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의 나라> 성혜를 바라보는 '일'
<성혜의 나라> 성혜를 바라보는 '일'
  • 오세준
  • 승인 2020.02.03 22: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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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의 나라(The Land of Seonghye, 한국, 2018, 118분)
감독 '정형석'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성혜의 나라에는 낭만이 없다. 첫 문장에 다짜고짜 '낭만'이라니. 일단 성혜와 동시대에 사는 다른 세계를 한 번 들여다보자. '미소'는 추운 겨울 밖에서 텐트를 치고 살지언정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는다.(소공녀) '혜미'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다.(버닝) '자영'은 친구인 '현주'를 롤모델 삼아 생애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다.(아워바디) 그리고 '미수'는 더는 우연이란 핑계로 '현수'를 놓치지 않기로 결심한다.(유열의 음악앨범) 심지어 '기우'는 친구 '민혁'의 도움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를 부잣집에 취업시킨다.(결말은 비극적이었지만... 기생충)

도대체 '성혜'(송지인)는 어떻게 살고 있길래 취미도, 운동도, 사랑도 그 어떠한 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할 수 없는 것일까. 오후에는 취업공부, 자정부터 새벽까지 편의점 아르바이트, 곧바로 새벽 신문 배달 그리고 집. 아뿔싸. 그녀는 심한 불면증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그녀의 끼니는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삼각김밥과 물이 전부다. 7년 만난 철없는 남자친구는 모텔비가 아깝다며 그녀의 집에서 섹스를 하길 원한다. 이뿐이랴. 아버지의 병원비, 집 보증금 인상, 시동이 걸리지 않는 배달 오토바이, 손님이 치우고 가지 않은 테이블 등 제대로 굴러가는 건 오로지 그녀의 자전거뿐이다. 이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성혜의 나라>는 그렇게 성혜의 일상, 즉 노동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노동의 값'이 무한히 '0'으로 수렴하는 세계

열심히 살고 있는 성혜가 분명 곧 바로 쓰러질 듯 가련하고 아찔하다. 성혜가 사는 나라는 원래 다 이렇게 사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할 수도 없는 처지, 바로 일을 하는 성혜를 바라보는 관객의 위치다. 루소의 표현대로 성혜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있는 셈”이다.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 이동하는 그녀의 움직임은 삶을 영위하고 자 하는 또 다른 노동으로 다가온다. 노동으로 채워진 그녀의 밤. 안타깝게도 그 댓가는 안락함이 아닌 불면증이다.

해가 중천을 향해 가는 시간. 모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성혜. 세수를 하며 몇 초 동안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반지하 창문을 넘어 성혜의 얼굴을 비추는 빛. 그녀의 얼굴에는 차마 다 읽을 수 없는 감정들이 가득이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영화가 색이 없는 탓일까. 그녀의 삶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버지의 보증? 그녀를 성추행한 회사 직원? 그것을 외면한 동기들? 그녀의 스펙? 계속해서 1차 지원에서 떨어지는 이유는 왜일까?, 정말 블랙리스트가 있는 것인지. 그녀의 나라는 그녀가 인정할 수 없는 사실들로 채워졌다.

성혜를 본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의 실현은 깨달음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자는 배고파서 죽는다는 순간에 대한 깨달음을 잃는 것이다. (...) 노동자는 자신의 힘을 넘어서 또한 자신을 해치면서 생산을 계속한다. 그가 빈곤해질수록 그는 더 적게 소유하게 된다"라고.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1844)] 그렇다 한들 거의 200년 전에 밝혀진 통찰이 그녀를 위로해줄 수 있을까.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취업을 하고자 하는 성혜의 욕망은 어느새 '생존'으로 변질되며, 가중되는 노동량은 그녀 자신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영화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성혜의 노동은 지켜보는 관객의 위치까지 침범하는데, 이는 엄격히 구분되어진 영화와 현실 사이를 모호하게 만드는 판단을 흐릿하게 한다. 노동의 증가는 삶의 윤택함이 아닌, 목숨을 간신히 부여하는 정도의 결과만을 도출시킬 뿐 그 이상은 없다. 미소도, 웃음도, 섹스조차 달콤하지 않은 무기력한 그녀의 회색빛의 얼굴을 응시하는 것은 관객으로서 마치 '일'을 하는 것만 같은 피로를 누적시킨다.

다시 말하면 노력과 노동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에 대한, '주제적으로 목적을 이루는 일' 이것의 의미가 퇴색되어 질때. 그때의 성혜를 우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문제는 바로 이 의문에 있는 것이다. 더는 그 어떠한 요구나 요청도 할 수 없이 성혜를 바라보는 일. 극장 안에 들어선 우리가 그 몫을 지녀야 하는 숙명 같은 시간 안에 갇힌 것이다.

 

'죽음'이라는 선택

영화에는 유일한 플래시백이 존재한다. 바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자살로 죽은 친구 민지의 전화를 받는 장면이다. 밀린 월세를 내기 위해서 돈을 꾸고자 했던 민지의 부탁에 성혜는 작은 도움조차 줄 수 없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간단히 맥주를 먹는 장면에서 성혜와 같은 처지에 있는 또 다른 성혜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모두가 취업을 하지 못했고, 생활고에 빠듯하게 사는 삶. 누군가가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마냥 부럽기만 한 상황에서 영화의 무드는 더 짙어져 간다. 뭐가 더 나은 것일까. 이들의 삶은 갈피를 잃은 듯 어떤 방향이 옳은 것인지 고민한 채 고장이 난 듯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한다.

그러나 <성혜의 나라>의 죽음은 비단 '민주'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바로 사고로 인한 성혜의 부모님의 죽음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집중해서 봐야 하는 것은 다량의 수면제 알을 삼킬지 고민하는 성혜의 순간이다. 이때 그녀의 침묵은 무겁고 무섭다. 영화의 그 어떤 순간도 이때의 성혜만큼 비극적인 것은 없다. 언제라도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그녀의 삶은 어떠한 장면으로도 환기하지 못한다. 밤과 낮의 경계가 모호한 흑백영화의 기질은 이 영화에선 숨을 곳이 없는 밝음, 더불어 쉴 곳이 없는 바쁨으로 이어져 무채색의 성혜의 얼굴을 더욱더 선명하게 비춘다.

별로 먹은 것이 없는 데도 메슥거니는 속을 계속해서 게워내는 성혜.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불안한 증후들은 결국 부모의 죽음값으로 받은 5억이 통장에 채워지고 나서야 멈춘다. 그리고 결정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이런 성혜의 선택은 관객의 입장에서 회피로 다가오기 마련인데, 전체적인 맥락으로 봤을 때 결코 그렇지 않다. 정작 그러한 선택까지의 과정에서 성혜의 부단한 노력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0에 가까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더불어 영화 초반 약사와의 대화, 면접관들과의 면접, 심지어 과거 회사의 직장 동료와의 만남에서 마치 성혜는 그가 사는 세계에서 구경꾼이 된 양 질문 세례를 받는다. 그들은 성혜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상황에서 성혜는 진실과 거짓을 오가는 답변을 말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 사이가 어긋나는 순간이다. 즉 성혜가 사는 나라는 자신의 일에 확신조차 가질 수 없는 부조리 세계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친구인 은하에게 보낸 성혜의 문자 속에서 관객인 우리는 허무함이 아닌 안도감을 느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선택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죽음을 선택해 회피하는 것이 아닌 부조리에 맞서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이다. 카뮈가 말한 '반항하는 인간', 부모님의 몸값인 5억으로 남은 생애를 버틴다는 것, 이것은 사회의 시스템을 거스르는 행위로 노동의 부정을 선언하며 성혜 자신에게는 되려 삶의 무언가를 긍정하는 강력한 의지이다.

 

모든 일을 그만둔 성혜는 자신이 일하던 편의점으로 가 도시락을 사먹는다.

이것은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폐기처리가 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녀가 행복한 모습으로 밥을 먹는 장면이다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자신의 자식을 위해 보증금을 올리는 집주인. 성혜는 그렇게 누군가에게 밀리고 밀려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한다. 취업을 하기 위해서, 멋진 삶을 살기 위해서, 아니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일을 하는 성혜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시간만이 삶에 채워진다. 다행스럽게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그녀는 부조리와 맞서는 새로운 출발에 놓였다. 좌절을 각오한 그녀의 삶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영화는 일을 하기 위해 떠나는 자전거가 아닌 자유롭게 길 위를 달리는 모습으로 마무리한다.

반복과 대조로 한 개인의 삶을 처연하고 진중하게 채워나가는 <성혜의 나라>는 분명 지금 이 시대에 모든 청춘을 향한 직선적인 외침으로 다가온다.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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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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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빵 2020-02-04 18:37:46
평론이 무척 훌륭하네요. 오래오래 글 쓰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