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 나카시마 테츠야가 들고 온 것
'온다' 나카시마 테츠야가 들고 온 것
  • 배명현
  • 승인 2020.03.3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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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주)트리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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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영화를 볼 때면 일본이라는 장르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수한 문화와 역사적 배경.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왜곡된 상상력 같은 것이 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이 일본이라는 장르는 정말 특이하다. 최근에 와서야 대중에게도 긍정적으로 평가 받는 (부분이 존재하는) 오타쿠 문화도 서브컬처의 중심인 일본에서 탄생한 문화가 아닌가.

일본이라는 장르는 영화 안에서 특히 장르에 강점을 보인다. 다른 나라에선 탄생할 수 없는 소설이 탄생하고 그 소설이 시나리오가 되고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다. 나는 이 상상력의 뿌리에 일본이라는 거대한 맥락이 있기에 탄생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공포라는 장르에서 보여주는 기괴함은 그야말로 일본스럽다. '미이케 다카시', '츠카모토 신야', '소노 시온', '구로사와 기요시' 등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이 이어질 일본이란 장르를 표현할 수 있는 고유 명사들이다.

'나카시마 테츠야'라는 감독 또한 그들 중 한 명이다. 나는 장르 영화의 매니아 중 한 명으로써, 특히 일본의 장르물을 애호하는 관객으로서 그의 신작을 기다린다. 늘 만족스러운 결과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가진 자의식의 세계와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정신병이 걸릴 것만 같다. 혐오스럽지만 깊은 곳에서는 손을 뗄 수 없이 애정하는 중독자의 심정과 같다.

 

사진ⓒ (주)트리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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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번 영화는 자의식 과잉의 결정체라는 감명을 받았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플롯과 과도한 몽타주가 나를 피로하게 만든다. 135분이라는 러닝타임이 240분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지루함을 극대화 시키는 이유는 한 작품 안에 여러 영화가 따로 담겨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SNS와 실제의 괴리. 양육의 고통. 타인이라는 공포스러운 존재. 정신 분열증. 그로테스크함과 데카당스. 이 이야기가 뒤섞여 관람자를 질리게 만든다. 감독은 보기왕이라는 토속 귀신 하나로 이 모든 이야기를 끌고 가려 하기에 더욱 벅찬 것 같다.

영화의 시작은 오컬트적인 재미로 시작한다. 어두운 방안에서 주술을 벌이며 시작하는 시퀀스로 관객을 홀리고 시작한다. 이후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히데키와 카나의 결혼을 시작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그런 와중에 히데키는 육아블로그를 시작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 수록 히데키는 육아블로그에 점점 더 열중하게되고 현실 보다 블로그에 더욱 치중하게 된다. 불만이 쌓인 카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히데키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것이라 불리는 귀신이 히데키를 죽인 것이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카나를 죽이고 딸 까지 죽이려 한다. 이를 막으려 등장한 준이치와 다카코. 둘은 갖은 노력을 다해보지만 실패하고 다카코의 언니 코토코가 등장한다. 코토코는 거대한 굿판을 벌이려 정부를 동원하고 세계 각지의 무당을 불러온다. 이어지는 굿판은 어떤 영화에서도 재현하지 못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마지막 굿 장면 때문일까. 많은 사람들이 <곡성>을 회상한다. 나도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곡성>의 굿과 <온다>의 굿은 전혀 다르다. 두 영화 모두 귀신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싸운다. 하지만 영화는 보여주어야 한다. 그 방식의 차이가 <곡성>과 <온다>를 가른다. 나홍진의 굿은 관객을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거칠게 말하자면 머리채를 잡고 미친듯이 흔든다. 관객은 정신을 빼앗는다. 하지만 테츠야의 굿은 관객 눈 앞에서 굿 놀이를 벌인다. 관객은 집중하기는 커녕 길고 지루한 놀이가 끝나길 기다릴 뿐이다.

 

사진ⓒ (주)트리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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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영화를 긍정하는 방식도 있다. 데리다를 데려와 해체를 언급하는 것이다. 일본 문학과 만난 <엑소시스트>를 풀어내는 이미지의 방식은 잉마르 베리만을 떠올리게 만든다. 게다가 유아틱한 쓸고퀄 CG는 현대 아동 프로그램을 상상하게 하는 동시에 작가의 퇴행적 측면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심지어 영화의 클라이 막스엔 일본 퇴마사(?)와 함께 한국의 무당이 나와 굿판을 벌인다.

하지만 이 때문에 해체를 말하기엔 현대의 너무 많은 장르 영화들이 해체적이다. 오히려 현대의 장르 영화들이 해체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더 힘들 지경이다. 해체가 당연하게 된 이 시점에서 우리가 말해야 하는 건, 해체의 유효성이나 유용성이 아니다. 그 가능성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요컨대 잘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이다.

한국에서 처음 상영되었던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는 4회 모두 매진이었다. 때문에 이 글을 적는 지금도 조심스럽다. 지뢰를 밟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갈증>에서 보여주었던 그 강렬함을 다시 그리는 팬으로서 이번 작품은 아쉽다.

 

사진ⓒ (주)트리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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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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