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아버지의 부재, 선택의 기로
'작은 아씨들' 아버지의 부재, 선택의 기로
  • 김수진
  • 승인 2020.02.21 22: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미국, 2019, 135분)
감독 '그레타 거윅'(Greta Gerwig)

<작은 아씨들>을 보고 나니,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우리 외갓집은 오래된 시골집이다. 7형제 온 가족이 모여 식사라도 할 때는 언제나 앉을 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제일 먼저 식사를 하는 그룹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외삼촌, 이모부들이었다. '아, 장유유서(長幼有序)인가'라며 납득하고 이후에는 남은 어른들, 그러니까 나의 엄마와 외숙모, 이모들의 식사를 예상하지만 다음 자리를 채우는 이들은 언제나 나의 남자 사촌 형제들이었다. 온 가족의 식사를 챙기느라 정신없었던 여성 어른들은 다음 순서마저도 자신의 '딸'들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딸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그들이 비워놓은 그릇에 쌀밥을 채워 길었던 허기를 채웠다.

20대 중반 이후로, 다른 여성들과 이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 일'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여자아이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남자 형제들과 차별받고 자라는 게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함'이라는 말에 사로잡혀 애초에 누가 정한지도 모를 이상한 관습 속에서 별다름을 감지하지 못한 채 자라왔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다른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우리 집보다 성차별이 덜했던 집안도 있었고, 반대로 더 심했던 집안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각각의 '차이'가 드러났고, 그제야 '이 일'이 '차별'이었음을 알게 됐다.

<작은 아씨들>은 이렇게 크고 작은 차별과 다름을 겪으며 살아온 이 땅의 여성들에게 '선택지' 같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 영화다, 아니다'와 같은 평가를 떠나서 하는 말이다. 명확히 어떠한 답도 내리지 않는 이 영화가,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미래는 무엇일까.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간접적으로나마 이 작품과 대화할 수 있길 기대한다.

 

사진 ⓒ RKO 픽처스
사진ⓒ RKO 픽처스

Plot Point 1(플롯 포인트 1): 아버지의 이름으로

<작은 아씨들> 이야기의 시작은 '아버지의 부재'이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 남북전쟁 시기로, 한 집안의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간 뒤, 남겨진 어머니와 딸들의 생존기 혹은 성장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은 '마치' 가(家) 네 자매의 각기 다른 정체성(성 정체성을 떠나)을 관객에게 선보이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아버지'가 존재했다면 어땠을까.(물론 중 후반쯤 아버지는 돌아온다) 그녀들의 결혼사가 핵심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배우를 꿈꾸는 첫째 '맥', 작가를 꿈꾸는 둘째 '조', 음악가를 꿈꾸는 셋째 '베스', 화가 꿈꾸는 넷째 '에이미'의 꿈이 이처럼 프레임 위에 자유롭게 나열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들이 가난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모습이나, 학교의 엄격한 규율에 반기를 들고 새롭게 학교를 설립하려고 하는 모습 또한 강한 설득력을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추측은 자크 라캉(Lacan, Jacques)의 관점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라캉은 아이가 어떻게 주체를 형성하고 사회화되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아버지'는 '법'과 '관습'의 상징화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법'을 자신이 욕망했던 어머니(오이디푸스 단계)가 순응하는 것을 보며 아이는 거리낌 없이 아버지라는 이름 아래 놓인 모든 체계, 언어,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작은 아씨들>은 아버지(법과 관습)의 부재를 설정하면서, 그의 자리를 누구든, 어떤 것이든 대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어머니'와 '고모'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 두 사람의 상이한 가치관은 네 자매에게 '아버지의 법'과 상응하는 수준으로 효력을 발휘한다. 실제로 라캉은 '아버지'의 기능에 대해서 친아버지의 위치와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기도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선생님 등도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진 ⓒ RKO 픽처스
사진ⓒ RKO 픽처스

'아버지의 이름'과 대척점에 선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려는 '고모'의 가치관이 빚어내는 간극 또한 극적 요소로 작용한다. 이는 극이 전개되는 내내 네 자매와 관객이 능동적으로 답을 생각하게 만드는 동력으로 자리한다. 어머니는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고귀한 품성을 지녔고, 네 자매가 각자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집은 가난하지만, 딸 중 누구에게도 부잣집 아들과 결혼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반면 '고모'는 네 자매 중에 부잣집 아들과 혼인을 꿈꾸는 현실적인 넷째 '에이미'를 아낀다.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조'에 대해선 반감을 갖는다. 극 전반적으로 '어머니'와 '고모', '조'와 '에이미'는 갈등 관계를 형성하는데 여기서 누가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의 법'을 택하느냐, 아니냐 아니면 제3의 선택이냐. 우리 앞엔 그저 선택의 기로만 놓여 있다.

 

Plot Point 2(플롯 포인트2): 선택의 기로에서

<작은 아씨들>은 결국, '마치' 가(家)의 네 자매가 아버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그릇에 맞는 삶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우선 '조'는 네 자매 중 '아버지의 이름'과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다. 시대를 잘못 골라 태어난 게 죄였는지 (흔히 하는 표현으로) 여성스럽지도 않고, 남성과 어울리는 것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착하지 않다. 여기에다 '작가'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매우 강하고 능력 또한 출중해서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게 안타깝다'라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다.

 

사진 ⓒ RKO 픽처스
사진ⓒ RKO 픽처스

이에 반해 '맥'은 미모도 출중하고 네 자매 중 가장 '여성스러운 여성'이다. 배우가 꿈이었던 그녀는 사교계 모임에 참석하지만, 화려한 복식과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너답게 있다가 와라"라고 당부하는 복선은 마음속에 와닿는 장면이다. 결국 그녀는 집안의 흥망과 상관없이 부잣집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가난한 가정교사와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

네 자매 중 가장 착한 '베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그 옛날부터 남성이 여성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이미지, 도덕적인 여성 그 자체다.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듯이 여성에게 요구되는 '완벽함'은 결국 '베스'를 삶의 끝으로 일찍이 내몰고 만다. '베스'의 죽음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무조건 착하면 손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베스'가 죽기 전 '조'와 나눈 이야기다. "나는 언니처럼 될 수 없어"라는 대사를 통해 이 영화는 개개인의 근본적인 기질은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진 ⓒ RKO 픽처스
사진ⓒ RKO 픽처스

마지막으로 '에이미'는 '조'와 가장 상충되는 인물이다. 초반에는 작가를 꿈꾸는 '조'처럼 '화가'라는 꿈을 이루길 원했던 그녀는 줄곧 '조'의 욕망을 좇았지만, 결국 자신이 지닌 능력의 한계를 마주한다. 그 지점에서 '조'는 자신의 원했던 삶과 사랑을 찾는다. '고모'가 원했던 가난한 '마치' 가(家)를 살리는 이는 '에이미'가 되었지만, '고모'의 바람과 관계없이 그녀는 그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 그토록 사랑했던 '로리'와 짝을 맺었고, 화려한 삶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작은 아씨들>은 중심인물인 '조'라는 큰 줄기에 잔가지 같은 나머지 세 자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인물이 끝내 자신이 원하는 삶을 다채롭게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더 나아가서 결말에서 보여준 '조'의 (다중) 선택은 궁극적으로 이 작품이 붙잡고 있는 주제의식과 같다. 그녀가 일을 선택했는지, 사랑을 선택했는지, 아니면 그 사이에서 타협했는지 알 수 없다. 현실과 소설을 오가는 교차편집을 통해 무엇이 결말인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둘 뿐이다.

 

사진 ⓒ RKO 픽처스
사진ⓒ RKO 픽처스

 

영화 비평지 씬1980 편집위원 김수진
웹진 무비스트에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다가 광주로 내려와 영화 비평지 씬1980(scene1980)을 창간해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에서 영화이론도 연구 중입니다.
[씬1980: 광주영화비평지, blog.naver.com/filmsolidarity8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