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미상' 예술은 정치적이다
'작가 미상' 예술은 정치적이다
  • 김수진
  • 승인 2020.03.06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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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정치적이다'

<작가 미상>은 이 명제를 가장 잘 증명하는 영화다. 예술은 존재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소재만 의미하지 않는다. 예술의 정치성은 그 형식에도 있다. 현대미술의 거장이 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영화는 사실주의와 모더니즘(혹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선 실존 작가가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이야기다.

당시 예술계는 회화의 종말을 고했을 시기로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모노크롬 회화 등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양상을 보였다. 모더니즘의 추상성은 이전에 회화에서 보여준 사실주의를 전복시키며, 그간 예술이 인류에게 강요했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에 이른다. 이 양극단을 통해 우리는 예술이라는 존재가 인류사에 있어 자못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이미지의 반역 La trahison des images'
르네 마그리트(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이미지의 반역 La trahison des images'

쉬운 예로, 르네 마그리트는 '유사'(회화)의 한계를 지적하며 여러 작품을 통해 초현실적인 '상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중 파이프 그림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이미지의 반역>(La trahison des images)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다. 초현실주의 기법을 사용한 이 작품은 당대 관람객에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그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일 뿐이지 실제 파이프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언어-이미지 관계의 배반. 즉 자신들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모든 믿음체계)를 무너트린 마그리트의 작품은 실로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작가 미상>을 통한 시대 읽기

바르너트(게르하르트 리히터)는 히틀러 독재정권 시대에 독일의 동쪽 도시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음악가였던 이모 엘리자베스 메이의 영향 아래 자라고 그의 부모님은 그 시대의 많은 독일인이 그랬듯 내키지 않으나 히틀러의 독재에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자베스는 조현병 징후를 보인다. 순수혈통의 완벽한 유전자를 고집해온 나치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강제로 임신중절 수술을 받게 된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예술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국가 부흥에 전혀 생산적이지 않으며 사라져야 마땅한 능력이다.

 

사진 ⓒ 영화사진진
사진 ⓒ 영화사진진

히틀러의 명령 아래 의사 칼 시반트는 장애인, 정신질환자 등을 불량품 취급하며 낙태를 강행하는 권위적인 인물이다. '죽음을 결정하는 의사'라는 괴물과도 같은 그의 모순성은 나치의 시대에서만이 실현 가능해 보인다. 엘리자베스가 수술실에 끌려가기 전, 처절한 몸부림으로 수술을 거부하지만 이를 외면하면서도 직접 수술은 집도하지 않는 칼 시반트. 그러는 한편 구두에 떨어진 그녀의 눈물을 닦은 손수건은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의 딸 이름도 엘리자베스였고, 머지않아 그가 쏜 화살은 돌아오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칼 시반트의 딸 엘리자베스(이하 '엘리')는 바르너트와 사랑에 빠진다. 동독을 점령한 러시아 장교의 부인이 난산(難産)을 겪고 이를 해결한 공으로 칼 시반트는 살아남는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예술가와 딸이 연애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끝내 임신한 자신의 딸마저 낙태시키고 만다. 동독에서 예술은 없다. 기술자만 존재할 뿐이다. 모든 작업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미명하에 이뤄진다. 동독의 화가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예는 공산주의 체제 선전 벽화를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너트는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엘리와 서독으로 떠난다.

 

다시 예술로

사진 ⓒ 영화사진진
사진 ⓒ 영화사진진

서독으로 왔다고 해서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뒤셀도르프의 현대미술 학교에서 바르너트가 목도한 것은 '자유의 감각' 그 자체였다. 동독에서는 지독하게도 부정되었던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비로소 하게 된다. 그의 스승 안토니우스 판 페르텐은 끊임없이 묻는다. 'Was bist du?'(넌 무엇이냐?). 각종 아이디어가 샘솟는 현대미술의 향연 속에서, 바르너트는 자신만의 것을 찾기 위한 고독한 사투를 시작한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예술은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그에 대한 답을 슬그머니 내민다.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너의 것'을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바르너트는 나치에 대한 보도 사진, 칼 시반트의 증명사진, 자신과 이모 엘리자베스의 어린 시절 사진 등을 작품에 차용한다. 그리고 사진을 본뜬 극사실주의 회화 위에 추상적 형태의 붓질을 가한다. 결국 바르너트는 과거의 회화도 당시 유행하는 현대미술도 아닌 자신만의 것을 완성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복선을 발견한다. 어린 시절 바르너트가 이모를 정신병원으로 떠나보냈을 당시,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현장을 손바닥으로 가린 적이 있다. 다시 손을 내렸을 때 눈앞의 참상은 아웃포커스(Outfocuse) 효과를 통해 희미해진 잔상처럼 보여지는데 이 모든 잔상이 사실주의 회화 위의 과감한 붓질을 통해 재탄생된 것이다. 예술가의 훌륭한 작품은 결국 그가 거쳐왔던 아프지만 '진실한 삶'에서 나올 수 있음을 '이모'라는 존재를 통해 보여준다.

 

사진 ⓒ 영화사진진
사진 ⓒ 영화사진진

실제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동독의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항하여 '자본주의 사실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0년대 이후 미술계는 회화의 종말을 확신했지만, 리히터는 결국 자신이 겪어왔던 아픈 경험을 사실적이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화시키며 회화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질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최고의 화가로서 많은 예술가의 존경을 받는다.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 Woman Descending the Staircase>(1965), <하이드 씨 Herr Heyde>(1965) 등이 이 영화 속에서 차용된 그의 작품이다.

'나'라는 '진실'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다른 누군가의 것이 아닌 나의 이야기, 그 삶이 예술로 승화된 결과는 끝내 아우슈비츠 이후의 예술을 가능하게 만든다. '작가 미상'이라는 제목은 영화 안팎으로 작품을 만든 주체를 없애면서 누구나 이러한 작품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각인시킨다. 이 영화는 많은 예술가를 비롯해 각자 삶의 주체인 우리에게도 생각할 지점을 던져주는 기특한 존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 맹목적으로 현대예술이든 회화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 '나'가 아닌 무언가를 모방하고 따르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어떤 장르나 틀, 스타일과 같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향한 또 다른 맥락의 독재적인 행로이지 않을까 싶어서다. 무엇이 '예술'이고 '진실'인지는 각자의 인생에서만 찾을 수 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이고 그리고 정치적이니까.

 

사진 ⓒ 영화사진진
사진 ⓒ 영화사진진

 

영화 비평지 '씬1980' 편집위원 김수진
웹진 무비스트에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다가 광주로 내려와 영화 비평지 씬1980(scene1980)을 창간해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에서 영화이론도 연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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