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리키' 겨우 인간
'미안해요, 리키' 겨우 인간
  • 배명현
  • 승인 2019.12.22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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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영화사 진진
사진 ⓒ 영화사 진진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뭘까.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해야 한다. 이 선문답에 어떤 답이 나올것인지는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의 형을 가지고 있다 해서 인간이 아니다. 최소한의 존엄함, 그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외의 사치가 필요하다. 그걸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게 되어버린다.

켄 로치는 인간에 대해 말한다. 존엄성이라는 거창한 것까지 가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겨우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에 대해 말한다. <미안해요, 리키>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는 인간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 그리고 그는 보여준다. 신자유주의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는 얼마나 끔찍한 상황에 몰려있는지에 대한 이야기한다.

<미안해요, 리키>의 시작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같다. 검은 화면에 두 사람의 대화나 놓인다. 켄 로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후 바뀌지 않은 세상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를 내려 한다. 같은 이야기의 변주이다. 그러나 더 끔찍하다. 그는 미래에 대한 희망 대신 어둠을 남겼다. 

리키는 성실한 노동자이다. 회사는 그와 계약한다. 개인 사업자인 그는 배송 업무를 한다. 가족을 사랑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 일주일에 6일을 일하며 하루에 14시간 노동한다. 직원이 아닌 개인사업자로서 수행한다. 때문에 직원으로서 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복지를 받을 수 없다. 노동시간은 자유가 되었다. 회사의 의무는 사라지고 책임은 개인 사업자들의 몫이 된다.

 언뜻 노동자의 편의를 봐주는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하는 ‘개인 사업’은 리키를 조여든다. 물론 고통 받는 사람은 리키뿐만이 아니다. 개인 사업자 전체이다. 하청과 아웃소싱으로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한 회사의 압제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노동자는 대체품이다. 개인의 사정 따위는 말 그대로 개인의 사정이다. 관용과 용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누군가의 가족이다. 리키는 노동자이면서 아버지인 동시에 남편이다. 휴식은 사라지고 스트레스만 남은 그에겐 여유가 없다. 거기에 더해지는 회사의 벌금과 벌점은 그를 촉박하게 만든다. 일을 해도 상황이 좋아지기는 커녕 더 나빠지는 이상한 노동을 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빛은 늘어나고 가족의 불화는 심각해진다. 그는 이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믿는 거라곤 아들은 공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더이상 가난을 물려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것을 믿는다.

그러나 이 믿음 또한 이상하다. 대학에 가서 남은 거라곤 수천 파운드의 빚뿐이라는 걸 친구를 통해 겪었다. 경험으로 얻은 이들에겐 미래란 그저 닫힌 하늘이다. 어른들의 희망은 이루지 못할 그 무엇이다. 더 이상 미래에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청년들은 하루하루를 유지하는 데 만족한다.

 

사진 ⓒ영화사 진진
사진 ⓒ영화사 진진

무자비한 사회의 무자비한 노동은 이 가족을 어떻게 만쳐놓았는가. 리키는 만성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 수 없다. 친절했던 애비는 망가졌다. 셉은 방황한다. 또래에 비해 성숙한 내면을 가진 리사는 사실 불안증과 불면증을 달고 산다. 영화 중간 무심하게 지나가는 노인과 다리 하나가 없는 개는 이 사회를 적나라하게 은유한다. 우리 주변 모두가 삐걱대는 걸음으로 살아간다. 노동자라면 누구도 이 삐걱임의 예외일 순 없다.

이들은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그리고 이들을 이렇게 만든 곳은 어떤 세상인가.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켄 로치는 다시 한번 질문한다. 이 영화는 기생충의 한 대사를 기억하게 한다. 부자니까 착한 거지. 부자는 착한가.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착하긴 힘들다. 부자가 착하기보다 가난한 사람이 착하기 더 힘들다.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가난한 사람은 이제 인간성마저 지키기 힘든 상황을 만들었다. 

이렇게 자본주의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라도 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정말 무서운 건 대안에 대해 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래서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한 대목은 섬뜩하기 까지 하다. 우리는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의 대안을 상상하는 것이 더 힘들다. 살아갈 수록 더 힘든 구덩이에 빠져드는 사회에서 우리가 잡을 최후의 줄 따위는 이제 정말 없는 것일까.

이 영화를 상영하는 도중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몇몇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운다고 달라질 건 없다는 한 시집의 제목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울음을 넘어야 한다. <나, 다니엘블레이크> 이후로 더 나빠진 세상에서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인간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여유가 필요한 이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잔인하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되기 위해선 죽도록 일하는 것만으로 힘들다. 운이 좋아야 한다. 겨우 인간이 된다. 그래서일까 켄 로치는 칸 영화제 상영 이후 울림이 깊은 한 마디를 남겼다. "When things are intolerable, we have to change them."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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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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