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사실적인 필연(必然), 그 여정 안에서
<1917> 사실적인 필연(必然), 그 여정 안에서
  • 오세준
  • 승인 2020.02.19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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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17'(1917, 미국, 영국, 2019, 119분)
감독 '샘 멘데스'(Sam Mendes)
사진 ⓒ ㈜스마일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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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세 번째 관람을 끝내고 나오면서, 분명 '다른 관점과 태도'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다름 아닌 <1917>에 대한 필자가 이 영화를 대하고자 하는 할 때의 각오, 그러니깐 이 영화가 현재 홍보‧마케팅, 예고편, 수많은 블로거, 유투버, 기자들의 프리뷰‧리뷰까지 '촬영 기술의 성취'의 극찬만을 앞세우는 상황에서 적어도 필자는 그것을 제외한 이야기를 해야 할 나름의 경각심을 가졌다는 의미다.

이에 배명현 에디터는 "<1917>은 새롭지만 새롭지 않다. (...) <1917>의 특징이 롱테이크일 수는 있지만, 성취가 롱테이크일 수는 없다. <1917>만의 고유한 특징을 우리는 찾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코아르CoAR <1917> Time is enemy, 20.02.10] 필자 역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조명탄' 장면을 예로 들면서 아름다움의 아이러니에 대한 견해를 설명한다. 더불어 '하나의 숏'으로 이뤄진 이 영화의 형식이 가진 장단점과 함께.

사실 '샘 멘데스'는 결코 호락호락한 감독이 아니다. 여기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단순히 촬영적인 방법 하나로 작품을 내세우고자 하는 감독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필자는 이 같은 촬영 방식은 단순히 작품의 틀에 불과하다 느낀다. 정말 그가 고작 주인공을 119분을 달리게 하기 위해서 <1917>을 제작했을까. 그렇다면 스코필드의 긴 달리기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허공의 발차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오히려 스코필드의 여정은 '다른 무언가'를 발현하는 운동이며 몸짓으로 다가온다.

 

사진 ⓒ ㈜스마일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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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상황, 두 명의 병사

<1917>은 어쩌면 촬영보다는 미장센에 더 집중한 영화라 느껴진다. 두 주인공 '스코필드'(조지 맥케이)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가 이쿠스트 마을의 위치한 2연대로 향하는 여정을 상상도 할 수 없는 크기의 캔버스에 담겼다고 떠올려본다면, 이 영화의 미장센은 가히 거대하고 웅장한 또 수많은 인간들의 모습들이 담긴 그림일 것이다. 마치 르네상스 중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세속적 쾌락의 정원>이 떠오른다. (세 폭으로 구성된 이 제단화는, 왼쪽부터 차례로 태초에 순수했던 인간의 모습과 쾌락에 빠진 모습, 지옥에서 벌을 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 관객인 우리는 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공간을 한 폭이 아닌 하나의 과정으로 주인공들을 따라 면밀히 관찰한 격이다.

<1917>의 미장센은 공간 그 자체라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이 미장센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바로 '전시상황'이다. 마치 영화는 하나의 긴 통로를 지나는 듯한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하지만, 분명 우린 두 주인공과는 다른 위치에 머물러 있다. 스크린이 계속해서 담아내는 것은 단순하게 두 주인공의 궤적이 아닌 철조망, 기관총 기지, 참호, 진흙, 잔인한 학살의 여파로 시체가 잔뜩 깔린, 또 해충과 동물의 사체, 쥐 등 전쟁이 이뤄지는 어느 한복판인 것이다. 관객인 우리가 두 주인공을 따라가며 끊임없이 느끼는 불안과 긴장감 역시 상황 자체, 영화의 공간과 배경이 가지는 기질이 발생시키는 것이다. 즉, 이런 의미에서 <1917>은 전쟁의 공포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인 것이다.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국가 대 국가의 관계이다. 전쟁 관계에서 개인이 서로 적이 되는 것은 우발적이며, 이때 개인은 인간도 아니고 심지어 시민도 아니며 단순한 '병사'일 뿐이다."[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말이다. 관객은 영화가 시작하는 동시에, 아니 어쩌면 휴대폰으로 영화를 예매하는 그 순간에 '전시상황'이 자신 앞에 툭 던져진 것이다. 그것이 직접 체험이 아닌, 심지어는 상상으로 재현된 1차 세계대전의 현장을 어느 정도 거리가 유지된 스크린으로 지켜보는 처지기에, 의식적으로 알면서도 그 상황을 정확하게 체감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두 주인공에 대한 관객의 몰입은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와 샘'을 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예시로 언급한 <반지의 제왕> 정도의 몰입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하나의 숏'이라는 형식인 것이다. 이것은 두 주인공을 전시상황 안으로 도망칠 수 없게 가둬놓으며,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시야를 스크린 안으로 폐쇠시킨다. 결과적으로 <1917>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관객이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터를 벗어날 권리가 없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묵묵히 지켜보도록 하는데, 그 기조가 있다.

 

사진 ⓒ ㈜스마일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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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의 죽음에 대한 물음

'블레이크'는 왜 죽어야 했을까. 관객인 우리는 전시상황이라는 당연함에 취해 그의 죽음을 쉽게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오히려 이 영화를 이해해야 하는 가장 큰 사건일 수 있다. 인간을 너무 쉽게 죽이는 대중영화의 풍토에서 필자의 이 질문은 다소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독일 영년>(1947)의 마지막 소년의 죽음(자살)을 생각해보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계에서 누군가의 죽음이 단순히 비극이라고 여기기에는 맘속에 찝찝함이 찌꺼기처럼 남아 쉽게 해소할 수 없게 만든다.

 

블레이크의 죽음이 관객의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도구적인 장치'라는 것을 배제한다면, 극 속에서 우린 어떠한 근거와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까.

독일군의 함정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뽑았다면 좋았을텐데"라고. 블레이크를 원망하는 그는 결국 홀로 살아남아 임무를 끝낸다. 스코필드의 태도(그의 정체성이라 불러도 무방한)는 꽤 비관적이거나 회의적으로 느껴진다. 그가 메달을 포도주 한 병이랑 바꾸거나 집에 돌아가기 싫은 이유로 '가족이 없어져 있을 것 같아서'라는 말을 뱉을 때, 그는 이미 전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이것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것으로-집어삼켜진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코필드가 영화 초반 블레이크보다 형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항상 앞서 나가려 했던 것도, 살아야 할 이유에 있어서 자신보다는 블레이크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의 여정의 목적에 있어, 블레이크는 형을 지키기 위함이라면 스코필드는 그저 '장군-병사' 관계에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임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스코필드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죽은 존재'임을 명확히 깨달은 인물이며, 블레이크는 그와 달리 '그 사실'을 망각한 인물인 것이다.

전쟁이라는 게임 속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이 인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사람을 죽이는 것에 인정하는-사실에 동의하면서, 정작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자신들이 죽을지 모르는 위협적인 상황에서조차 '먼저 총을 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의 총은 적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닌 오직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감독이 세운 이 규칙은 영화를 한층 인도주의적인 차원으로 이끌면서, 두 사람의 위기를 더욱더 고조시키는 효과를 자아낸다. 결국 이 전쟁 영화는 국가 간의 싸움이 아닌, 국가 간의 싸움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시대적 비극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인간의 존재를 조명하는 것이다. 아울러 독일군에 함정에 뛰어드는 1600명의 아군까지.

 

사진 ⓒ ㈜스마일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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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스코필드의 그러한 인식에 대해 주경철 교수는 "제1차 세계 대전은 종교적 의례, 문화적 가치 등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싸우는 전쟁이다"라고 말한다. 두 주인공이 마주하는 군인들의 공허한 눈빛과 말을 잃은 듯한 침묵이 그의 말을 반영한다. [주경철, <대항해 시대>(2008]

아울러 스코필드가 메달에 관심이 없는 부분에 대해서 김현정 박사는 "오늘날의 군인들은 전쟁에 나갈 때 이미 노예나 다름없다. 그들은 명예를 위해 싸우는 대신 생존을 위해 싸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잃어버릴 명예 따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답변한다. [김현정, <사람, 장소, 환대>(2015]

결과적으로 '블레이크의 죽음'은 스토리 구조로 보아도, 또 이 영화의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인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스코필드로 하여금 '되돌아갈 수 없는 포인트'(3막 중 2막 '절정' 또는 전환점, 스토리 구조상의 관점)이며, 더 나아가 그가 사회적으로 죽은 존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는 의미로 읽어볼 수 있다. 즉 A에서 B로 나아가는 이 영화의 스토리 구조 안에서,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군인이라는 존재하에 '명령'을 수행하지만, 블레이크의 죽음 이후에는 스코필드가 B로 나아가는 이유에 있어서, '명령'이 아닌 동료의 우정에 의한 '부탁'으로 변한다는 것을 읽어볼 수 있다.

이때부터는 전시상황 안에 병사가 아닌, 소중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한 개인의 삶으로 영화는 그려지며, 관객인 우리는 그 개인이 자신의 친구의 형을 살리기 위해서, 더불어 자신의 친구와 같은 죽음이 더는 발생하지 않기 위한 투쟁으로 변모한다. 그렇다면 다시 우린 블레이크의 죽음이 단순한 장치로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영화의 마지막 스코필드가 자신의 가족 사진을 꺼내어 보는 순간에는 그 죽음이 자신을 살려낸(사회적인 의미로의 죽음으로부터) '희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진 ⓒ ㈜스마일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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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스콜필드가 블레이크 중위에 건네는 대사, 이 말은 곰곰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영화에는 2개의 편지가 있는데, 하나는 ‘에린모더 장군’(콜린 퍼스)이 ‘매켄지 대령’(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작전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담긴 문서와 다른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톰이 엄마에게 전하는 편지(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유형의 형태를, 후자는 무형의 형태라는 것. 또 전자는 수신자에게 정확히 전달된 반면에 후자는 엄마가 아닌 형인 블레이크 중위에게 전달됐다는 점까지. 결국, 영화가 끝나는 시점까지 관객인 우리는 톰의 편지가 엄마에게 전달됐는지 알지 못한다.

즉, 톰의 편지는 그가 죽는 동시에 함께 간직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관객의 위치에서 그렇다. 이러한 관전에서 지젝은 “부치지 않은 편지를 보관하는 것은 그것의 미래를 붙잡아두는 것이다. (...) 편지를 간직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 편지를 결국 ‘부쳤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2007)] 그의 말에 따라 블레이크의 죽음과 동시에 간직된 편지는, 이것이 형으로 하여금 엄마에게 전달될 수 있는 미래를 붙잡는 것이다. ‘블레이크 중위의 생존’은 말에 불과한 ‘톰의 편지’의 존재의 이유이며, 그가 죽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 톰의 미래를 셈 멘데스 감독이 붙잡아 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딱 '거기'까지이다. 이 영화가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는 그 이후의 실상-제2차 세계대전-을 더 잘 알고 있으며, 영화 속의 모든 인물이 설령 픽션에 근거한 캐릭터라 할지라도 당시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역사는 실존의 세계 안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톰의 어머니도, 톰의 형도 그리고 스코필드도 파국과도 같은 세계에서, 마치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 속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감독의 상상으로도 막을 수 없는, 아니 다가올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한 실체의 답은 끝내 내려지지 않은 듯하다.

놀라운 영화다. 무수히 읽어낼 텍스트가 한 숏에 이뤄진. 셈 멘데스는 이 영화를 만든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역사는 없다"고 답변한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그 가치가 정확히 무엇인지 체험하고 곰곰이 생각해야 할 몫을 산 격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1917>은 '전쟁이란' 상황을 무수히 많은 존재들로 하여금 관객에 던져진 형태로 거대하게 밀려오는 작품이다.

 

[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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