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주체와 전복 게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주체와 전복 게임
  • 배명현
  • 승인 2020.01.19 2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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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린나래미디어(주), 씨나몬㈜홈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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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선과 응시. 손과 표정.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포인트다. 제목에서 나타나듯 영화는 그림을 그린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행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림을 학문 혹은 미학적으로 접근하느냐와 그린다는 '행위'로 다가는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그린다'는 것은 시선이 대상을 향하고, 그 시선의 흐름을 기억했다가 캔버스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 기억을 재현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린 선을 응시한다. 이런 행위의 반복으로 그림은 완성되어간다. 초상화 또한 마찬가지이며, 초상화는 특정 인물의 재현이란 면에서, 모든 표징이 대상을 나타내는 요소이다. 손의 위치와 손가락의 꺾임. 얼굴의 표정은 말할 것도 없다. 주제에 대한 '존재감'을 보여주어야 한다.

엘로이즈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마리안은 얼굴을 외운다. 이건 쉽지 않은 일이다. 화가인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런 어려운 과정을 마리안은 수행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사랑하는 사이니까. 이건 쉽게 퉁 치는 말이 아니다. 영화는 이 사랑을 향해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간다. 너무나도 명징한 사실. 가장 어려운 점은 이 사실을 둘이 어떻게 깨달아가는가이다.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두 여성의 사랑. 18세기 프랑스의 로코코 시대. 건축양식은 물론 의상, 사치가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피어난 두 사람의 사랑. 이 사랑은 어떤 결과를 맞이하였는가로 질문을 바꾸어보자. 답은 실패이다. 그렇다. 이 사랑은 실패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시 질문해야 한다. 어떤 실패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주), 씨나몬㈜홈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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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이즈는 언니의 죽음 이후 결혼하게 된다. 언니는 결혼을 거부하는 것을 원인으로 추정되는 자살을 한다. 마찬가지로 엘로이즈 또한 결혼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이 아닌 '달리기'를 택한다. 그는 계속해서 살겠다는 가짐으로 살아간다.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는 못하지만 생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이 선택에 대한 능동성으로 그녀는 영화를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마 이 지점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이 아닐까. 미술사에서 특별한 작품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는 마리안의 말을 새롭게 바꾸겠다는 듯 엘로이즈는 행동한다. 엘로이즈는 초상화의 대상(남성이 바라보는 물화된 인물)에서 작품의 주인공이란 새로운 주체성을 획득한다. 이 획득은 특별하다. 여성들만이 존재하는 듯한 브르타뉴의 섬에서 '평등'함을 바탕으로 인물들은 얽킨다. 이 그물은 각자의 성취를 이루지만 기저에 있는 평등이 성취를 방해하진 않는다. 자본주의 혹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평등이 성취를 방해하는 점으로  등장하는데에 반해 섬에선 그렇지 않다. 이곳은 새로운 세계 혹은 세계관이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주), 씨나몬㈜홈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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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등 위에 세워진 사랑은 특별하다. 단지 소수자의 사랑이기에 특별한 게 아니다. 평등함으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새롭게 해석한다. 지금까지 오르페우스가 '찾아갔지만' 실패한 이야기로 해석되었지만 이 섬의 여인들은 다르다. 에우리디케가 돌아보라는 선택. 찾아지는 대상이 아닌, 주체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오르페우스가 스스로 시인(예술가)의 선택을 했다는 해석을 하며 서로 논쟁한다.

영화 후반에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의 “돌아봐”라는 대사는 그 때문에 명징한 메타이다. 그녀 스스로 '남겠다'는 선택을 한다. 구조, 혹은 운명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새로운 해석으로 다르게 보길 이 영화는 제시한다. 평등을 다루는 영화인 만큼 마리안 또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녀는 화가이다. 남성 중심의 예술계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몰래 작품을 출품하지만(여성에게 허락된 것) 자신의 선택(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헤어지는 순간을 그린다). 그러니까 이 씬의 대화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헤어진 후 혹은 저승에서 만나는 보편적이지 않은 장면을 그린다. (심지어 헤어지는 순간엔 오르페우스의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림에서 주인공은 에우리디케의 얼굴과 동작이다. 이 그림은 저승에 끌려간다기 보다 손을 내미는 주체적인 포즈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오르페우스의 다가가지 못하는 무능함을 연상케 한다)

마리안에게 이 그림은 자신과 엘로이즈일 것이다. 그녀는 본인이 말했듯 시인의 운명을 택하였다. (엘로이즈의 돌아봐 대사 후 아주 잠시 고민하는 뒷모습을 감독은 정확하게 담는다) 또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그리며 평생 그리워하는 대상으로 예술을 이어간다. 심지어 전시장에서 마리안이 음악을 감상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떤 알은체를 하지 않는다. 비발디의 사게 중 여름(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을 들으며 표정만을 지켜볼 뿐이다. 

마지막 장면은 말 그대로 '초상의 영상화'이다.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장면. 유일하게 내려다보는 숏으로 찍은 이 장면. (영화는 평등에 대한 집요함을 보여주기 위해 부감 쇼트나 앙각 쇼트를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게다가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엘로이즈의 얼굴을 가득 담고 있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간 관객은 그녀의 얼굴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있는지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라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이 가진 심연은 그 누구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틈이 있다. 그것이 표정이다. 영화는 인물에게 가장 중요한 표정을 시선으로 응시하길 바란다. 

그 이전 쇼트에서 (그림이긴 하지만) 엘로이즈가 우리를 보았으니(그림 속 엘로이즈는 두 눈으로 관객을 바라보았다. 그림 속 대상이 아닌 예술 속 주인공의 위치에서 관객을 정확히 바라본다). 감독은 관객까지 이 전복적 예술에 동참하여 시선을 교환하길 바란 걸까. 이 흥미로운 영화는 전복이라는 놀라운 성취를 거두며 영화라는 경계를 넘어 예술에까지 손을 뻗고 있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2.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놀라운 영화이다. 이는 영화의 재미나 작품성 혹은 페미니즘적 성취의 측면에 한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론한 영역은 물론이거니와 기존 미술사에 대항하는 강력한 한 방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두 여인의 사랑을 다루는 이 영화에 어떤 충격이 있는 걸까.

영화는 그림을 다룬다. 그러나 영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미술사에서 그림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초상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가 스스로를 기록하기 위해 남긴 것이 초상화이다. 때문에 귀스타브 쿠르베로 대표되는 19세기의 리얼리즘이 등장하기 전까지 초상화의 주인공은 늘 권력가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초상화가 아닌 그림에서 여성이 주인공일 경우는 늘 종교(마리아) 혹은 그리스 신화의 여신이었다. 여성 초상화라 할지라도 대부분 귀족의 배우자로서 그려진 경우가 많다. 반면 후자일 경우에는 늘 나신의 형태로 그려졌고 머리카락을 제외한 체모는 삭제되었다. 왜인가. 당시 그림은 매우 비싼 값을 자랑했고 그 주인은 남성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남성 귀족이 그림을 통하여 리비도를 해소했다는 귀결은 자연스럽다.

아이러니는 귀족들은 춘화를 천박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실의 여성이 아닌 여신을 그린다는 명목으로 체모를 지우고 그림에 천사를 추가하였다. 물론 노골적으로 욕망을 표출한 앵그르의 <터키탕>과 같은 작품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작품에서 여성은 권세의 기록이 아닌, 관객의 눈 요깃거리를 피할 수 없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러한 맥락에 불쑥 끼어든다. 영화는 여성 모델과 화가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두 인물은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활동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채 허무맹랑한 일을 벌이지 않는다. 현실적이다. 두 인물은 역사에 저항(결혼하지 않기 위해 저항하거나 여성 작가로 살롱에 작품을 전시하는 등)하기 보다 다르게 보기를 제시한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특히, 두 인물이 헤어지기 전 서로를 기억하기 위해 그림을 나누어 갖는 장면은 주목해볼 만 하다. 화가 마리안은 엘로이즈를 그린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엘로이즈는 마리안에게 자화상을 부탁한다. 이때 영화는 나체의 엘로이즈 성기 부분에 거울을 올려놓는다. 엘로이즈가 숨을 쉴 때마다 거울은 움직이고 거울 속에는 마리안이 보인다. 화면에는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얼굴이 동시에 관객을 비춘다.

이 장면에서 나는 두 가지 회화 작품을 연상했다. 귀스타프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과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두 그림을 재현하거나 1차원적으로 모티브해서 그린게 아니다. 오히려 새로 그리기를 시도하고 있다. 먼저 감독은 여성의 몸에서 얼굴을 제거한 채 성기만을 크게 그린 <세상의 기원>을 비판하는 것 같다. 그림을 담는 것 처럼 카메라를 고정시킨 뒤 배우의 움직임을 최소화시킨 이 쇼트는 감독이 새로 그린 <세상의 기원>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세상의 기원을 거꾸로 그린다. 여성의 얼굴을 담고 성기를 가렸다. 실제로도 쿠르베의 그림은 여성의 얼굴을 그리지 않고 ‘성기’로 그려버림으로써 여성을 물화했다는 페미니즘의 비판이 쏟아진 작품이다. 영화 속 엘로이즈는 들숨과 날숨으로 거울이 움직이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는 명백히 살아있는 인물임을 표현하고 있다.

 

벨라스케스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 1656-1657, 사진 ⓒ 네이버캐스트

<라스 메니나스>는 어떨까. 벨라스케스는 <라스 메니나스>를 그리면서 특이하게 그림 안에 화가 자신을 그려 넣었다. 이전 그림에서 화가는 볼 수 없는 존재였다. 아니면 아주 작게 표시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 그림 안에서 화가는 매우 큰 사이즈로 그려졌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도 작지 않으며, 심지어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심지어 죽기 전 기사 작위를 받자 벨라스케스는 박물관에 가 자신의 흉곽에 기사 표시를 그려 넣었다.

<라스 메니나스>는 그 자체로 화가의 자의식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전까지 그림에서 화가를 보는 방법은 ‘자화상’ 밖에 없었다. 그림은 비용이 많이 들므로 누가 다른 인물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겠는가.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그 법칙을 어기고 작품 안에 자신을 그려넣었다. 죽기 전까지 그 작품은 벨라스케스를 대변하는 작품이고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과 마리안을 엮는다면 재미있는 해석이 나온다. 마리안을 그리라는 요청은 엘로이즈로부터 나온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누구도 화가의 얼굴을 요청한 적은 없다(실제로 화가들은 그림을 연습하기 위해 자화상을 그렸지 팔기 위한 그림이 아니었다). 이 요청에 마리안은 거울을 보고 자신의 전신을 그린다. 이 그림의 주인은 엘로이즈이다. 스크린을 캔버스라고 했을 때, 우리는 거울 속 화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캔버스 위 주인공은 엘로이즈이다. <라스 메니나스>의 주인은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였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는 거울 속에 왕을 집어넣었다. 영화와 <라스 메니나스>의 두 그림의 주인은 교차되어 있다. 화가의 주체성과 그 그림의 주인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영화는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림을 다룬 영화답게 그림으로도 많은 것을 설명한다. 여성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성을 역사안에서 새롭게, 그림으로 풀어가며 남성위주로 쓰이던 여성 작품을 전복하고 있다. 이 작품이 성취한 미학적 해석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주), 씨나몬㈜홈초이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on Fire
감독
셀린 시아마
Celine Sciamma

 

출연
아델 에넬
Adele Haenel
노에미 메를랑Noemie Merlant
루아나 바야미Luana Bajrami
발레리아 골리노Valeria Golino
크리스텔 바라스Christel Baras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12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0.01.16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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