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빈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배명현
  • 승인 2020.02.29 01: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레닌그라드 전투 1년 후, 처음으로 맞는 가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전장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영화 안에는 죽음의 냄새가 후유증처럼 남아있다. 회색빛으로 그려지는 도시에는 생동감이란 없고 답답함(클로즈업)과 혼돈(사운드)뿐이다. 이 혼돈 속에 이야와 마샤가 있다.

두 주인공 이야와 마샤는 참전 군인이다.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살아남은 둘은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군 병원에서 일한다. 하지만 일은 쉽지 않다. 문제는 일 자체의 고됨이 아니다. 전쟁의 후유증이 문제이다.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들. 마음과 정신적 부상을 가진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 부상 군인들 중 여성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레닌그라드 전투는 구소련의 붉은 군대만 1,017,881명 사망, 포로 또는 실종과 2,418,185명 부상을 입었다. 민간인 사상자와 피난을 합치면 약 4,078,000명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인 동시에 도시 전투로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끔찍한 사건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성 환자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상하다. 왜일까. 영화는 이 지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야는 전쟁에서 뇌진탕을 당한 이후 간헐적으로 몸이 굳어버리는 증상이 생겼다. 그녀는 아이와 놀아주는 와중에 몸이 굳어버리는데, 아이는 목이 졸려 죽게 된다. 이 불행은 그녀만의 몫이 아니다. 아이는 그녀의 딸이 아닌 마샤의 아이이다. 이 사실을 마샤에게 말하자 마샤는 의외로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다. 죽음은 관객에게 놀라운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너무나도 많은 죽음에 익숙해져 있다. 죽음을 통한 슬픔은 잃어버렸다.

이 인물들은 그럼에도 생동한다. 일을 하고 밥을 먹는다. 남자를 만나고 섹스를 한다. 하지만 이 생동이 아름답지 않은 건 어딘가 결여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덧붙여진 생이란 생의 결핍과 다르지 않다. 감독은 그 지점을 정확히 보여주려 전신이 마비된 환자를 선택한다. 전신이 마비된 환자는 약물 안락사를 택한다. 이야는 환자에게 약물을 주입한다. 환자의 아내와 그 광경에 함께 있는 비극은 생 그 자체의 비극을 다룬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 (주)팝엔터테인먼트

전쟁의 후유증은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그 아픔의 표상은 남성만의 것이다. 아픔의 적극성은 남성들이 소유한다. 회색지대에서 저마다의 움직임으로, 몸(잘린 팔과 상처)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여성의 아픔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여성의 아픔은 보이지 않는 뇌진탕이나 자궁 손상 등으로 표현된다. 다만 이 아픔은 실내에서 표현된다, 은밀하게. 실내의 색은 적색으로 표현된다. 핏빛으로 가득 칠해진 공간 안에서 둘은 아픔으로 생동한다. 급작스럽게 키스를 하거나 싸움을 한다. 잃어버린 아이 대신 들어온 마샤의 애인 사샤는 무기력하다. 말 그대로 아이의 자리를 대신한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통제받는다. 표정과 몸짓 또한 그렇다. 

화면에 이야와 미샤가 잡힐 때 입고 있는 의상 또한 녹색과 적색의 보색이다. 녹색을 입을 때는 치유와 삶의 희망을 떠올리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적색 옷을 입는 미샤는 파괴적인 행동이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끝에서 두 사람은 초록색 옷을 입니다. 모진 세상에서 삶의 희망을 택한 건 무엇 때문일까. 영화에선 다음 세대의 희망이나 더 나아질 미래 따위를 그리지 않는다. 치유에 실패하고 좌절된 사랑만이 가득 담길 뿐이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은 갑작스레 초록 옷을 입은 것일까. 그리고 두 사람은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한다.

이 삶을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것은 아마 이야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내 안은 텅 비어있어" 임신에 실패한 이야가 외치는 말이다. 이야는 미샤를 지배하고 싶어 임신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임신은 실패한다. 누군가의 우위를 점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이 실패는 고통이다. 하지만 좌절이 아니다. 우위를 잡는 데 실패해야만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 위도 아래도 아닐 테니까. 두 사람은 같은 초록색 옷을 입을 때 만이 완벽해진다. 비워져야만 채워지는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완성된다. 전쟁이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으므로 여성은 전쟁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뛰어간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뛰어간 그 세계에서 두 사람은 완벽한 모습으로 존재할까. 물론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몸을 이용한 미샤가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뇌진탕의 후유증으로 보편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이야가 편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 (주)팝엔터테인먼트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