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메타코멘터리 #8] 한국영화에서 '가족'은 무엇인가
공동체와 시네마(2) 가족없는 가족 영화들
최근 관객과의 대화를 나눴던 한국영화 세 편은 이미랑 감독의 <딸에 대하여>, 오정민 감독의 <장손>, 그리고 정해일 감독의 <언니 유정>이다. 이 영화들 모두 유튜브 채널 '튜브의 시대'를 통해 공개한 바 있다. 각각의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질문과 고민을 나누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들이 모두 품고 있는 '가족'의 문제와 더불어 심화된 질문들이다. 오늘날 가족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도 기성의 감독이 아니라 새로운 감독이 가족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1.
<딸에 대하여>의 어머니(오주희)는 딸의 집(방) 문제로 인해 융자금을 구하러 다니고, 결국 자신의 집에 함께 살자는 제안을 한다. 딸의 귀환은 '탕자의 귀환'이라는 정통적인 서사와는 거리가 있지만, 성인이 된 후 나가 살면서 달라진 딸의 현실과 부딪히는 과정이 펼쳐진다. 어머니는 딸이 주도하는 대학 교내 시위(강사 해고를 둘러싼 갈등)를 목격하기도 하는데, 딸에 대해 어머니가 걱정과 근심을 앞세우는 것은 현재에만 충실한 채 미래를 보지 않는 선택과 행동 때문이다.
어머니는 종종 세 들어 사는 젊은 가족을 바라본다. 어머니의 시선에는 부러움이 있다. 이들은 가족 구성원 모두를 갖추고 있으며,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사는 두 아이가 있는 표준화된 가족의 모습이다. 최소한 어머니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딸에게서는 가족에 대한 준비도, 미래에 대한 책임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불안을 가중하는 시키는 상황이 있다. 딸은 동거인과 함께 집으로 들어온다. 어머니는 딸의 연인과 마주해야 한다. 문제는 딸의 연인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어머니는 딸의 연인을 인정하지 않으며, 대면의 순간들을 불편해하고 티를 낸다. 그런데 영화가 줄곧 보여주는 것은 어머니의 입장과 어머니의 처지 사이에 일어나는 모순이다. 어머니는 홀로 집을 유지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떻게 결별했는지 생략되어 있지만, 최소한 남편의 존재가 미래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딸에게 있을 남편(성)을 상상한다. 두 사람의 만남을 어릴 적 소꿉놀이처럼(그래서 철이 없다고) 여긴다. 어머니는 자신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가족을 바라보면서(싱크대 수리 문제로 두 차례 대화를 직접 나누기도 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에 딸을 맞추고자 한다.
어머니의 또 다른 모순은 직장에서 등장한다. 어머니의 직업은 요양원에서 노인을 돌보는 일이다. 어머니는 치매 노인의 비위를 맞춰주고, 직장 상사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노인을 위한 비품을 규정보다 더 사용한다. 이러한 모습은 어머니가 타인에 대해 무심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인에 대한 태도와 딸(혹은 딸의 연인)에게 요구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이 모순은 어머니가 벌이는 갈등의 원인이고, 한국 사회의 통념을 가로지르는 현실이며, 나아가 어머니가 지니고 있던 중심 세계와 타인에 대한 환대 사이의 차이를 배우는 과정이 된다.
치매 노인의 과거는 세세하게 묘사된 편인데(오히려 딸의 연인의 과거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국가의 아이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던 복지가였다. 그녀가 소중하게 간직하는 가방에는 아이들이 보내온 편지가 있다. 어머니는 이 편지들을 읽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노인은 요양원에서 쫓겨나야 하는 상황이다. 과거의 명성으로 인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지만, 노인의 치매 상태는 홍보를 위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인을 위한 후원금이 중단되고, 그녀가 창립한 재단에서도 노인을 도우려 하지 않는 현실은 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를 불안케 한다.
노인의 명예로운 과거 행적도, 타인을 돌봐 온 헌신도 현재 속에서는 무너져 간다. 노인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어머니는 자신뿐만 아니라 딸도 그러한 지경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미래의 누군가가 딸을 돕기를 희망한다. 미래에는 자신이 도울 수 없기에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누군가는 노인의 경우처럼 타인이어서는 곤란하다. 최소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지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어머니는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는 딸의 연인에게 두 사람의 미래 관계에 대해 질문을 한다. 딸의 연인은 서로를 신뢰하며 살아갈 것임을 말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이지만, 말은 두 사람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이 영화는 말의 신뢰를 넘어 행동의 신뢰를 확인하기 원하는 어머니의 탐색기다. 말은 갈등을 확인하는 차원일 따름이다. 두 사람은 가족에 의해 부여된 이름이 아니라 상호 애칭으로 부른다. "그린과 레인". 이들의 이름은 가족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그린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딸의 이름을 불러달라는 어머니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레인은 변함없이 '그린'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이름은 현재를 이끌어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과 더불어 이 영화의 진정한 갈등은 이름에 함축되어 있다. 가족의 이름을 갖고 살기를 원하는 어머니와 새로운 이름으로 미래를 꿈꾸는 여성 커플의 이야기는 어머니의 집 아래에서 충돌을 일으킨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이름의 현실은 아이러니로도 작동한다. 어머니의 이름은 영화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의 이름은 딱 한번 등장하는데 관공서에서 이력서를 쓸 때다. 그것이 현실이 필요로 하는 이름의 기능이 아닐까.
이름의 진정한 가치는 관계 속에서 나온다. 김춘수의 ‘꽃'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름은 어떠한 관계 속에서 불리는가가 중요하다. 어머니는 자신이 돌보는 치매 노인의 이름을 잘 알고 있다. ‘이제희' 여사다. 하지만 이 이름이 노인의 미래를 도와주지 않으며, 돌봐주지도 못한다. 요양원에서는 어머니가 모르는 상황에서 치매 노인을 옮긴다. 이곳에서 어머니는 일을 하는 여러 ‘여사님'(이 호칭으로 불린다. 어느새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직장인 명칭이 되어 버렸다)들 중 하나일 뿐이고, 노인은 관리의 대상일 뿐이다. 어머니는 새로운 결심을 한다. 노인이 두고 간 짐을 챙긴 후 직접 찾아나선다. 그리고 끝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레인과 더불어 치매 노인은 이 집의 새로운 구성원이 된다.
영화의 이상적인 기운은 이 순간에 펼쳐진다. 자신이 다른 일을 하는 동안 노인을 돌보는 레인을 보며 어머니는 타인이 타인을 돌보는 것의 아름다움을 배운다. 이미랑 감독의 희망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 중 하나는 원작에도 등장하는 "내 딸이니까, 우리는 가족이니까"에 해당할 것이다. 가족에 대한 보수성을 드러내었던 어머니가 치매 노인을 통해, 그리고 치매 노인을 돌보는 레인의 모습을 통해, 타자와 갈등하던 현재를 끌어안는다. 레인이 만든 음식을 모두가 나눠먹으며(세들어 사는 집의 아이들까지 함께) 식구가 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말년의 저작인 『환대에 대하여』에서 타자에 대한 환대의 문제를 무조건적인 환대와 조건적 환대 사이로 구별하면서 두 가지 형태의 환대가 서로를 포함하는 동시에 배제하는 원리임을 설명한다. 무조건적인 환대의 입장에서 보면 "조건적 환대"를 말한다는 것은 자국의 치안을 바탕으로 하는 통제에 불과한 허상이다. 조건적 환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조건적인 환대"는 공공성을 훼손하고 정의의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의 환대이든 서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유럽을 달군 난민을 둘러싼 두 가지 입장이기도 했던 환대의 현실은 단순한 철학적 개념을 넘어서 동시대의 정치, 윤리, 타자, 정의의 문제를 아우르는 핵심이다. 기본적으로 환대는 상대방의 차이를 축소하거나 순화하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의 타자성(차이)을 인정하는 윤리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사회와 법률은 일정한 배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실제로 완전히 실현될 수는 없지만 데리다는 환대의 개념을 통한 윤리적 책임의 기초로 제안하면서 무조건적인 환대가 가장 취약하거나 소외된 사람들(난민이나 난민 등)을 배제하는 기존의 국경 유지와 법에 도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필요로 하는 것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윤리이자 정의이다. 그 점에 있어 무조건적인 환대야말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타자에 대해, 가족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도입하도록 이끈다.
<딸에 대하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레인이 들어오는 상황이 아니라 노인을 찾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적극적 선택이다. 여기에는 조건이 없다. 요양원에서든, 단체를 찾아가서 노인을 지극정성으로 옹호하거나 돌볼 때마다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물었다. "가족이라도 되세요?" 어머니는 가족이 아니지만 끝내 가족이 된다. 가족의 자격이 있는지, 가족의 구성원이 무엇인지 따지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환대 밖에 없다. 물론, 가족을 향한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레인을 향해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그 여자는 누구에요?", "딸은 아는데, 딸의 곁에 있는 그 사람은 누구에요?" 라고 묻는다. 레인에게는 여전히 조건적 환대의 시선이 작동할 것이다.
가족 안의 타자성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대를 가능케 하는 것은 순수한 환대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환대의 역설(환대하는 순간 불안은 작용한다)을 받아들일 때다. 어머니는 레인과 그린에게 때가 되면 나가라면서 조건을 내걸었지만, 노인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한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했을 수 밖에 없다. 무조건적인 환대,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 어머니와 레인과의 관계도 달라진다.
2.
오정민 감독의 <장손>은 정말이지 뜬금없는 영화다.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첫 번째로 요즘 한국영화에서 시골을 배경으로 가족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동백꽃 필무렵>(2019)이나 <갯마을 차차차>(2021)처럼 드라마의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로맨스도 아닌 <장손>이 펼치는 장소는 드라마가 제시하는 상상적 공간으로서의 시골(그곳은 순수하고, 공동체 의식이 있다는 설정을 통해 로맨스를 구현하는)과는 다르다. <장손>에는 시골 마을 드라마 필수적인 이웃이 없다. 공간은 시골이지만, 가족 자체에 국한되어 있다. 영화는 제사와 장례식을 이유로 한 집에 모여들었가다가 흩어지는 가족의 현재를 반복해서 보여줄 따름이다.
둘째, <장손>처럼 극단적인 익스트림 롱쇼트의 화면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나는 것은 어렵다. 한때, 테오앙겔로풀로스의 영화나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에서 볼 수 있던, 사람이 거의 점으로 보이는 수준의 영화들이 있었다. 이 영화들에 인물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풍경이다. 풍경은 시대를 담는다. 그런데 <장손>의 익스트림 롱쇼트는 시대의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구체적인 연대기도 없으며, 특정한 시대가 호출되지도 않는다. 영화를 보다가 묻게 된다. 인물을 압도하는 거대한 풍경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사라져 가는 것들, 즉 노스텔지아의 단면인가 아니면 현실을 초월하려는 이미지인가.
<장손>에 등장하는 제사와 장례식은 그 자체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정서를 환기시키지만 노스텔지어를 소환하려고 애쓰는 작품은 아니다. 제사와 장례가 끝나면 인물들은 각자의 집으로 떠난다. 풍경은 거기에 놓여 있을 뿐이다. 풍경은 앞장서서 무엇인가를 지시하거나 뒤따라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모이고 흩어지는 순간들과 함께하고 있을 뿐이다. 풍경은 가족을 품은 채 무심히 흘러가 버린다. 깊숙한 인연을 자극하지도, 아련한 아우라를 발휘하지도 않는다. 풍경은 거기 있으므로 가족을 한자리에 모은다.
하이데거의 대표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독일어 "Dasein(다자인)"은 현존재라고도 번역되지만, 문자 그대로 "거기 있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때 '거기(Da)'에 해당하는 것이 세계다. 존재는 그가 속한 세계에 의해 정의될 수밖에 없다. 이전의 철학적 개념은 세계로부터 분리하여 인간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설명하고자 했다. 하이데거는 분리가 아니라 '세계 내 존재'만이 인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나무를 자란 곳에서 뽑아내어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면 그 나무를 참되게 이해하거나 평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주하는 세계로부터 격리시키면 현존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자인은 '세계 내의 존재(In-der-Welt-sein)'다.
<장손>의 세계는 시골 마을, 집, 풍경 등이 해당한다. 풍경은 세계의 뿌리다. 이 세계 속에 가족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제사를 치르고, 출산을 경험하며, 베트남으로 떠나고, 뜻밖의 죽음을 맞이한다. 장례식이 열리는 준비되는 순간 가족들은 다시 여기에 모여든다. 영화는 가족의 살아감을 밀도 있게 다루기보다는 등장과 퇴장 속에서 각자의 사연을 나열하면서 세계와 맺는 관계에 집중한다. 가족 구성원마다의 현실과 상황이 등장하지만 메인 서사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이것이 <장손>의 남다른 세 번째 특징이다. 메인 서사가 없음에도 영화가 전개되는 것은 가족 혹은 가족이 가족과 가족이 세계와 맺는 관계들 때문이다. 제사와 장례식으로 나뉘어지는 두 개의 덩어리는 이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반복적으로 갈등을 드러내며, 끝내 헤어지게 하는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인물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저마다의 처지와 오해를 드러내며 반복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진다. 그 순간의 관계 맺음이 하나의 정서를 형성하면서, 가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가족 구성원 각자의 상황은 무엇인지 담아내려고 애쓴다. 동시에 이해될 수 없는 것들,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은 그 자체로 내버려두기도 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족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연을 일별해 볼 수는 있다. 주인공 성진의 가족(술꾼인 아버지와 두부 공장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어머니)의 상황이 있고, 큰고모의 내밀한 사연(화제와 관련한 것일 수도 있고, 죽은 남편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과 장례 직후 돈을 둘러싼 갈등이 있으며, 할아버지의 과거와 베트남에 사업을 하러 간 둘째 고모 집안 등의 상황이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등퇴장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사연 또한 저마다의 모습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사연은 은폐된다.
이를 대신하여 펼쳐지는 것이 집을 떠나는 가족 구성원의 모습이다. 풍경은 이야기가 침묵하는 순간에 비로소 펼쳐진다. 사연의 끝은 풍경 엮여 있다. 인물의 사연과 인물이 속한 집과 공간의 이미지가 하나로 묶인다. 불에 타버리는 큰고모의 집이 대표적이다. 이 집은 사라져가는 가족의 한 단면을 적극적으로 대변한다. 하지만 이조차도 오래된 흔적이 되지 못한다. 영화의 영문 제목인 'House of the Seasons'가 대변하듯이, 가족의 사연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퇴색되거나 망각을 향해 간다.
<장손>은 시대를 의식하지 않은 채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내장된 사연과 갈등을 순수하게 추출하고, 풍경 속에 기입하고자 한다. 물론, 어느 시대인지 말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시간이 박제되는 순간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풍경을 제외한 가족사진의 이미지, 영정 사진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큰고모부의 사진을 합성하는 장면은 유심히 눈길을 끈다. 합성 가족사진은 현재성을 넘어 가족을 보완하고 메우는 욕망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이미지 중 가장 궁금한 것은 '성진이 찍은, 혹은 찍고자 하는 영화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에 대한 어떠한 힌트나 의미를 부여하도 제시하지도 않는다. <장손>은 가족이 지닌 이미지를 고정하지 않고, 풍경 속에 흘려보낸다. 덕분에 많은 것이 등장하지만(이미지, 언어, 대사, 몸짓 등), 떠도는(부유하는)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목표로 삼은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풍경은 인물을 벗어나 과잉되어 있거나 초과되어 있고, 영화 전체의 속에 단독적으로 존재한다. '잉여'된 채 머문다. 풍경은 인물, 사연, 사건, 의미를 벗어난 잉여 자체이자 이 영화의 야심이자 또 다른 본질이다.
3.
가족은 이미 붕괴되어 있다. 다만, 형태를 유지할 따름이다. 오늘날 연약해 보이는 가족이라는 틀은 붕괴의 현실과 재건축 의지 사이에서 진동한다.
<딸에 대하여>는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시작된다.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자신의 불안한 미래와 자신과 닮은 딸을 보며 걱정 혹은 화를 내는 어머니가 있을 따름이다. 어쩌면 어머니가 근심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시작된 가족의 붕괴이며,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최대한 미뤄둔 탓인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지점 중의 하나가 어머니가 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건물이라는 형태의 집은 있지만, 그 집에 거주할 존재들은 부재하거나 대체되거나 재건축되어야 하는 상황이 이 영화의 전반적인 상황이다.
<장손>의 집은 두부 공장과 가까이 놓인 삶의 터전이다. 대를 물려서 공장은 운영되고, 세대에 따라 이 대물림에 따르는 이들과 거부하는 세대가 있다. 하지만, 성진과 큰고모와 베트남으로 떠나는 고모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두부 공장의 경제력 속에서 묶여 있다. 그 가운데 장손에 해당하는 성진은 결코 중심인물이 되지 못한다. 성진은 보조 배우일을 하고 있으며, 영화 연출을 시도한다. 성진의 미래에 두부 공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진의 일에 대해 가족들은 몇 마디씩 거들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만류하거나 억압한다는 인상을 주지도 않는다.
<장손>이 다루는 것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가족의 삶이다. 술 마시는 아버지의 경우처럼, 외떨어져 행동하는 큰고모처럼 가족의 현재와 현실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진의 누이와 매형은 젊은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충실하게 공장과 가족의 대소사를 돌본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아이가 탄생한다. 제사가 있고, 장례식이 펼쳐지는 가운데 '장손'은 형식적으로 필요하지만(조부모들은 성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이 가족을 이끌거나 엮는 중심인물이 결코 아니다. 영화 초반부 제사를 치르기 위해 내려온 성진은 택시를 타고 오던 중 구토를 일으킨다.
그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성진의 첫 등장은 구토와 함께 이미 균열이 나버린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과 달리 전통적으로 강렬했던 '장손'이라는 고유명은 현실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희미해져 있다. 장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전통적인 의례를 위한 것일뿐 실질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도, 구체적인 권력을 지니거나 질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손은 참여의식은 무의식적인 가족 제도의 억압이라고 주장할 지 모르겠지만 가족 구성원을 이탈하지 않는 이상 엄마가 아니라 며느리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구조의 무게를 회피할 수는 없다. 단지, 이 무게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변화되는 가족의 무게감은 이전 세대의 죽음과 함께, 죽음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두 영화가 반복하는 것이다. 두 영화는 가족 영화일 뿐만 아니라 죽음을 대하는 영화다.
이탈리아의 공동체 철학자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죽음은 공동체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일반적인 공동체는 죽음을 추방하거나 죽음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려고 든다. 화장터가 도심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이유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등장하는 것이 부정성에 맞서기 위한 공동체의 '면역' 혹은 '면역체계'다. 면역의 문제는 의학적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다양하게 작동한다. 면역 체계는 철학자 푸코의 통찰을 따라 현대 사회가 만들어 낸 죽음을 관리하는 구조를 상기시킨다. 그것이 가족이 죽음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관점이라면, 두 영화 속에서 죽음은 어떻게 다뤄지고 있을까.
<딸에 대하여> 속 어머니의 불안은 다가올 죽음에 대한 실존적 불안이다. 어머니는 가족이 서로의 죽음을 관리해 주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괄호치기 한 채, 딸의 현재를 불안해한다. 해결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 등장한다. 노인의 상주를 자청하는 그린과 레인을 바라보며, 죽음이 낯선 타인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돌보아 줄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 공동체(가족)에 대한 개방성에 눈을 뜬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죽음을 피하는 공동체,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면역되기를 추구하는 공동체는 텅 빈 생명 없는 껍질이 된다. 진정한 공동체는 자신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인식해야 하며, 이는 집단적 존재에 수반되는 죽음의 위험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불안은 노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비로소 해소된다. 그 누구이든 가족의 이름으로 돌볼 수 있다면 죽음은 허무하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든지 중요한 장례식이 될 수 있다. 어머니는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가족의 타자성, 가족의 개방성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눈을 뜨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에는 서사적인 비약이 있다. 집안에 노인이 들어오면서부터 어머니와 레인 사이의 갈등은 진전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갈등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이것은 서사의 정서적 기능이다. 죽음 앞에서 갈등은 무화 되고, 관계에 대한 일시적 통합이 원활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작용은 지적인 성찰보다는 감정적 호소에 반응으로 짜여져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이미랑 감독에게 질문을 던졌다(유튜브 영상에도 등장한다). 이미랑 감독은 공감을 표하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마지막 에필로그를 찍었다고 답했다. 횡단보도 맞은편에 서 있는 여학생들을 자애롭게 바라보는 어머니를 통해 세상의 모든 딸들을 수용하는 어머니의 인상을 새기고자 했다. <딸에 대하여>는 '현실에서 넘어서기 쉽지 않은 세대 간의 갈등을, 한 우리 안에 있는 공동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확장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가족은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장손>의 할머니의 죽음으로 영화 속에서 두 번째 가족 모임을 시작한다. 장례식은 바뀐 계절의 감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흩어졌던 가족을 다시금 모여들게 한다. 베트남으로 간 딸의 가족도, 상경했던 성진이도 황급히 내려온다. 가족 사이의 숨겨진 갈등이 더 높은 파고를 그리며 등장하는 것은 장례식 이후의 모습을 통해서다. 장례직후 할머니의 통장을 둘러싼 추측과 혐의가 난무한다. 큰고모가 의심을 받는다. 그리고 큰고모의 집이 불타오르기에 이른다.
<딸에 대하여>의 어머니가 집을 채울 가족에 대한 고뇌와 번민이 가득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 화제 장면은 중요하다. 얼핏 보기에 <장손>은 두부 공장을 비롯한 이 집이 영원할 것처럼 보여주지만 큰 코모집의 화제를 통해 집의 존재성이 타오를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이 화재는 자연적인 재해로 인한 것이 아니라 큰 코모의 자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사실을 무엇으로 받아들이든 쉽사리 타버릴 수 있는 집은 가족을 담아내기에 굳건하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손>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장례식이 아니라 큰고모집의 화제와 병원에서 성진과 큰고모가 나누는 대화 속에 집약되어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살아가고 있지만 절대적이거나 굳건한 토대가 아님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에스포지토의 성찰을 따라 집과 공동체는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면역체계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붕괴될 수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에스포지토가 제안하는 공통체의 본질은 공통성이다. 이때의 공통성은 기존의 사회학이 지닌 고유성(언어, 민족, 지역 등등)과 다르다. 그것은 "공통적인 실체가 아니라 공유하는 삶에 가깝다." 그것이 라틴어 명사 코무니타스와 무누스를 통해 새롭게 발견하곡자 하는 이 시대의 공동체성이다. 새로운 공동체는 타자성을 끊임없이 수용하는 개방성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출발점임을 환기시킨다.
4.
정해일의 <언니 유정>은 죽음으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새로운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아버지의 부재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엄마는 유정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동생 기정이를 출산하다가 죽었다. 자매는 고모 손에서 키워졌다. 이제 성인된 유정은 간호사가 되어 교대 근무로 하며 바쁜 현실을 살아간다. 빡빡한 현실을 버티는 유정 앞에 등장한 사건은 모범생인 줄 알았던 고3 기정이 아이를 유기하고, 체포되었다는 소식이다. 자매는 <딸에 대하여>나 <장손>에 비해 훨씬 더 소외되어 있다. 이 점은 동생의 사건을 따라다니는 언니 유정이 만나는 주변 인물인 어른들의 모습 속에 뚜렷하게 각인된다.
유정은 자신의 일터인 병원, 기정의 학교, 경찰서를 반복해서 따라간다. 사태를 수습하려고 해 보지만 유정이 마주해야 하는 것은 소문과 힐난뿐이다. 병원에서는 유정이 임신했다는 말이 소문이 돌고, 학교를 찾아가 상황을 파악하려 할 때에는 간호사인데 동생의 상태를 몰랐냐는 질문이 등장한다. 경찰서에서는 서류에 사인하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자신을 향한 이러한 말에 대해 유정은 항변한다. "그럼 선생님들은 무엇을 하셨어요?"
이 물음은 가족 없는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외침일 것이다. 고모를 비롯하여 모두가 유정에게 책임을 물으려 할 뿐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서는 기계적으로 대한다. 하지만 유정 또한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어린아이일 뿐이다. 죽은 어머니를 찾아간 후 동생에게 쓴 유정의 편지가 등장하는 내레이션 중에는 "나도 엄마가 없어진 어린 여자애일 뿐인데"라는 말이 등장한다. 유정을 향해 모두가 빨리 어른이 되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정을 어른으로 돌볼만한 사회적 시스템은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었다.
어른 되기를 강요하는 현실, 가족의 대표자로 나서야 하는 현실은 유정을 빨리 어른이 되라고 재촉한다. 이 작품의 제목이 다른 이름이나 사건이 아니라 '언니 유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니는 어른이고, 엄마의 대체자이며, 가족의 새로운 대명사가 되기를 요구받는 이름이다. 그리고 동생의 사건으로 인해 이러한 요구와 직접 대면하는 유정의 성장 과정을 영화는 전개하고 있다.
20년 전 무렵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연이어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21세기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열풍을 불고 있을 때,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씨네 21에 「한국영화의 소년성」이라는 글을 썼다. 그는 천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 영화들의 주인공이 영웅이 아니라 소년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육체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소년인 남성주인공이 관객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이러한 모습은 흥행 영화가 아니더라도 2003년에 만든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에서도 마찬가지였고, 2010년에 선보인 원빈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저씨>에서도 비슷했다. 어느 정도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근래에 등장한 <화란>(2023)의 주인공 연규나 그를 돌보는 송중기가 연기하는 치건도 다르지 않다. 소년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소년의 마음과 굳건한 신체로 무장을 하고 맞선다.
소년이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소년들이 가장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부정성을 더 자주 드러내지만 스스로 아버지(권력)가 되기를 열망한다. 원빈의 대사인 "한번만 안아봐도 되겠니"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독립 장편 영화의 주인공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언니 유정>을 비롯한 수많은 소녀들이 있다. 여성 감독의 등장도 한몫하겠지만, 한국영화의 소녀성은 기존의 가족으로 재편되기를 희망하지 않으며, 엄마가 되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어떤 죄의식의 공유라고 하는 것을 주목학게 이끄는 데,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속에서 죄의식의 확산이 서로를 비난하고 폭력으로 이어진다. <언니 유정>에서 동생의 친구인 희진이 유정을 향해 기정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냐고 하는 비난이나 <죄많은 소녀>(2017)의 죽음을 둘러싼 여고생들의 폭력적 반응들은 공동체의 불안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폭력성으로 이어진다. <언니 유정>에서 희진의 자해 장면이 해프닝처럼 지니가지만 죄의식을 둘러싼 폭력의 전이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눈길이 가는 장면이다.
<소공녀>(2017), <메기>(2018)를 비롯한 많은 영화들 속 소녀성은 서로를 향한 비난 속에서 폭력적 상황을 일으킨다. 그리고 소녀성을 핵심으로 등장하는 것 중의 하나는 '거짓말'이다. <언니 유정>은 거짓말과 사실의 대구를 연출하는데, 희진은 기정의 절친이자 사건의 정보를 알려주는 조력자인 동시에 사건 당일 화장실에서 함께 있었던 친구였다. 영화에는 거짓말을 한 희진을 향해 유정이 화를 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한 이유는 등장하지 않는다. 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사건 당일의 화장실 장면에서 기정은 언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면회 당시 유정이 기정을 향해 왜 전화를 하지 않았냐고 질문했을 때는 "언니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고 말했다. 그날 기정이 걸려던 전화를 만류한 것은 희진이었다.
소녀들은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비밀과 거짓말"이라고 부를만한 공식화의 과정이 크거나 작게 이들 영화 속에 내장된다. 거짓말은 윤리적 사건인 동시에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모험의 토대가 된다. <비밀의 언덕>(2022)의 거짓말, <남매의 여름밤>(2019)의 소녀도 짝퉁 운동화로 인해 거짓말을 한다. 이 영화들을 소녀의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거짓말과 윤리성, 비밀과 우정의 영화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거짓말은 진실을 추적하는 서사의 동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이들의 거짓말의 원인에 대해서 풀어주는 것은 영화 전체를 통해서다. 그것은 딱 떨어지는 인과율이기보다는 죄의식과 불안과 공포가 뒤얽힌 생래적 반응으로 다가온다.
거짓말을 해결한다는 것은 진실을 말하거나 보여줌으로써 아니라 상대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뤄진다. 그런 점에서, 거짓말은 언어의 타자성인 동시에 존재를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는 가능성으로 탐구된다. 거짓말로 이뤄진 새로운 한국영화는 어떠한 윤리적 토대와 정의를 희망할 수 있을까. 더욱 단단해지는 사회적 면역체계인 법, 의료 제도, 윤리의식 사이에서 한국영화는 어떻게 내파하며 돌파할 수 있을까. 비밀과 거짓말 속에서 우리 시대는 그 어느때보다 새로운 윤리를 정립해야 함을 당면 과제로 앞세운다. 그 가운데 오늘의 한국 영화가 서 있고, 새로운 가족과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 추신
이 글은 중앙일보의 나원정 기자로부터 올해의 새로운 감독의 영화 3편을 선정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쓴 짧은 메모다. 기사에는 내용 전문이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지면을 빌어 기록해 두고자 한다. 3편을 추천해달라고 했지만, 4편을 언급하겠다고 한 후 보낸 단상이다.
21세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꼽는 해는 2003년도이다. 봉준호의<플란다스의 개>도,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도 모두 이때 등장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비평적 상징 자본을 얻게 되면, 차기작을 만들 수가 있었다. 올해 개봉작 중에 선택한 4편의 영화는, 이 감독들이 차기작의 기회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속에서 선택하였다. 이들의 다음 영화가 빨리 보고 싶다.
이미랑 <딸에 대하여>
시대를 따라 흐르던 여성의 목소리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보편적인 동시대 문제들을 포용하는 능력과 차분히 사건을 풀어가는 스타일은 올해 새로운 감독으로 주목해야 마땅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미랑 감독의 더 뾰족하고, 예리한 영화가 보고 싶다.
오정민 <장손>
시골 대가족의 이야기를 과연 누가 영화로 만들려고 할까? 그것도 장편으로 첫 등장하는 감독이 말이다. 이 시대착오적 태도 속에 시대의 정신이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모여있지만, 더 이상 통합되지 않는 사연을 하나의 프레임과 풍경으로 담으려는 야심이 있고 그 성과가 이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제목 바꾸라는 이야기는 여러 번 했다.
정해일 <언니 유정>
차기작으로 가장 상업적인 능력이 있는 감독을 꼽으라면 <언니 유정>의 연출자를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배우들의 조율, 이야기를 쌓는 고집스러움 그리고 결말을 통해 능청스럽게 넘어가는 능력까지 <언니 유정>은 가장 예민한 소재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무리 짓는다. 우리 시대가 기대하는 새로운 감독의 능력이다.
유형준 <우리와 상관없이>
올해 실험적이거나 이전의 단편을 장편으로 끌어와 새롭게 연결하고 재구성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그 중 <우리와 상관없이>는 공간과 사건의 집요한 반복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영화란 무엇인가'를 향해 간다. 정답은 중요하지 않다. 과정 자체가 영화에 대한 답변이자 절절한 연애편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 또 하나의 영화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