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 타인이라는 불안
<아사코> 타인이라는 불안
  • 배명현
  • 승인 2020.03.2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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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사코'(Asako I & II, 2018, 120분)
감독 '하마쿠치 류스케'(Hamaguchi Ryusuke)
사진 ⓒ (주)이수C&E
사진 ⓒ (주)이수C&E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라는 자아의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타인의 존재를 말하기 힘들다.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선 스스로 확인 가능하지만 타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물론 인식론의 발달로 인해 이 문제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발전시키고 보완되었지만, 결국 질문은 남는다. 타인의 존재에 대해 '나' 만큼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가.

<아사코>는 그에 관해 묻는다. 타인을 믿을 수 있는가.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사랑하니까 믿는다 혹은 믿으니까 사랑한다. 나조차 믿지 못해 평생을 회의하며 살았던 데카르트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나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사가 있다. “하지만 미안해 네 넓은 가슴에 묻혀 다른 누구를 생각했었어 미안해 너의 손을 잡고 걸을 때에도 떠올렸었어 그 사람을”-고백-젤리스파이스

아사코와 바쿠의 만남은 시작부터 비범하다. 우연히 만난 사진 전시회에서 끌림을 느끼고 바로 키스를 한다. 이렇게 만나고 불안전하게 사랑한다. 아사코와 바쿠가 만나는 내내 영화 안에는 불안감이 흐른다. 바쿠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인물처럼 행동한다. 아사코는 성숙한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 둘의 만남은 바쿠가 떠나면서 잊히는 듯하지만 시간이 흘러 바쿠는 연예인이 되어 돌아온다. 이미 료헤이라는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는 아사코에게 무작정 찾아와 떠나자고 한다. 그리고 아사코는 수락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전개에 관객은 당혹스러워한다. 하지만 이 당혹스러움은 다시 타인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말없이 떠나간 남자친구가 5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으나 현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손을 잡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게 인간이다. 물론 흔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코는 돌아가겠다고 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면서. 힘들게 돌아온 집에서 료헤이와 아사코는 베란다에 선다. 둘은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눈다.

 

- 료헤이와 함께 살아가고싶어
- 난 아마도 평생 널 믿지 못할거야
- 응, 알고 있어. 강 물이 불었어
- 그래, 더러운 강이네
- 그래도 아름다워


이 대화 사이 둘은 강을 쳐다보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다.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더이상 믿음을 바라지 않고 료헤이는 더이상 아시코를 믿지 않을 거라 단언했다. 하지만 이 믿음이 자신을 버리고 전 남자친구에게 가버렸다는 사건 때문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료헤이는  2년 전 부터 힘이 들었다고 독백한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료헤이는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왜 이 둘은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을까. 위 내용을 미루어 본다면 이 둘은 아마 함께 살아가리라 예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는 엔딩에서조차 시선을 교환하지 않는다.

엔딩은 강을 보는 두 사람을 담는 쇼트로 끝이 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강을 보여줌으로써 장면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강 자체는 나오지만 둘이 바라보는 강으로서가 아닌 어떤 범람하고 있는 강 그 자체를 보여주는데 그친다. 서로 덜어져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주는 장면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둘 사이에 엮이지 못한 믿음이 시선의 붕괴로 귀결된다면, 응당 그 시선을 받고 있는 강 또한  붕괴되어야 할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서로의 단절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사진 ⓒ (주)이수C&E
사진 ⓒ (주)이수C&E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은 믿음 그 차체를 의미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주체는 타인들에 대한 빚이 있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나라는 존재의 배치가 타인들 속에 이루어져 있고 그 배치를 통해 이루어진 종적 관계를 통해 형성되어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타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기에 레비나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는 타인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에 대한 경외와 책임감을 발견하는 곳이다.

하지만 다시 물어보자.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면 무엇을 느끼는가. 믿음과 사랑? 아사코는 회의적인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에게 희망을 준다. 믿을 순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끝이 아니다. 불안정 속에 우리는 어떤 배치를 가지며 살아가야하는지. 극중 에이코 숙모가 말한 낭만적 대사. 나는 그이와 아침을 먹기 위해  신칸센을 타고 도쿄까지 간적이 있다는 말. 이 대사 속 그이는 남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극 중 후반에 밝혀진다. 로맨틱하다고 생각한 추억이 한순간 추악한 불륜으로 바뀌어버린다. 아사코는 이 말을 들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료헤이에게 달려간다.

둘은 공통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음에 대한 충격. 결은 다르지만 교집합은 불안이다.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른다는 마음. 하지만 이 불안을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타인의 선택에 의해 달려있기 때문에. 레비나스를 다시 불러오자면 그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말했다. 우리는 타자에 대한 인간의 가치가 신의 명령 같은 종교적 차원을 넘어 우리가 윤리적으로 가져야 할 자신과 타자의 인격적 관계를 중시한다고 말이다. 인격적 관계는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료헤이와 아사코가 법람하는 강에 던진 시선은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둘이 다시 얼굴을 마주 보며 시선을 마주본다 한듯, 경외와 책임을 발견할 수 있을까. 류스케 감독이 마지막 신에서 끼워 넣은 강물 쇼트에 나는 회의를 던질 뿐이다.

 

사진 ⓒ (주)이수C&E
사진 ⓒ (주)이수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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