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th EIDF] '허니랜드' 좌절과 확신 사이의 공존
[16th EIDF] '허니랜드' 좌절과 확신 사이의 공존
  • 오세준
  • 승인 2020.04.0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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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니랜드’(Honeyland, 마케도니아, 2019, 85분)
감독 ‘류보미르 스테파노프’(Ljubomir Stefanov), ‘타미라 코테프스카’(Tamara Kotevska)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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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랜드>는 제16회 EBS국제다큐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경쟁) 섹션 초청작으로,  '류보미르 스테파노프'(Ljubomir Stefanov), '타미라 코테프스카'(Tamara Kotevska) 감독이 연출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허니랜드>는 마케도니아 외딴 마을에 사는 64년생 '아티제'라는 여성의 삶을 조심스럽게 카메라에 담는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그녀의 세계'다. 관객인 우린 단순하게는 한 인간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는 격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관객이 카메라가 담아낸 이미지를 응시하는 동안에, 적어도 영화 속 인물이 극장 밖에서의 시간에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없는 강력함이 존재한다. 실존하는 세계와 영화 속의 세계의 간극. 그 사이에서 요동치는 감정에 대한 의문. 필자의 고민은 여기서부터다.

영화의 시작, 꽃무늬의 두건을 쓰고 노란색 셔츠를 입은 '아티제'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드넓은 대지를 가르고, 하늘과 맞닿은 산길을 오른다. 비로소 가파른 절벽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벌집'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벌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묵묵히 벌집을 자신의 가방에 옮겨 담는 그녀. 집으로 내려온 그녀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벌들을 잔뜩 놓아준다. 이렇듯 그녀는 양봉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아파서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 그녀는 멀리 떨어진 도시로 나가 자신이 수확한 꿀을 한 병에 10~15유로 정도에 판다.

약 8분여 가까이 영화가 보여주는 아티제의 모습은 그녀의 삶 전체를 압축한 듯 대단히 밀도가 높다. 특히, 이 부분에서 중요한 건 '그녀가 꿀을 수확하는 과정'이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내 거 반, 너희 거 반”(One half for me, one half for you). 이어 벌집을 담은 그릇에 흐른 꿀을 벌들에게 뿌려준다. 그녀가 꿀을 채집하는 과정은 벌과 교감을 하듯 안정적이고, 또 가족과 같은 친밀한 관계로 다가온다. 이는 분명 그녀와 벌을 차례로 교차하여 담는 감독의 카메라를 근거로 설명할 수 있지만, 8분여 가까이 그녀가 지속해서 보여준 삶의 태도가 보다 '큰 힘'을 가진다.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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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존재 그리고 침투의 '징후'

모두가 떠난 마을에 홀로 엄마를 모시며 사는 아티제의 집 옆으로 '이웃'(올리제의 가족)이 찾아온다. 이어 영화는 잔잔함을 깨고 왕성한 움직임과 함께 소들의 울음소리, 가족 구성원들이 목청껏 지르는 외침으로 급격히 소란스러워진다. 그렇지만, 아티제는 그들을 환대한다. 아이들과 재밌게 놀아 주고, 좋은 브랜디를 나누며 식사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벌 치는 법을 알려준다. 이때부터 조금씩 아티제의 삶의 작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처럼 <허니랜드>의 흥미로움은 마치 짜여진 것과 같은 '감독의 내러티브'에 있다. (감독의 편집이라 불러도 무방한)

여기서 '이웃의 존재'는 영화의 '갈등' 그 자체다. 그리고 이들의 생활은 상당히 극적이라 할 정도로 '아티제'의 삶과 대비된다.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올리제의 가족 구성원은 다수의 자식들로 채워진 대가족이고, 많은 소들을 키운다. 심지어 그들의 집은 캠핑카로,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여건을 지닌다. 이들의 모습은 결혼하지 않은 채, 병든 어머니를 홀로 모시고, 많은 사람들이 떠날 때조차 마을에 남아 오랫동안 한 곳에서 생활하는 아티제와는 정반대다.

아티제가 이웃과 함께 어우러져 지내는 즐거운 모습과는 별개로, 감독의 카메라는 이웃의 등장과 그들이 벌을 이용해 꿀을 채집하는 방식에 따른 '변화'를 조금씩 담아낸다. 그러나 영화 중간중간 허공을 바라보는 '아티제의 얼굴'은 이런 변화를 일찌감치 느끼고 있는 듯 느껴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일상이 더는 환기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을 '아티제'를 향한 클로즈업으로 더 깊숙이 표출시킨다. 관객인 우린 '아티제'라는 여성의 삶을 응시하고자 했지만, 어느새 '이웃'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워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왜일까. 분명 올리제가 아티제의 방식을 무시한 탓이다. 아티제는 반복적으로 말한다. '반'만 수확해야 한다고. 벌들에게 절반의 몫을 남겨줘야 한다고. 그러나 올리제는 꿀을 팔기 위한 '할당량'을 채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이를 어긴다. 그리고 이는 징후로 감독의 카메라 안에 빠르게 침투한다. 올리제는 꿀을 빠르고 더 많이 수확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등 떠밀고, 벌들은 가족들을 향해 침을 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보채는 올리제의 외침은 셀 수 없는 벌들의 “윙윙”거리는 소리에 당해내지 않고 더 크게 영화 안을 채운다.

이러한 징후의 예감은 카메라의 포착이 아닌, 감독이 포착한 이미지의 나열로 영화의 전개를 폭발시킨다. 돈을 받고 꿀을 파는 장면에 이어 잔류하는 빛으로 어둠이 다 채워지기 전의 밤하늘을 향한 아티제의 얼굴을 담는다. 그리고 아티제의 벌집 근처에서 한 벌이 다른 벌을 공격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또 길게 담아낸다. 그러나 관객인 우린 '올리제'의 사정에 고개를 끄덕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한 올리제의 행동, 이것은 '나쁘다'할 것으로 이분법적인 판단과는 거리가 있다. 어찌 보면 이건 올리제의 사정과 아티제의 사정의 충돌과도 같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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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을 나누는 행위의 의미

이웃의 등장과 이웃이 기르는 벌들의 침투는, 기어코 아티제의 생계를 위협하고, 아티제의 벌들을 파괴한다. “모두의 공존은 이뤄낼 수 없었던 것일까”, 이 질문은 <허니랜드>가 던지는 화두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관객이 우리가 목도하는 건 '충격의 여파'가 아티제가 아닌, 올리제의 가족에게 향하는 순간이다. 소들이 병들어 죽고, 꿀 역시 할당량을 채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를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올리제의 가족은 그렇게 어디론가 떠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아티제의 어머니는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이제 남은 건 '아티제' 혼자다.

다시, 아티제와 올리제의 가족은 왜 함께 살 수 없었을까. 만약 올리제가 꿀을 절반만 수확했다면, 아티제의 벌들이 죽지 않았을까. 올리제는 끝없이 토로한다. “당신에게 필요하듯 나도 필요해요!”라고. 어쩌면 올리제는 벌, 소, 나무, 수풀, 강 등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았기에 더욱더 피력했을지도. 벌들과 이웃과 함께 나누었던 아티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아니, 자식들과 함께 나눠 먹고 살기 위한 올리제의 삶은 사실 지금의 관객인 우리와 더 가깝다.

<허니랜드>에는 '절반을 나누는 행위'가 존재한다. 이 행위가 지탱하는 건 '아티제'라는 여성의 삶이다. 이 행위는 그녀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벌들'과의 공존을 약속한다. 영화가 담고 있는 건 '함께' 사는 삶의 미덕이다. 여기서 함께는 인간들 간의 관계로의 범위가 아닌 '모두'라는 꽤 희망적인 범주를 내포한다. 하지만 영화는 '누군가'의 존재로 언제든지 '행위의 약속'을 어길 수 있는 가능성 역시 품고 있다. 설령 그 존재가 가까운 이웃 일지언정.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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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은 '아티제'가 맞이한 겨울. 그녀는 다시 산을 오른다. 자신과 함께할 벌들을 찾아서. 흰 눈이 쌓인 땅 위로 그녀의 모습이 왠지 가련하고 쓸쓸해 보인다.

또 다시, 감독의 수미상관 식의 구성은 단순히 좌절을 극복한 아티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일까. 여기에는 행위의 반복이 있다. 이 반복을 일으키는 것은 '확신'이다. '그녀의 세계의 실존'이 가지는 근거이자 이유. 어떤 헤프닝쯤으로 담아낸 '영화의 이미지들'은 실존하는 한 개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진실로, 감독의 의지에 따라 연결된 숏들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말 그대로 '허니랜드'를 형성한 것들이다. '절반을 나눈다는 것'은 이곳의 룰이자 생활 양식이다.

결국, 관객인 우리의 응시가 향한 곳은 아티제라는 개인의 삶의 일부가 아닌 전체였음을 <허니랜드>는 90분 동안 쏟아낸다. 영화는 전통,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외로움을 탐구한다. 오로지 태양의 빛만이 그 세계를 비추며, 자연광의 의지해 담아내고자 하는 카메라의 이미지는 충분한 서정성을 자아낸다. 그녀와 자연의 관계, 현대인으로 관객인 우린 결코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런데도 보편적인 공명을 울리는 영화는 몰입감을 자아내는 경험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다큐멘터리다.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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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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