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래빗>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문턱에서
<조조래빗>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문턱에서
  • 김수진
  • 승인 2020.03.16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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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조래빗'(Jojo Rabbit, 미국, 2019, 108분)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Taika Waititi)

독재와 전쟁의 터에서의 비(非)가시성은 '죽음'과도 같다.

히틀러 독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조조래빗>은 '크리스틴 뢰넨스'(Christine Leunens)의 소설 <갇힌 하늘>(Caging Skies)를 영화화시킨 작품이다. 영화의 미덕 중 하나인 '가시성'을 이용하여 '비가시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반대로 '가시적'인 것들을 숨겨 그간 '보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질문한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예술은 항상 부재의 현재'라고 이야기한다. 예술, 그러니까 영화는 말과 이미지들의 결합 혹은 분리를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랑시에르는 예술만이 비인간적인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초반 '독일 소년단'에 입단한 '조조'의 모습부터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에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다시 말해, '히틀러'의 독재 사상을 세상에 유익한 것처럼 가시화하여 주입한다. '토끼'는 유대인을 가시화시킨 대상으로 등장한다. 나치 군인들은 아이들에게 '토끼'를 잔인하게 죽이는 훈련을 시킨다. 히틀러의 폭력적인 가치관은 끝내 '조조'의 얼굴에 상처를 남기고 이로 인해 독일 소년단의 책임자였던 '클렌젠도프 대위'는 좌천되고 만다.

하나의 사건으로 히틀러 시대의 비가시적인 존재로 전락한 '조조'와 '클렌젠도프 대위'. 다소 심각하게 전개될 수도 있는 이 상황에서, 이 영화는 여타 영화와 다르게 진지하지 않다. 괴짜 성향을 지닌 '클렌젠도프 대위'와 순수한 '조조'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통해 상황의 심각성을 희화화시킨다. '조조' 주변의 나치 군인들 또한 우리가 홀로코스트 영화 속에서 흔히 접했던 군인 이미지로부터 탈피했다. 어딘가 하나씩 부족한,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며 오히려 비인간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사진 ⓒ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사진 ⓒ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히틀러 독재의 역사에서 비가시적(이어야 할) 존재는 다름 아닌 유대인이다. 전쟁의 역사에서 비가시적 존재는 집에 남은 어머니와 아이들 그리고 장애인이다. 이들의 가시화는 결국 비인간적인 시대상을 비춘게 된다. <조조래빗>는 10살 소년 '조조'가 어느 날 집안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숨어 사는 유대인 소녀 '엘사'를 발견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조조'의 상상 속 친구인 '히틀러'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존재이고, 유대인인 '엘사'는 비가시적인 존재다. '엘사'를 만난 '조조' 는 자신의 상상과는 다른 유대인의 모습에 잠시 혼란을 겪지만, 점차 그녀를 가시적인 존재로 받아들이며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얼굴에 상처를 입은 '조조'(심지어 겁쟁이다)와 유대인 '엘사', 그리고 이를 방해하는 상상 속의 친구 '히틀러'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파장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핵심이다. '조조'는 초반 자신의 상상 속 친구 '히틀러'의 말은 맹목적으로 믿으면서 '엘사'의 말은 절대적으로 불신한다. '엘사'가 '유대인은 뿔이 달린 괴물'이라며 '조조'의 머릿속 상상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하자, '조조'는 그제야 '엘사'의 말을 믿는다. 나치의 교육 아래 아이들에게 유대인은 '죽어 마땅한 괴물'이라는 프레임을 가진 비가시적인 존재다.

 

사진 ⓒ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사진 ⓒ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영화는 아이의 순수함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엘사'와 '조조'는 서로에 대한 편견을 거두고 진정한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조'의 엄마 '로지'와 '클렌젠도프 대위'의 비가시적 죽음을 통해 순수함으로는 결코 무마할 수 없는 현실의 참혹함을 암시한다. 마치 <인생은 아름다워>(로베르토 베니니, 1999)에서 '귀도'가 아들 '조수아'에게 이 모든 것은 게임이라며 놀라지 말 것을 당부하고,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듯 엄마와 대위의 죽음은 비가시적으로 연출된다.

여기서 오로지 가시적인 것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조'의 얼굴이다. 영화는 죽이고 죽임당하는 주체와 객체의 뫼비우스 띠에서 벗어나 이 모든 상황을 감내해야만 했던 어린아이의 모습만 보여준다. 보여주는 것과 보아야 할 것, 그리고 보여주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의 혼돈 속에서 궁극적으로 영화는 나치의 잔인함과 전쟁의 참상을 한층 더 강조한다.

보여주지 않았기에 그보다 더한 것을 상상할 수 있고, 보여주지 않았던 걸 보여줬기에 관객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죽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소녀는 물론이고, 겉으로는 나치를 옹호하는 척하지만 남모르게 독재 반대 선전물을 돌렸던 엄마, 마지막으로 어린아이를 지키기 위해 결국 스스로 속죄의 희생을 감행했던 나치군 대위까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린 그들의 존재가 그렇다.

 

사진 ⓒ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사진 ⓒ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결국 <조조래빗>은 살아남은 피해자와 폭력적인 가해자에게만 맞춰진 시선을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나치의 잔인함과 전쟁의 위대함을 형상화하지 않고 인간성이 부정되는 과정을 드러낼 뿐이다. 단순히 독재와 전쟁의 참혹함을 모방하기보다는 보여줘야 할 것들을 오히려 비가시화하여 비인간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 지배적이고 단선적인 역사가 말하는 전쟁의 위대함 대신 군인들의 어설픔과 우스꽝스러움을 스크린 위에 나열하여 진실을 폭로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다. 전쟁이 끝나고 '조조'는 '엘사'의 신발끈을 고쳐매어 준 뒤, 함께 집 문턱을 나선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전쟁이 지나간 그 공간에서 자유롭게 춤을 춘다. 엄마는 늘 '조조'의 신발끈을 매어 줬고, '조조'는 광장의 교수대에 매달려있는 엄마의 신발끈을 매어 줬으며, 이젠 '엘사'의 신발끈을 묶는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역사의 역사'가 예술의 가시성(혹은 비가시성)을 통해 춤추듯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사진 ⓒ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사진 ⓒ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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