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에게' 당신이 보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다
'사마에게' 당신이 보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다
  • 김수진
  • 승인 2020.02.13 21: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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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알레포

2011년 아랍의 봄을 시작으로, 시리아에서는 바샤르 알 아사드(Bashar al-Assad) 대통령(이하 '아사드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항하는 비폭력 시위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시리아 정권의 무자비한 진압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아사드 대통령은 2014년 연임에 성공하면서 현재까지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시리아 정권의 편에 선 러시아와 저항군의 편에 선 미국의 정치적 관계가 더해지고, 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교적 갈등 양상으로까지 흘러가면서 시리아 내전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한층 복잡해졌다. 현재 시리아는 아사드 정권, 저항군,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점령하는 3개의 영토로 분열된 채 끊임없이 내전 중이다.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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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도 등장하는 성스러운 도시 알레포. 저항군의 주요 거점 지역 중 하나다. 이외에 주요 무력충돌은 다마스쿠스 외곽지역과 홈스, 북부 라스 알아인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사망자는 약 37만명. 사실 이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폭격은 물론이고, 장갑차와 탱크를 이용한 무력진압, 화학 무기를 통한 무차별적인 살상 등으로 아이들을 포함해 노약자 상당수가 희생당하고 있다. 시리아 난민의 경우, 정확한 집계는 어렵지만 약 600만명에 육박한다. 성스러운 도시에서 자행되는 무고한 희생을 바라보니, 르네 지라르가 이야기한 '폭력과 성스러움'이 떠오른다. 그에 따르면 폭력을 통한 희생제의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폭력과 그로 인한 갈등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인류 공동의 질서를 확립할 수 있다.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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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스러움이라는 허상으로 가려진 처참한 광경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결국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인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잘 알고 있다. 앞서 한국이 시리아 난민유입 문제로 치열한 논쟁을 펼쳤던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시리아의 상황을 때때로 접하지만, 지리적, 문화적으로 다소 거리감이 있는 중동 국가의 일은 와닿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다수 사람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보도 역시 여러 차례 재활용된 이미지의 굴레에 갇혀 새로운 자막만 입히는 식의 무책임한 뉴스뿐이다. 안타깝다. 우리 역시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한 고통의 현대사를 지녔지 않는가. 80년 5월의 광주와 87년 6월 항쟁을 거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까지. 무력과 위선으로 국민을 짓밟아온 독재정권을 처단하는 과정을 우리 역시 뼈저리게 겪어왔다. 시리아는 지금, 그날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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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기록물로서의 다큐멘터리

허상이 아닌 실제는 오히려 덤덤하다. <사마에게>를 보고 나면 그 어떤 화려한 수사와 의도적 연출로도 모방할 수 없는 한계점을 마주한 듯하다. 이 지점과 연관해서 자크 랑시에르는 영화가 역사적 기록물로써 어떤 위치를 점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시리아 내전과 관련한 뉴스 보도의 사진, 기승전결 구조의 극영화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그것. 묵묵히 드러내는 다큐멘터리의 미덕이다. 번잡한 이데올로기의 기호들이 넘쳐나는 표상의 시대, 이 가운데에서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마에게> 속 시리아 내전은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실제 그 자체로 다가온다. 정부군의 폭격에 어린아이가 사살되었다는 뉴스 보도를 접하고도 우리는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만 치부하며 일말의 애도의 시간도 갖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극장을 찾아 슬픈 멜로에 눈물을 짜내고, 어느 상업영화 속 히어로의 죽음을 자못 진지하게 애도한다. 무엇이 허상이고 무엇이 실제인가. 시리아 내전 한복판에 선 피해자의 시선으로 완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이 같은 간극에 대해 담백한 어조로 질문한다.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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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관점이기에 <사마에게>는 더 유의미하다. 알레포 지역이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있고, 매번 쏟아지는 폭격으로 위험천만한데 그 어떤 외부인이 취재를 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용감하게 뛰어들겠냐며 피해자의 직접 고발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정확히 증언할 수 있는 자는 피해자가 유일하며 그 누구도 피해자의 증언을 대신할 수 없다. <사마에게>는 어쩌면 진실 보도를 위한 차선책이 아니라, 그 어떤 왜곡도 없는 진실 보도를 위한 최선책이다. 저항군에게 폭격을 가하는 아사드 정부는 이들을 '반'군세력이라고 폄훼하며 마치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한 조직인 마냥 왜곡한다. 앞서 완성된 시리아 내전 관련된 영화들은 그들의 불행을 극적인 플롯에 담아내기 바쁘다. '진정한' 이야기는 피해자, 그들의 시선과 말에서 나온다는 것을 간과한 결과물이다.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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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사마에게>는 남다르다. 감독이자 중심인물인 '와드'의 힘을 뺀 내레이션과 함께 나열되는 생명 탄생의 순간,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소리, 남편 '함자'와의 러브스토리, 친구들의 노랫소리 등. 그동안 숱한 미디어와 극장에 걸려왔던 작품 속 이미지의 표상들과 구별된다. 너무 현실적이라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되는 순간이다. 알게 모르게 관객들이 품어왔던 시리아 내전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깨뜨리고 만다. 그들도 우리처럼 노래를 부르고 행복을 느끼며 사랑을 하는 존재임을. 역사는 같은 자리를 점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 같은 이미지를 차지할 수 있는 시간이어야 했던가.(자크 랑시에르) <사마에게>는 그간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며 그저 담담하게 우리에게 앞으로의 지향점을 제시한다.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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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사마'에게 '엄마'가 전하는 메시지

<사마에게>는 엄마가 아이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의 다큐멘터리다. 앞서 완성된 시리아 내전을 다룬 영화의 대부분은 남성 중심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성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전장의 참상을 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저 절박했을 뿐이다.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와드'는 영국 <보그> 인터뷰에서 카메라로 내전을 찍게 된 계기에 대해 위와 같이 답한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페미니즘 물결과 별개로 '와드'의 신념이 깃든 도전과 헌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역사적 사건이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비가시적 존재인 '여성'이 한 아이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시리아 내전의 참상을 사각의 프레임에 아로새겼다. 그 누구도 세상에 감히 소개하지 못할, (마찬가지로 비가시적이었던) 시리아 내전의 현실을 한 대의 카메라로 생생히 담아내고 완성까지 해내면서 많은 이들에게 소개된 것은 기적이다.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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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드'의 딸의 이름은 '사마'로 '하늘'이라는 뜻이다. '와드'와 시리아 국민, 더 나아가 이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이 추구하고 있는 공통된 삶의 목표일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부여된 '하늘'이라는 이름은 곧 미래의 '희망'을 뜻한다. 하늘 아래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사마'라는 단어는 더욱 의미있다. 한편으로 계속되는 무차별 폭격에 건물 밖을 나가기가 어려운 알레포 사람들에게 푸른 '하늘'은 진정 '희망'과 같은 것이다. '와드'의 카메라는 대부분 어두운 병원 건물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아낸다. 하늘에서 날아오는 정부군과 러시아군의 폭격이 극심해지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지하 대피소로 몸을 숨겨야 한다. 시리아 사람들에게 '하늘'(희망)을 바라보는 일이란 죽음을 불사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 폭격 소리가 들려오면 서로의 생사부터 챙기는 일이 당연한 일이다.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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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마에게>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전쟁 한복판에서 '희망'을 염원하는 이야기다. 어린 '사마'에게도 잦은 폭격은 일상이 되었고 더 이상 울음을 터트릴 만한 사건이 아니게 됐다. '사마'에게 전하는 엄마 '와드'의 내레이션은 딸에게 전하는 편지인 동시에 '하늘'(희망)을 갈구하는 중의적 메시지다. <사마에게>는 참혹한 역사의 현장에 갇힌 여성 개인의 기록이면서도, 시리아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의 열망과 저항군의 신념이 담긴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다.

 

이 영화에 담은 것은 보유한 기록 중 10%에 지나지 않는다.

- '와드'의 한 인터뷰에서 -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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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평지 '씬1980' 편집위원 김수진
웹진 무비스트에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다가 광주로 내려와 영화 비평지 씬1980(scene1980)을 창간해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에서 영화이론도 연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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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행인 2020-02-15 02:19:26
'그간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준다는 견해가 특히 좋았어요. 영화적 해석뿐만 아니라, 현재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해보고 또 난민 문제를 바라보는 생각도 더 깊어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