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NETFLIX), 새로 쓰이는 영화사
넷플릭스(NETFLIX), 새로 쓰이는 영화사
  • 배명현
  • 승인 2019.12.30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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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가 바꾸고 있는 '영화'에 대한 정의와 그에 따라 현재 우리의 영화는 어떻게 바뀌고 있을까"

2019년 넷플릭스는 놀랄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기묘한 이야기>, <킹덤>과 같은 시리즈로 대중성을 사로잡았다면 <버드박스>, <머더 미스터리>로 넷플릭스의 저력을 영화계에 보여주었다. 특히 <버드박스>와 같은 경우 영화계의 호평을 받으며 넷플릭스가 단순 재미위주의 영화만을 만든 오명을 지우기도 했다. 또 봉준호와 마틴 스코시즈와 같은 거장 감독들과 함께 하여 콘텐츠의 풍성함을 한껏 올리기도 하였다.

특히나 주목할 만한 성취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에 있다. 극장 개봉을 최소화하고 넷플릭스 안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시스템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 변화는 놀랍다. 기존 영화 팬과 소비자들의 인식을 바꾸는 역할을 하였다. 영화는 극장에서 본다는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고있다. 물론 영화계의 입장은 각자 다르다. 칸은 작년와 올해 모두 넷플릭스 영화를 불발시켰다. 가장 급진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동시에 정치적인 의도로 상을 주는 이곳에서 넷플릭스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시네마'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지금까지 정의되어있는 '영화'의 폼을 따르는 영화가 아닌 이상 영화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 선택은 후에 어떤 평가를 받게될까. 나는 이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다만 현재 영화라는 존재가 새로히 쓰여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2020을 앞두고 있는 시대에 영화라는 존재는 어떤 격변을 맞이하고 있는 걸까. 필자는 넷플릭스의 두 영화로 비교를 해보고자 한다. <두 교황>과 <더 킹:헨리 5세>으로 말이다.

 

<두 교황>은 영화를 어떻게 변화시키고있는가

영화란 무엇인가. 스토리를 영상화하기 위해, 초당 24프레임으로 사진을 촬영하여 우리를 눈속임하는 움직이는 사진 그 자체인가. 지칭된 것의 참된 정의를 알기 위해선 대상의 쓰임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수에게 영화는 즐거움의 수단이다. 가족을 한 공간에 모이게 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을 시작한 커플에게 어색한 침묵을 잠시 종식시키는 역할을 하기도한다. 영화광 혹은 시네필이라 불리는 이들을 제외한다면 영화는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 보단 수단에 가깝다.

그렇다. 영화는 재미를 주어야 한다. 이는 시네필에세도 교집합의 영역이다. 팝콘 무비일 수록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 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 덕분에 영화의 스펙터클을 더더욱 정교화되고 스케일은 더욱더 커져야 했다.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변모되었다. 누구도 이해하기 쉬운 수준의 스토리와 플롯. 어려운 메타포나 편집은 배제되었다. 헐리웃에서 만들어지는 프렌차이즈 영화를 생각해보자. 편수에 따라 영화는 더욱 커지고 빨라져 종국에는 괴물의 형태를 갖추게되는 영화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당장 트랜스포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긴 설명이 필요없어진다.

 

사진 ⓒ네이버
사진 ⓒ네이버

그렇다면 영화는 오로지 재미를 위한 '수단'인가. 카메라의 발명 이후 시네마토그라프의 탄생은 영화를 만들어냈고 이 영화는 120년이 넘는 시간동안 끝임없이 변화해왔다. 이 변화는 가히 급진적이었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흑백으로, 또 컬러로. 영화는 현실에 가까워지려 했다. 물론 기술 발전에 따른 형식과 장르의 다양화는 말할 것도 없다. 영화는 독자성을 가지게되었다. 덕분에 이전 시대가 예술이라 부르던 것들과 어쩌면 대등한 위치까지 따라오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영화는 예술인가. 이 질문에 1초 만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답을 외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생각해보지 않고 영화=예술이란 도식을 암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정해진 답을 미루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현재' 영화를 어떻게 대하고 있나. 극장에서 한 편당 돈을 주고 영화를 보기보단 넷플릭스를 더 찾고 있지는 않은가. 심지어 넷플릭스는 왓챠와는 다르게 고유 콘텐츠를 제작하며 몸집을 불리고 있다. 더욱이 디즈니와 아마존까지 스트리밍 시장에 손을 뻗고 있다. 영화는 탄생부터 자본의 손을 잡고 태어난 존재이다. 이 연결을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현재 영화는 기존의 정의로서는 정의하기 힘든 변화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넷플릭스가 고유 콘텐츠로 '종교'를 꺼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두 교황>은 명백하게 종교 콘텐츠이다. 지금까지 종교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대중영화의 '외곽'이었다. 수익과는 상관없이 멀티플렉스 개봉보다는 적은 상영관을 차지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종교를 가져왔다. 동시에 종교를 다루지 않는다. <두 교황>은 교리나 성경의 이야기를 영화화하지 않는다. 현재 바티칸이자 영적 지도자인 교황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다. 무교 혹은 무신론자도 충분히 영화로 즐길 수 있는 영화인 동시에 종교인을 포괄할 수 있는 콘텐츠이다.

이러한 넷플릭스의 경계 허물기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충실히 이행할 뿐 아니라 이전까지 없던 (혹은 부족했던) 종교적인 영화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 영화 하나만으로 거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새로이 변화하고 있는 '영화'라는 존재가 스트리밍시대에 어떤 국면을 맞이할지가 나는 궁금하다. 영화는 변화해왔다. 그리고 이전까지 존재하던 정의만으론 우리가 만날 영화를 판가름하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가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만큼 우리의 기준도 나아가야 한다. 마샬 맥루한이 예견한 '지구촌'과 미디어의 관계는 이제서야 시작된 것일지 모른다.

물론 이 직점에서 들뢰즈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보다 느리다. 칸 역시 그러하지 않았나. 작년 칸의 반사이익을 본건 단연 베니스 국제 영화제였다. 코언 형제와 알폰소 쿠아론 모두 넷플릭스의 영화였다. 그리고 칸은 올해도 넷플릭스를 거부했다. 칸이 바라보는 넷플릭스란 언제 변화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이 변화는 티핑포인트가될 것이다. 이미 변화하고 있지만 급변화를 만들어 낼 지점말이다. 그리고 이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되어가고있다.

 

넷플릭스의 한계는?

물론 넷플릭스가 긍정적인 변화만을 만들고 있지는 않다. 그 대표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는 <더 킹: 헨리 5세>일 것이다. 더 킹은 기대작이었고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IMDB나 로튼 토마토 성적으로 보아도 나쁘진 않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의문이 들었다. 이전 기사에서 적었듯이 (<넷플릭스 위에 세워진 더 킹:헨리 5세> 참조) 과연 넷플릭스를 통해 한 호흡에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위에서 말했듯이 영화에 대한 정의는 변한다. 하지만 이 지점은 정의가 아닌 형식의 변화를 예기한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영화의 발전과 역사에 따라 변해왔다. 초기 영화의 경우 5분에 지나지 않는 시간부터 영화궁전에서 상영한 <국가의 탄생>과 같이 3시간을 넘기는 영화까지. 이는 영화를 돈 주고 봄에 있어 사람들이 아깝지 않는 수준으로 유지해야 했다. 소비자들의 집중력와 소비에 있어 만족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의 만족. 두 가지가 이어져 완성된 시간이 현재의 120분과 90분이었다.

넷플릭스는 어떠한가. 영화관이 아니기에 어디에서나 끊어볼 수 있다. 때문에 영화가 매우길어질 수도 매우 짧아질 수도 있다. 더욱이 읽던 소설을 다시 읽듯 끊긴 지점에서 복기를 해야한다. 이 때문에 감독이 의도한 호흡에서 완전히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 <더 킹..>은 관객의 끊어 보기와 극장상영 둘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사진 ⓒ네이버
사진 ⓒ네이버

이 고민은 오히려 관객을 헷갈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영국인 혹은 헨리 5세에 관한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영화 초반을 무난히 이겨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는 너무 많은 정보가 빠르게 지나간다. 많은 넷플릭스 이용자들이 이 초반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 하차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여기서 일어난다. 넷플릭스는 관객의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콘텐츠로 넘어가도록 유도한다. 사용요금과 제한된 시간은 사용자들의 조급함을 극대화시킨다. 이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넷플릭스 영화는 이제 비디오 대여점을 무제한 이용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된다. 물론 과거 불법다운로드가 있었지만 넷플릭스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불법다운은 영화의 형식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음지의 소비자들은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넷플릭스 이용자들은 정당성을 가진다. 또한 기업 또한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추어 콘텐츠를 변형시킬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오리지널 콘텐츠는 점점 변화할 수밖에 없고 이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은 기존 영화와는 다른 형식에 익숙해 질 것이다. 극장에서 긴긴 시간동안 진득하게 보는 것이 영화가 아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확장해보자면 역설적으로 넷플릭스의 팝콘 무비는 이전의 영화를 답습한다. 새로움을 만드는 동시에 베껴오는 것이다. 관객이 가장 익숙한 편집과 연결을 그대로 가져온다. 새로운 영상 문법은 배제한다. <더 킹>의 전투 씬 또한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영화의 발전을 응원하고 긍정적 변화 또한 마지않는 사람이다. 넷플릭스의 행보는 이제 시작이다. 이 행보가 어떤 나비효과를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이 호기심에는 기대와 걱정이 함께 있다. 두 영화를 대표해서 2020의 출발점에서 글을 적어보았다. 앞으로 10년의 영화는 어떤 대격변을 맞이하게 될까 진심으로 궁금하다. 역사는 늘 사후적으로 적히고 미래는 예견을 비웃는다. 나의 글 또한 기우와 오판이 가득한 페이지로 남았으면 좋겠다. 영화의 앞날을 응원한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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