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스킨' 욕망이 설치는 판!
'디어스킨' 욕망이 설치는 판!
  • 오세준
  • 승인 2020.01.1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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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필자에게 가장 재밌었던 작품은 단연 '쿠엔티 듀피유' 감독의 <디어스킨>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작성한 <'디어스킨, 미치광이의 외투 사냥>(19.10.17)이라는 제목의 글은 '영화제 작품 리뷰' 성격상 빠른 시간 현장에서 본 그대로를 전달해야 했기에 작품의 줄거리와 큰 특징들만 나열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이 떠올랐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단계는 한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 그렇다. 이 글은 그의 첫 번째 방법을 거쳐 두 번째 단계에 이르는 행위에 대한 결과다.

<디어스킨>은 어떤 영화인가. '한 남자가 자신의 사슴가죽 자켓을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자켓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야기다.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도, 영화를 보지 않고 글을 먼저 읽는 독자도 분명 똑같이 황당해할 것이다. 전자는 영화를 보고 나왔지만, 다시 봐야 할 것 같은 의문을, 후자는 “그런 이야기가 영화가 될 리 없어”라는 의심을 할 테니. 이 영화의 모던함은 주인공이 사슴가죽을 집착하는 이유도, 심지어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77분이 오로지 한 남성의 목적(감독의 목적일지도)만을 향해 끝까지 치닫는다. 아이러니하게 급박한 전개가 아님에도 관객은 '왜'라는 의문보다는 '어떻게 더!?'라는 생각과 함께 주인공의 욕망 열차에 가볍게 탑승한다.

 

사진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사진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오로지 개인의 욕망을 위한 세계

왜일까. 이 질문은 두 가지 대답을 요구한다. 왜 주인공이 사슴가죽에 집착을 하는지, 관객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지. 재밌게도 영화는 이 같은 두 질문에 대답을 해 줄 의무를 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감독의 태연함에는 반대로 '어떻게 스크린에 이미지를 채워 넣어 갈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동시에 담겨있다. 그래서인지 조르주의 행동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자면 불현듯 '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가 떠오른다. 그의 모든 영화가 가진 원동력인 '몸짓', 즉 <디어스킨> 역시 관객의 반응에 따라 점점 고조되는 '어트랙션 시네마'로 느껴진다. 조르주가 사람을 속여 그들의 자켓을 빼앗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과정은 짧은 시간 관객에게 강력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스펙터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은 어트랙션 그 자체로 영화를 건재할 수 있는지 의심을 한 듯 보인다. '캠코더'와 '드니즈'의 존재가 그 이유다. 단편적으로 조르주는 드니즈에게 자신이 영화감독이라 속이고 그녀를 편집자로 고용하는 동시에 제작비를 빌미로 돈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또 계속에서 그녀를 속이기 위해서 자신이 타인의 자켓을 빼앗는 과정을 캠코더로 찍어 편집할 영상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조르주가 그럴듯한 영상을 찍기 위해 익스트림 롱샷, 셀프샷, 트레킹 샷, 롱 테이크 등 영화 촬영술을 익히는데, 그의 영상들이 마치 푸티지처럼 영화의 시퀀스로 구성되어 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조르주의 영상은 관객의 영화인 동시에 드니즈가 편집할 영상이다.

조르주의 엽기적인 행각이 찍힌 이 영상, 관객의 입장에선 시퀀스라 불릴 장면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실제 조르주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드네즈와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사실로 존재하지만, 이후 드네즈와 관객이 전혀 다른 반응을 도출시켜내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가 깔려있다. 이 상이함은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이다. 일종의 '거리두기'인데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세계가 이질적이면서 또 거부할 수 있거나 인식 불가능한 것이 아닌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규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르주의 영상은 영화 속 영화의 세계가 아닌 <디어스킨>이라 하는 '하나의 시네마'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디어스킨>은 오로지 한 개인의 욕망으로 채워진 세계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적어도 조르주가 한 남성으로부터 사슴가죽을 7,500유로를 구매하고 덤으로 캠코더를 받은 그 순간, 더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외딴 산간 마을 숙소에 들어가 풍경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캠코더로 찍는 순간부터. 쿠엔틴 듀피유 감독은 조르주라는 주체를 이용해 점진적으로 주인공의 욕망을 부풀려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영화를 완성하고 싶어하는 '드네즈'라는 존재를 통해 욕망의 크기는 배가 되고, '개인과 개인'이라는 교차하고 포개진 욕망의 세계가 펼쳐낸다. 점점 더 세게, 점점 더 빠르게.

 

영화 후반부에는 눈과 귀를 의심할 만한 장면이 하나 있다. 카메라가 의자에 걸린 자켓 넘어로 '조르주의 잠든 모습'을 잡는데, 그 순간 보이스오버로 "조르주"라고 외친다. '이 오버 숄더 숏'은 분명 이상하다. 마치 자켓이 자고 있는 조르주를 깨우는 듯 느껴진다. 사실 이 장면이 유독 이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조르주가 운전하는 동안 카메라는 그의 자켓 오른쪽 소매 단추를 카메라에 담기도 한다. 그의 자켓을 사물이 아닌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조르주가 1인 2역으로 자신과 자켓이 대화하는 장면은 처음에는 옷을 입은 상태에서 원맨쇼를 펼치다가 이후에는 자켓을 걸어놓고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는데, 이 부분에서 감독은 숏-리버스 숏을 통해서 정말로 조루즈와 자켓이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연출을 선보인다. 이런 장면들만으로도 관객인 우리는 자켓이 실제로 조르주를 조종했다고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진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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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소비하는 주체의 현상

사슴가죽을 7,500유로나 주고 구매한 조르주는 정작 자신이 머물 숙소를 결제할 돈이 없다. 돈 대신 금반지를 담보로 맡긴다. 다음날 어제 본 주인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카운터에 앉아 있다. 숙소비에 대한 청구를 조금 연장할 것을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그는 주인장이 어젯밤 자살했다고 한다. 애도하기 위해서 주인장의 신체가 보관된 방에 간 조르주는 자신의 자켓과 어울리는 사슴 모자를 훔치며, 그의 손가락에 꽉 낀 반지를 혀로 핥아 뺀 다음 다시 숙소비를 대신해 담보로 맡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식을 주워 먹고, 서점에 들어가 책도 훔친다. 그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의식주보다 사슴자켓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또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거나 시종일관 거울을 보는 조르주의 모습은 자기애적인 인물이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마치 자신 혹은 사슴가죽이 완벽한 존재라는 '환상'을 가진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 환상을 지켜내기 위한 혹은 환상을 현실 세계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비정상적인 욕망을 끊임없이 소비를 통해 구현한다. 영화를 되짚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슴가죽 자켓이 세상의 유일한 자켓으로 만들기 위해서'만' 돈을 소비한다. 처음에는 영화 촬영을 빌미로 사람들을 속였지만 급기야 돈이 떨어지자 사람을 죽여 자켓을 빼앗는다. 요즘말로 선을 넘는다.

꽤 재밌는 점은 그가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비단 끔찍하거나 구토를 유발하는 정도로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긴 재산 상속에 대한 갈등, 명품이나 한정판에 대한 지나친 소비 등 지금 당장 사회 뉴스를 보면 발견할 수 사건들은 분명 조르주의 행동과 닮았다. 현대사회에서 '무엇을 소비하는지'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만큼, 조르주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소비하는 행위, 이 운동성에는 소비의 시대인 오늘날 일반화된 상품의 논리가 숨어있으며 이것이 문화, 관계, 환상을 넘어 개인의 욕망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쯤에서 영화 제목이 <디어스킨>, 즉 사슴 가죽인 이유도 이것이 사물 그 자체가 아닌 소비 과정에 내재된 기호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르주는 자신이 구입한 사슴가죽이라는 기호 안에 내재할 뿐이다. 자신에 대한 시각의 부재(오로지 기호화된 사물을 응시하는 것)로 그의 모습은 오로지 사슴가죽을 입은 모습으로 받아들여질 뿐, 영화 속 거울은 단순히 쇼윈도에 불과할 뿐이다. 사슴가죽이라는 기호 안에 갇힌 남자 '조르주', 넓은 초원을 뛰어다니는 사슴처럼 마을 한복판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그의 몸짓'에서 더는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모습이 남아있지 않은 듯 다가온다.

[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사진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오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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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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