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지옥에서 희망의 기능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지옥에서 희망의 기능
  • 선민혁
  • 승인 2020.02.24 00: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영화의 '뻔하지 않음'은 뻔하다. 비선형의 플롯, 소재의 힘이 다할 때쯤 등장하는 강력한 배우, 영화를 '뻔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뻔한 장치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뻔하게 읽히지 않는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있어도 식상하지 않다. 지루하지도 않다. 개연성이 부족한 부분들이 있어도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재미있는 영화라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담백하기 때문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뜸을 들이지도 않고, 괜히 분위기를 잡지도 않는 '쿨한' 영화다.

 

사진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쿨한 목소리로 자본주의의 출구 없음을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인물들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은 돈이다. 이들은 있어야할 돈이 없어서 생계 혹은 생존에 위기를 겪는다. 언제부터 이들이 왜 이런 위기를 겪게 되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중만(배성우)은 언제부터 인지 모르겠지만, 멸시를 받으면서도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고, 태영(정우성)은 연희(전도연)가 왜 자신을 곤경에 빠트리고 떠났는지는 몰라도, 큰 돈이 없으면 죽을 수도 있다. 미란(신현빈) 또한 하루라도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여 살인도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영화는 이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이 어쩌다가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으니,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절망의 본질적인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돈을 구하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게 되었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 이들이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란 범죄 혹은 행운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범죄의 기회와 행운마저 다른 재화처럼 무한하지 않아 모두가 편하게 누릴 수가 없다. 영화의 인물들은 이것을 뺏고 뺏기는 싸움을 지속하며 아수라장으로 빠져들게 된다.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하는 이들의 도착지는 결국 지옥이다.

 

사진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영화의 인물들은 정확히 무엇이 그들을 짐승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을 모르는 그들이 치열하게 노력하는 이유는 희망이다. 태영은 노력하면 고등학교 동창인 '호구'를 잡아 큰 돈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범죄를 준비한다. '럭키스트라이크'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그러나 영화에서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회자만 되는 호구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미란은 사기를 당한 후, 폭력을 가하는 남편과 사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자꾸만 희망을(그것도 사람에게) 건다. 자신을 사랑하는 진태(정가람)의 마음을 이용하여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실패하고, 일하는 가게의 사장인 연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믿는다. 미란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긴다.

희망은 이들을 지옥 같은 자본주의에서 계속해서 살아나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다르게 말하면 희망은 이들이 계속해서 지옥 같은 자본주의에 머무르게 만든다. 그래서 불탄 집을 바라보며 절망하는 중만에게 어머니 순자가 '6.25때는 온 나라가 이랬다, 팔다리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 갈 수 있다.'라며 위로해주는 장면이, 관객으로 하여금 중만이 그가 이전에 살아왔던 지옥 같은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관객이 중만과 그의 가족들이 이전과는 다른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할 수 있는 장면은 순자의 위로보다는 차라리 영선(진경)이 연희가 숨겨 놓은 돈가방을 우연히 발견하는 '행운'이다.

 

사진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돈가방을 발견한 영선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영화에서 영선은 가장 잘 견디는 인물이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부상을 당해도 쉴 수 없는 노동에도 그녀는 그다지 절망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인물들과 그녀가 다른 점은 그녀는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일을 안 해도 될 것 같다, 돈이 있을 것 같다'는 남편 중만의 말을 헛소리로 여기고, 자신의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영선은 절망할 일도 없어 잘 견딘다. 그런 영선이 돈가방을 발견한다. 돈가방을 발견한 영선이 또 다른 파멸을 만날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아무리 반복해도 나아지지 않는 생활에서 벗어날 만한 가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운이 좋아야 한다.

[글 선민혁, sunpool1347@gmail.com]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