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티드 버드' 낙인을 증명하는 자
'페인티드 버드' 낙인을 증명하는 자
  • 배명현
  • 승인 2020.04.05 22: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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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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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티드버드는 쉽지 않은 영화이다. 영화의 의미를 알기 어렵다거나 해석하기 힘들다는 뜻이 아니다. 러닝타임인 170분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견뎌내기가 고통스럽다는 의미이다.

영화는 20분만 지나면 예상이 가능하다. 어떻게 플롯이 진행될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형식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이것이 영화의 수준을 낮춘다거나 깊이를 일 차원적으로 만든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것만이라면 차라리 쉽다. 하지만 나로하여금 영화관을 뛰쳐나가게 만들고 싶은 지점은 러닝타임 내내 끔찍한 폭력으로 관객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폭력이 쏟아져나올 것을 알면서도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관객은 참아내야 한다.

그렇다. 이 영화는 견뎌야 하는 영화다. 정말 안타깝게도 온전히 러닝타임을 견디고, 온갖 폭력으로 점철된 화면을 견디고, 굉음과 비명과 포격음을 견뎌내야 하는 영화이다. 그러면 아주 짧은 엔딩을 만나게된다. 이 엔딩 하나로 달려가기위해 영화는 이렇게나 고통스러웠던 것일까. 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스트레스를 퍼붓는 그 긴 시간을 지울 수 있도록 만든다.

<페인티드 버드>는 세계 2차대전 동부유럽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쟁의 한 복판에서 한 유대인 소년이 잃어버린 부모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한 편의 오디세이. 이 소년은 인간으로서 겪기에 너무 잔혹한 경험을 쌓아가며 부모를 찾는다. 부모대신 자신을 돌봐주던 아줌마가 예고도 없이 죽는다. 이때부터 소년의 불행은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고 소년은 방랑하는 점술사에게 팔려 간다. 소년은 점술사와 의도치 않게 헤어지고 새를 파는 남자와 함께 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 간다.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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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참혹한 장면들이 끊이지 않는다. 총에 맞아 죽는 건 차라리 깔끔하다고 생각될 지경이다. 여성의 음부에 와인병을 넣는다거나, 어린아이를 채찍질하고 성폭행한다. 필요 이상을 한참이나 초과한 가학적 과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왜 이 영화를 보아야 하는가와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도 괜찮은가를 고민하게 한다. 

영화의 플롯은 단순함과 과정의 참혹함 때문에 집중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지루함과 참혹함이 교차되면서 관객은 영화관으로부터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게 된다. 분명이 지독한 감독은 관객의 모든 과정을 의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만들어야 했을까. 감독 바츨라프 마르호울는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11년을 버텼다고 한다. 그 시간을 견디면서까지 이 작품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악은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다. 악이 눈을 뜨게 하는 일은 무척 쉽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로서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포스터에 적힌 감독의 말은 더욱 직관적이다. “우리가 그 인물을 좋아하느냐, 혹은 그들의 운명을 애통해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보고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글에 찍혀 있는 방점은 증인이다. 우린 영화를 봄으로써 역사를 기억한 인물이 된다. 단지 책에 적힌  1939년 9월 1일을 기억하는 것이 아닌 그 속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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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리얼리즘에 미치도록 집착한 이유는 여기서 드러난다. 감독은 우리에게 해석이나 하나의 관점으로서 2차대전이 아닌 사건 그 자체를 몸으로 기억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스크린을 통해 바라본 것이 허구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영화관을 뛰쳐나가고 싶게 만드는 것. 우리는 너무나 안전하게 스크린을 바라보고 역겹다면 박차고 나갈 기회가 있지만 그 시대와 사건을 겪은 이들은 그럴 수 없다. 영화를 끝까지 견딘 이들에게만 감독은 자신의 메세지를 전달한다. 그래서 영화는 이렇게 답답했던 것이다. 3시간에 달하는 시간동안 하나의 의미적 쇼트를 넣지 않았던것은 말이다. 마치 끝까지 견디지 않고선 단 하나의 힌트라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다문 사람처럼 감독은 서있었다.

소년은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소년은 그를 증오한다. 아버지는 대화를 해보려 이름을 기억하냐는 식의 이런저런 말을 해보지만 증오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밤 사이 잠시 시끄러운 반항이 있었지만 다음날 부자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잠이 든 아버지의 손목에 숫자 문신을 보고 소년은 버스 창문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며 영화는 끝난다.

아버지는 홀로코스트 수용소에 가기 전 아들을 맡기고 간 것이다. 손목에 적힌 문신은 나치가 새긴 순번이다. 그리고 아들은 그 하나만으로 내면에서 모종의 화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순 없지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아버지’라는 기억을 복기해낸 것이다. 하지만 이 결말이 해피엔딩으로 여겨지면 안 된다. 이 엔딩이 더욱 가슴 아픈건 그 누구도 홀로코스트와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가장 안전할 것이라 여긴 곳에서조차 고통받았다. 목숨만을 부지했다. 유대인이라는 ‘낙인’이 그를 고통 속에 밀어 넣었다. <페인티드 버드>에서 소년이 만난 수많은 사람 중 새를 파는 남자는 새끼 새에게 물감을 묻히고 날린다. 하늘에 날던 새 떼는 물감이 묻은 새를 공격해 죽인다. 낙인이 찍힌 새는 무리에 어울릴 수 없다. 그렇다면 소년에게 낙인을 찍은 자는 누구인가. 신 아닌가. 

감독은 신을 원망하고 있는 것일까. 이 살상이 가진 의미는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겪지 않고는 생각해 낼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암흑의 편린을 맛볼 수 있게 한다.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은 영화로선 길지만 전쟁으로썬 매우 짧다.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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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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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현 2020-05-14 00:37:32
글만 읽었는데, 전쟁의 잔혹한 실상이 보이는 것 같네요. 영화를 끝까지 보기가 정말 쉽지 않아 보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보도록 하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