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주체와 전복 게임 (2) - 미술사적 관점으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주체와 전복 게임 (2) - 미술사적 관점으로
  • 배명현
  • 승인 2020.01.2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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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미국, Portrait of a Lady on Fire, 2019, 121분)
감독'셀린 시아마' Celine Sciamma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주), 씨나몬㈜홈초이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주), 씨나몬㈜홈초이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놀라운 영화이다. 이는 영화의 재미나 작품성 혹은 페미니즘적 성취의 측면에 한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론한 영역은 물론이거니와 기존 미술사에 대항하는 강력한 한 방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두 여인의 사랑을 다루는 이 영화에 어떤 충격이 있는 걸까.

영화는 그림을 다룬다. 그러나 영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미술사에서 그림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초상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가 스스로를 기록하기 위해 남긴 것이 초상화이다. 때문에 귀스타브 쿠르베로 대표되는 19세기의 리얼리즘이 등장하기 전까지 초상화의 주인공은 늘 권력가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초상화가 아닌 그림에서 여성이 주인공일 경우는 늘 종교(마리아) 혹은 그리스 신화의 여신이었다. 여성 초상화라 할지라도 대부분 귀족의 배우자로서 그려진 경우가 많다. 반면 후자일 경우에는 늘 나신의 형태로 그려졌고 머리카락을 제외한 체모는 삭제되었다. 왜인가. 당시 그림은 매우 비싼 값을 자랑했고 그 주인은 남성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남성 귀족이 그림을 통하여 리비도를 해소했다는 귀결은 자연스럽다.

아이러니는 귀족들은 춘화를 천박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실의 여성이 아닌 여신을 그린다는 명목으로 체모를 지우고 그림에 천사를 추가하였다. 물론 노골적으로 욕망을 표출한 앵그르의 <터키탕>과 같은 작품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작품에서 여성은 권세의 기록이 아닌, 관객의 눈 요깃거리를 피할 수 없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러한 맥락에 불쑥 끼어든다. 영화는 여성 모델과 화가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두 인물은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활동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채 허무맹랑한 일을 벌이지 않는다. 현실적이다. 두 인물은 역사에 저항(결혼하지 않기 위해 저항하거나 여성 작가로 살롱에 작품을 전시하는 등)하기 보다 다르게 보기를 제시한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주), 씨나몬㈜홈초이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주), 씨나몬㈜홈초이스

특히 두 인물이 헤어지기 전 서로를 기억하기 위해 그림을 나누어 갖는 장면은 주목해볼 만 하다. 화가 마리안은 엘로이즈를 그린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엘로이즈는 마리안에게 자화상을 부탁한다. 이때 영화는 나체의 엘로이즈 성기 부분에 거울을 올려놓는다. 엘로이즈가 숨을 쉴 때마다 거울은 움직이고 거울 속에는 마리안이 보인다. 화면에는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얼굴이 동시에 관객을 비춘다.

이 장면에서 나는 두 가지 회화 작품을 연상했다. 귀스타프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과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두 그림을 재현하거나 1차원적으로 모티브해서 그린게 아니다. 오히려 새로 그리기를 시도하고 있다. 먼저 감독은 여성의 몸에서 얼굴을 제거한 채 성기만을 크게 그린 <세상의 기원>을 비판하는 것 같다. 그림을 담는 것 처럼 카메라를 고정시킨 뒤 배우의 움직임을 최소화시킨 이 쇼트는 감독이 새로 그린 <세상의 기원>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세상의 기원을 거꾸로 그린다. 여성의 얼굴을 담고 성기를 가렸다. 실제로도 쿠르베의 그림은 여성의 얼굴을 그리지 않고 ‘성기’로 그려버림으로써 여성을 물화했다는 페미니즘의 비판이 쏟아진 작품이다. 영화 속 엘로이즈는 들숨과 날숨으로 거울이 움직이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는 명백히 살아있는 인물임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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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 1656-1657, 사진 ⓒ 네이버캐스트

<라스 메니나스>는 어떨까. 벨라스케스는 <라스 메니나스>를 그리면서 특이하게 그림 안에 화가 자신을 그려 넣었다. 이전 그림에서 화가는 볼 수 없는 존재였다. 아니면 아주 작게 표시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 그림 안에서 화가는 매우 큰 사이즈로 그려졌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도 작지 않으며, 심지어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심지어 죽기 전 기사 작위를 받자 벨라스케스는 박물관에 가 자신의 흉곽에 기사 표시를 그려 넣었다.

<라스 메니나스>는 그 자체로 화가의 자의식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전까지 그림에서 화가를 보는 방법은 ‘자화상’ 밖에 없었다. 그림은 비용이 많이 들므로 누가 다른 인물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겠는가.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그 법칙을 어기고 작품 안에 자신을 그려넣었다. 죽기 전까지 그 작품은 벨라스케스를 대변하는 작품이고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과 마리안을 엮는다면 재미있는 해석이 나온다. 마리안을 그리라는 요청은 엘로이즈로부터 나온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누구도 화가의 얼굴을 요청한 적은 없다(실제로 화가들은 그림을 연습하기 위해 자화상을 그렸지 팔기 위한 그림이 아니었다). 이 요청에 마리안은 거울을 보고 자신의 전신을 그린다. 이 그림의 주인은 엘로이즈이다. 스크린을 캔버스라고 했을 때, 우리는 거울 속 화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캔버스 위 주인공은 엘로이즈이다. <라스 메니나스>의 주인은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였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는 거울 속에 왕을 집어넣었다. 영화와 <라스 메니나스>의 두 그림의 주인은 교차되어 있다. 화가의 주체성과 그 그림의 주인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영화는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림을 다룬 영화답게 그림으로도 많은 것을 설명한다. 여성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성을 역사안에서 새롭게, 그림으로 풀어가며 남성위주로 쓰이던 여성 작품을 전복하고 있다. 이 작품이 성취한 미학적 해석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주), 씨나몬㈜홈초이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주), 씨나몬㈜홈초이스

[코아르CoAR 배명현 에디터, rhfemdnjf@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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