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제목을 보고, "아직도 <기생충>이야?"라고 말한다면, 특별히 할 말은 없다. <기생충>에 더 취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 더 취해보기로 했다. 사실 이 글의 제목은 존 버거의 <랑데부 - 이미지와의 만남>에서 빌려온 것이다.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정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이와 같은 기능을 할 때, 예술은 비가시적이고 환원 불가능하며 지속적인 배짱과 명예가 만나는 장소가 된다."라고.
그렇다면 관객인 우리가 <기생충>을 응시하는 동안 마주할 수 있었던 장소(특정 장면)는 어디였을까? 이번 기획은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필자인 '나'를 포함해 배명현, 선민혁 기자가 참여했다. 흥미롭게 모두 <기생충> 후반 부분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나 '기택의 가족'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넣는 공통점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과 <기생충>의 랑데부는 어디였는지.
1. 배명현
기택은 동익을 칼로 찌른다. 파티장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초록빛 정원과 그 위에 놓인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음식, 가장 눈에 띄는 인디언 텐트. 아름답게 꾸며진 장면 안에 붉은 피가 이질적으로 떨어진다. 기택은 왜 이 순간 동익을 찌른 것일까. 이 순간 나는 당혹스러웠다.
기택의 무계획. 그 결과는 우발적 살인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벌어진 살인. 예측 불가한 순간, 예측불가능한 순간에 일어난 무계획은 봉준호의 철저한 계산이었다. 영화를 보는 누구도 그 살인을 예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설득은 다르다. 예상치 못한 곳에 관객을 떨어뜨려 놓고 봉준호는 반응을 지켜본다. 이 관객들은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 영화관을 나온 관객들은 각자의 논리를 내세운다. 아무런 설명 없이 이해하는 관객. 누군가는 아무리 긴 해설을 들려줘도 듣지 않는 관객. 또 다른 '누구는 진짜 상징적이네' 라며 찜찜한 마음을 가지고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 관객.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나의 당혹감은 어디로 향했는가. 기택의 무계획이 향한 곳. 그러니까 무계획의 역할은 임무완수였다. 수석이 기택의 집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이들 가족 중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종결시켜야 하는 임무를 돌려막고 있었다. 기우에서 기정으로 기택에서 충숙으로 그리고 다시 누군가로 계속해서 서로에게 폭탄을 돌리던 이야기는 결국 무계획의 손에서 터지고 만다.
이야기는 종결되고 그 상징적인 폭탄의 파편을 맞은 이들은 모두 사라진다. 죽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이다. 더이상 화면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때 깔리는 기우의 나레이션은 희망을 말하지만 얼마나 공허한가.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2. 선민혁
'전원취업'이라는 계획에 성공한 후, 캠핑을 떠난 박사장 가족의 집에서 술판을 벌이고 자축을 하던 기택 가족은, 그들이 쫓아낸 가정부 문광의 방문과, 박사장 가족의 예정에 없던 귀가라는 '계획에 없던 일'을 마주하게 된다. 기택 가족은 신분상승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계단을 오르는 일을 반복했으나, 한 번 발생한 '계획에 없던 일'로 인해 계단을 끊임없이 내려가게 된다. 기택 가족에게는 계단을 올라가는 일보다는 내려가는 일이 훨씬 고돼 보인다. 그것이 계획에 없던 일이기도 하고, 하필 폭우까지 내리기 때문이다. 계단에서 폭포처럼 흐르는 빗물은 내려가고 있는 기택 가족의 등을 떠미는 듯하다.
물은 가장 낮은 곳으로 모이고, 낮은 곳의 사람들이 계획해본 적 없는 단체 취침을 하게 만든다. 높은 곳에서는 그렇게 많이 오는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던 비가, 낮은 곳에서는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는 재해인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치명적인 영향으로 존재할 때,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된다. 박사장의 저택에서 지하실의 근세에게 '계획은 있냐'고 타이르던 기택은 체육관에 누워 아들 기우에게 '계획의 쓸데없음'을 이야기한다. 비가 내린 다음 날, 연교는 전날의 폭우에 대해 미세먼지가 사라지게 해주었고, 다송이의 깜짝(번개라고 표현한다) 생일파티를 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전화위복'이라 평한다. 이 대비는 너무나도 선명하다.
[글 선민혁, sunpool2@ccoart.com]
3. 오세준
기정의 죽음과 기택의 살인 이전에 '비극'이라 불릴 장면을 하나 뽑자면, 단연 기우네 집이 홍수로 물에 잠기는 부분이 아닐까. 그런데 그 상황에는 이상하게 가슴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존재한다. "이 감정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이 의문은 영화가 끝나도 해소할 수 없는 감정의 찌꺼기다. 또, 이것은 더는 체내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된다.
그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버지. 아까 그 계획이 뭐예요?"라고. 수해로 피해를 본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기우는 온통 박사장 집에서 만난 '문광과 근세에 대한 걱정' 뿐이다. 여기서 '기우의 걱정'은 그들이 박사장 부부에게 들키지 않고, 평소와 같이 일을 할 수 있는 데에 있다. 잠시나마 온 가족이 취업을 해 남궁현자 선생의 집에서 누렸던 '부'에 대한 욕망은 물에 잠기지 않은 채 여전히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이어 기택은 "너 절대 실패하지 않은 계획이 먼 줄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노플랜.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되거든 인생이. 여기도 봐봐. 이 많은 사람들이 오늘 때거지로 '체육관에서 잡시다' 계획했었겠냐. 근데 이것봐. 다같이 마룻바닥에서 쳐 자고 있잖아. 우리도 그렇고. 그러니깐 계획이 없어야 돼 사람은. 계획이 없으니깐 먼가 잘못될 일도 없고, 또 애초부터 아무 계획이 없으니깐 먼가 터져도 다 상관 없는거야. 사람을 죽이건 나라를 팔아먹건 다 상관없다. 이 말이지. 알겠어."라고 답변한다. 이어 조용히 그의 말을 들은 기우는 "아버지. 죄송해요. (...) 제가 '책임'질게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기우가 말한 책임은 문광과 근세를 제거하기 위한 결심으로 작용한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기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 장면은 관찰의 시점보다는 기우의 기택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 느낌이다. 그러나 영화를 다시 볼 때, 기우의 그 결심이 관객의 입장에서 얼마나 볼품이 없는지, 다시금 자각하게 된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얘가 자꾸 나한테 달라붙는 것에요.", "진짜로 얘가 자꾸 나 따라와"라는 말로 산수경석 탓을 돌리는 기우의 표정은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서 벤을 죽이고 유유히 떠나는 종수의 표정과 같다.
과연 이 시퀀스에서의 '몰입'은 정당한가. 기우의 선택은 옳은 것인가. 그 선택으로 무자비하게 밀어 넣은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현실인지, 자신의 삶을 짓지 못한 무능력함인지, 과연 '나'라면 어떨지. 처음은 이미지의 취해서 기우의 가족 안으로, 두 번째는 해소할 수 없는 의문에 기우의 선택에 대한 불편함을, 그리고 <기생충>이 보여준 시대가 지니는 현실은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 그렇게 또다시.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