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을 한 신부님' 가장 진실에 가까운 거짓
'문신을 한 신부님' 가장 진실에 가까운 거짓
  • 배명현
  • 승인 2020.02.17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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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알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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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가진 자들이 산다. 누가 그렇지 않겠냐만 이 마을, 그러니까 다니엘이 소년원을 나와 신부님 행색을 하고 다니는 이곳에는 마을 인원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고통이 있다. 공통의 고통. 한마을에 살던 젊은이 여섯이 차를 타고 가다 마주오는 차와 사고가 난다. 총 일곱 명의 사망. 이 죽음으로 인해 마을은 사건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 고통은 어떤 고통인가. 죽은 여섯 아이들의 부모가 마주 오는 차를 경멸하고 끔찍하게 분노한다. 이 분노의 화살은 마주 오는 차의 주인을 넘어 그의 동반자인 부인을 향한다. 이때 영화는 재미있는 연출을 보여준다. 부인인 리디아를 집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 영화는 마지막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그녀를 집 안에서만 촬영한다.

이 고립감은 영화의 갈등을 고조시킨다. 그녀는 홀로 마을 전체와 싸워 이겨낼 수 없다. 이 시기에 다니엘이 마을에 온것이다. 마치 운명과도 같은 시기에. 때마침 주임신부는 마을에서 자리를 비운다. 다니엘은 타고난 언변으로 마을 교구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설득한다. 신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늘 신과 함께 하며 용서와 사랑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많은 잘못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리디아를 암흑에서 꺼내고 평화와 사랑을 이루어내려한다.

그러나 <문신을 한..>은 뻔한 종교 영화가 아니다. 많은 종교영화가 그러하듯 신의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않다. 오히려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질문을 불러낸다. 신부도 아닌 어설픈 다니엘은 첫 미사부터 실수투성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이 장면 하나로 마을의 믿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과연 이 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걸까. 영화속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기계적으로 기도를 드리러’온게 아닐까.

상황은 다니엘이 마을을 사로잡은 이후부터 발생한다. 진짜 신부가 아닌 다니엘의 거짓말은 점점 불어난다. 마을 사람들을 아픔에서 구원하려 하고 도와주려 한다. 심지어 축복을 내리고 이전 성당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인원을 성당에 모으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건 거짓으로 꿰어낸 상황이다. 거짓으로 빌어낸 성스러움과 믿음 그리고 용서. 그의 행동은 이 순간 과연 어떤 의미를 띄게 되는 것일까. 말 그대로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과거가 어떠하든, 그 사람이 누구든, 심지어 신부가 아닌 사람이 신부인 척을 하며 교리를 전파해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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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다니엘이 직접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주면서 발생한다. 먼저 여섯 명의 장례를 마친다. 그 후 지금까지 살인자 취급을 받던 한 명의 장례를 치르려 하는 순간 다니엘의 거짓이 들통난다. 다니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 소년원 동기가 사실을 까발린 것이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은 아직 이 진실을 모르는 상태이다. 성당으로 마을 인원들이 모여드는 와중에 다니엘의 장례 진행은 무산될 위기에 처해진다.

하지만 그는 온갖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성당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순간 그는 이상한 선택을 하게 된다. 사람들 앞에서 사제복을 벗는다. 몸에 새겨진 문신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진실을 밝힌다. 스스로 자신의 거짓을 고백한다. 마을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한다. 유일하게 다니엘은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던 엘리자의 엄마만이 조용하게 축복을 읊조린다.

 

사진ⓒ 알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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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는가. 도둑질한 사제복을 입자 그는 신부가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훔친 옷인가 아니면 신앙인가. 그 대답을 듣기위해선 다니엘의 눈을 보아야 한다. 영화 중간중간 섬뜩하게 번뜩이는 다니엘의 눈은 광기를 담는다. 분노와 폭력과 성과 마약에 찌든 눈. 그리고 영화는 그의 눈을 가득 클로즈업한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쇼트에서 우리는 진정한 광기를 본다. 이전까지 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던 신부는 사라지고 다시 소년원의 누군가로 돌아온 눈. 이 눈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관객을 바라본다. 우리는 이 눈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그 순간 러닝타임 내내 보았던 타인의 고통을 추스르려던 인자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우리는 오로지 공포 만을 마주한다.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 성과 속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존재인가.

아픔을 가진 자들이 산다. 이 세상에는. 분노와 고통과 증오가 가득한 땅이다. 문신을 한 신부가 거짓으로 성스러움을 전파한다. 우리는, 그러니까 아픔과 분노와 고통과 증오를 가진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무엇을 마주하는가. 다니엘의 거짓과 광기만을 본다면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 그 광기 속에서 우리를 보아야 하고 그 성스러운 순간에서도 우리를 보아야 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라고 영화는 말한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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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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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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