소설이 조준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상실감이 아니다. 위장 수사 도중 갱단이 사망하자 좌절하는 이 남자의 본심은 더 무자비한 되갚음이 불발돼서도,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지 못했단 사실에 있지 않다. 이야기 속 남자는 숨는 존재다. 그는 형사에 비해 소극적일 뿐 아니라 그 갱단들의 눈에 자신이 어떤 존재로 비칠 것인지를 더 의식한다. 그는 위협을 피해 숨는 존재가 아닌 인간의 존엄, 자비, 이성과 같은 공허한 수사와 이념에 숨는다. 그 대가는 타인을 상실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를 이루는 근원적인 요소의 상실이다. 긴 사투 끝에 갱단을 죽인 남자에게 남은 것은 원인 미상에 빠진 그 자신의 죽음(자기 존재 내부로의 미궁)뿐이다.

그리고 <녹터널 애니멀스>는 수잔이 바로 이 '이야기', 정확히는 미궁에 빠진 이야기의 구조적인 매료 아래 숨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이야기'의 매료 아래 숨고 그걸 입으려 한다. 그 매료 됨이란, 감각적인 고양, 도취, 각성, 결정적인 순간(kairos)에 대한 흥분, 살아있다는 느낌의 포화 등으로 표현되는 예술의 숭고미이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이야기가 전한 비극은 한순간 들끓는 데 집중된 전율의 예술일까?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는 '이야기'의 비극성, 그러니까 자멸과 자기 전복에 대한 연금술적인 해석으로 승화하는 비극(tragedy), 이 비극으로의 승화를 가능케 하는 수사와 이념 밑에 숨으려는 수잔을 위한('FOR SUJAN') 이야기다. 일순간의 실수로 아내와 딸이 갱단에게 강간 살해되는 동안 남자는 두려움으로 숨었다는 내용 자체로도 이 소설은 잔인하지만, 이 잔인함은 단적인 사건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에드워드가 소설을 수잔에게 보낸 까닭은, 허구의 우회로를 거쳐서 맨정신으로 마주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하고 겪으며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경험 안의 존재인 인간에 있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 실재이면서 현실은 자기 내부 곧, 진짜 자신으로의 발가 벗겨짐을 감당하는 일을 회피할 수 없단 것이다. 진짜 자신을 인정해야만 하는 비참함으로의 노출. 수잔은 숭고미가 아닌 그런 비참함을 느껴야 했다. 그러므로 에드워드와의 재회를 앞두고 수잔이 얼굴의 치장을 덜어내는 엔딩 장면은 변화가 아닌 기만적인 태도로 완성된다. 수잔이 앞서 말한 이야기의 의도를 간파했다면 두 인물의 재회가 예상되는 장면을 메우는 것은 기대감의 고양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 중독자인 브랜든이 주인공인 <셰임>(스티브 맥퀸, 2011)에서도 그가 벌거벗은 채 공간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오프닝으로 구성된다. 극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인물의 신체는 그렇게 무방비하게 등장한다. 브랜든의 성기는 추상적인 표현 혹은 은유를 거치치 않고 성기 자체로 담긴다. 그 성기는 팔다리 따위와 동일한 신체 일부로 인식될 수 없다는 데서 그 적나라함과 대비되는 폐쇄, 고독, 소외의 정서를 전한다. 성기 이미지를 다른 신체 이미지를 대하듯 무감하게 인식하게 된다는, 그것은 오히려 영화의 실패다.

'맨-' 상태의 신체 이미지를 대하는 관객의 인식과 반응을 넘어 이러한 오프닝이 궁극적으로 건들려는 것은 우리와 어긋나는 인물들의 태도다. 브랜든과 그의 여동생 씨씨는 그들 자신의 나체가 상대에게 노출되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가리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다. <셰임>에는 탈의의 과정, 탈의한 신체, 그 신체와 신체의 접촉이 반복적으로 길게 담기지만, 그동안 인물들은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혹은 냉소적이고 무감한 면이 있다. 이미지에 대한 냉소와 무감함은 그것을 많이 보고 자주 볼 때 생겨난다. 브랜든이 견디지 못하는 이미지, 곧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타인의 얼굴이다. 그는 다른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보지 못한다. 그는 타인을 향한 일방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곁눈질이 용인되는 구도로 자세를 취한다.

 

<셰임>에서 더 자극적인 이미지는 나체가 아니라 얼굴이다. 씨씨의 노래가 지속되는 4분 동안 그녀의 얼굴은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브랜든의 시점 쇼트). 브랜든은 실제 거리를 왜곡해 그 얼굴을 눈앞에 포화된 이미지로 인식한다. 씨씨의 얼굴은 인파 앞에 위치하지만 이때의 시점 쇼트는 사적이고 가까운 대상을 다루는 태도를 취한다. 이는 단지 인물의 얼굴이지만, 또한 그것은 단지 얼굴이기보단 더 이상 가릴 수도 없고, 벗겨질 표면도 없는 무언가이다. <녹터널 애니멀스>의 수잔의 맨얼굴이 드러나는 건 그 기대가 불발되었을 때다. 에드워드와의 재회는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자 드러난 수잔의 얼굴은, 어쩌면 그녀가 이때껏 마주한 적 없는 또 다른 자신으로 발가벗겨진 순간일 것이다. 이때 영화는 다시금 수잔의 공허한 눈을 클로즈업한다. 이 눈이 지닌 조형적인 형태와 물질적 상태가 인상적이다. 죽은 이의 눈 같다. 가장 혼탁하지만 가장 투명하다. 눈동자의 예민하고 연약한 성질이나 어떤 것으로도 치장 안 되는 무방비함 때문에 그것은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지만, 무언가를 직설하지 않아도 알려준다.

한편에서 말의 부재를 극복한다는 점 때문에 얼굴은 난해하다. 그래서 얼굴을 바라보고, 얼굴이 보여진다는 것은 적나라한 면이 있다.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고, 암시적인 정황이 없어도 그것 자체로 무언가를 존재하게 함으로써 내면을 매개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비어있지만 비어있다는 사실이 자극의 요소로 포화되어 있고, 이 포화는 신체의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자극 이외에 무언가 더 없는 실존의 빈약함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동시에 얼굴은, 오로지 쾌락에 집중된 브랜든의 성행위와 달리, 마주한다는 것만으로 모종의 반응을 요청한다. 반응 없음조차 반응이며, 반응의 주체에겐 없음에 대한 공허가 뒤따라 주어지는 일이다. '반응'이 주고받기의 시간적인 간격을 극복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 때 <셰임>의 시간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시간 때움이다. 브랜든이 콜걸에게 요청한 것은 '천천히(slowly)'였다. 인위적으로 늘린 이 속력은 시간의 물리적인 부피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육체적 닿음이 진정한 교감으로 이르기 위해선 기다림이 수반된다는, 레비나스 혹은 낭시의 사유는 포함되지 않는다.

 

신체는 기본적으로 양립 불가한 개념이 공존하는 장소이며 관계의 매개체이다.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면서 매개하는 기준. 일원적인 자아를 내외부로 구분하는 일차적인 척도. 이때 맨몸, 맨살, 맨얼굴의 이미지는 그 기준을 더욱이 복잡하고 음흉하게 흔든다. 다 드러나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실은 무엇도 알 수 없는 민무늬일 수도 있고 껍데기를 걷어낸 뒤의 내면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그것이 내면을 가리려는 껍데기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은밀함을 유지하면서도 해독을 기다린다. 무엇보다 그것은 다음 레이어, 표피, 단계가 없다. 순수하고도 막막한 느낌을 동시에 자아낸다. 우리는 맨몸의 이미지를 통해 그 존재의 속을 투시할 수도, 단지 겉을 훑어보았을 뿐일 수도 있는 경계에 선다. 이 사실만을 과민하게 의식할 때 진실한 관계는 존재할 수 있을까.

<셰임>에서 극중 내내 애정을 갈구하던 씨씨는 관계의 실패를 마주하자 자기 피부를 찢어 피를 흘린 바 있다. 경계 밖으로 나온 피는 물리적 범위를 확장함과 동시에 한 개체의 파괴를 암시한다. 더 거대한 크기, 더 선명한 화질, 더 다양한 각도로 면적을 넓히는 스크린 산업에서 우리는 더 가까운 근원에 도달하려 하지만, 해독을 기다리는 고독한 육신의 이미지 앞에선 영원히 근심에 빠질 수밖에 없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