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 지속이 주는 아름다움
'주디' 지속이 주는 아름다움
  • 선민혁
  • 승인 2020.04.06 2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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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불행한 삶을 살게 된 이야기를 자주 접한다. 그런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축복받은 재능 때문에 불행해진 아이러니를 겪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그들은 재능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다. 천재인 그들이 속해 있어야 하는 부조리한 시스템과 천재성을 착취하는 탐욕가들에 의해 불행해진 것이다. <주디>또한 쇼비즈니스에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으나 그것을 착취하는 시스템과 탐욕가들에 의해 어려운 삶을 살게 된 '주디 갈란드'(르네 젤위거)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가 전기영화의 전형을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영화가 주디 갈란드라는 인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그녀를 기리는 방식은 꽤나 흥미롭다.

 

사진ⓒTCO(주)더콘텐츠온

영화는 단순히 천재 주디 갈란드의 불행한 일생을 그리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대신 마지막 콘서트라는 일생의 한 시점에 초점을 맞추어 예술에 대한 주디의 순수한 열정과 주디라는 인물이 가진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주디>는 두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유년시절의 주디와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가족들을 떠나 런던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하는 현재의 주디이다. 강제로 다이어트를 하고 불면에 시달리며 휴식 시간 없이 노동에 시달리는 유년시절의 주디는 현재의 주디가 가진 불안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두 시점의 교차는 단지 인물이 가진 트라우마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만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주디>에서 시점의 교차는 주디가 아역배우였던 유년시절에서 뮤지션인 현재로 이어지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유년시절의 주디는 '프란시스 에설 검'(주디의 본명)대신 '주디 갈란드'를 선택하며 현재의 주디는 자신의 무대에 다른 사람이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쇼비즈니스에서의 프로였고, 계속해서 프로이기를 선택해왔다.

 

사진ⓒTCO(주)더콘텐츠온

영화는 고군분투하는 현재의 주디를 보여주며, 과거의 주디를 통해 고통은 항상 주디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이야기고자 하는 것이 '주디가 겪는 고통은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 아닌 주디의 것이며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와 같은 메시지는 아니다. 할리우드의 유년시절부터 런던의 현재까지 주디는 고통의 포함한 '계속하는 것'을 선택했다. 불면에 시달릴 정도로 고강도의 노동을 하면서도 연기를 계속했고, 무대를 잘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무대에 서는 것을 계속했다. 그러나 주디가 행한 그만하는 것과 계속하는 것 사이의 선택은 우리가 극장에서 콜라와 사이다를 고르는 것과는 다르다.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 주디가 항상 '계속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꼭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알려져야 할 것을 알려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고, 무엇인가를 써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려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주디는 연기를 해야만 했고 무대에 서야만 했다. 주디가 항상 '계속하는 것'을 선택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지 계속하는 것이 그만두는 것보다 훨씬 즐거워서가 아니다. 주디와 같이 '해야만 해서' 무언가를 계속할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선택에 큰 고통이 따를 것을 알고 있다. 소설가 지망생이 소설을 계속 씀으로써 굶주림과 회의감 등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계속하는 이유는, 소설을 쓰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그것을 해야만 하고 그러다 보면 등단의 희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사진ⓒTCO(주)더콘텐츠온

물론 그러한 필연적 선택에 따른 고통의 원인은 선택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게 있다. 주디가 연기를 계속하고 무대에 서는 것을 계속하였을 때 고통이 따르는 이유는 비인간적일 정도의 완벽과 예술가들의 무리한 경쟁을 강요하는 쇼비즈니스의 시스템에,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에 있다. 시스템은 주디가 꿈꾸던 'rainbow'에 닿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 그것을 향해 걷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게 만든다.

주디는 시스템을 해체하거나 극복하지 못했고 'rainbow'에 닿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으며 요절했다. 그러나 시스템이 주디를 굴복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주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계속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주디는 그것을 계속함으로써 'rainbow'를 향해 걷는 행위 자체를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해야만 해서, 그것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강하며 그 행위는 아름답다.

[글 선민혁, sunpool1347@gmail.com]

 

사진ⓒTCO(주)더콘텐츠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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