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후의 밤' 환상 속의 빛
'지구 최후의 밤' 환상 속의 빛
  • 배명현
  • 승인 2019.12.15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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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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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작위인 동시에 진실이다. 진실인 동시에 작위인 것, 그것이 기억이다. 진실에 기반하여 만들어졌지만 진실은 왜곡되고 변형된다. 물론 대부분의 기억은 주체의 선택으로 인한 왜곡이 아닌 불가항력적인 변화이다. 그러나 매우 드물게 선택에 의해 변형되는 기억도 있다. <지구 최후의 밤>은 이런 '왜곡시킨 기억'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상 '시'이다.

비 간 감독은 영화감독이기 전에 시인이었다. 그의 영화에는 직관적 비유와 은유가 넘친다.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개인 혹은 그가 속한 사회가 담은 맥락을 우아하게 풀어낸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해석'해 보려는 시도는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 어떤 시각으로 보아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움직이게 하는 '기억'의 코드를 잡고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일종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길은 시각으로 찾아야 하는 지도엔 나와있지 않다. 은유하자면 길은 기억이 남긴 향기를 따라 가야한다. 이 향기는 짙지 않다. 타인의 기억과 꿈이 남긴 은밀한 향을 따라가야한다. 다행히 비 간은 향기를 숨려하지 않았다. 스타일이라는 미명하에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자세히 감각하다보면 자연스레 목표지점에 이를 수 있도록 그는 영화를 잘 설계해두었다. 그럼에도 극장에서 나오며 그의 영화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것은 둘 중 하나라 생각된다. 어떻게 맡아야 할지 모른다는 것 혹은 비 간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두번째 인간상이다. 나는 시를 읽지 못한다. 시가 원하는 직관과 문학적 감수성이 없다. 시에 대한 재능이 없다. 그럼에도 비 간의 영상언어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그는 언어에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움직임을 영상에서 만들어낸다. 단순 미장센이나 미스터리 장르물이라서가 아니다. 관객을 추동시키는 힘을 2시간 동안 만들어낸다. 이 힘을 면밀히 감각하고 감각하면 왜곡된 길을 따라 찾을 수 있다.

여기저기 기억이 흩뿌려져 있다. 기억이 소재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장면 장면마다 느껴지는 오마주를 포함한다. 화면 전체에 흐르는 어둠이나 물만 보아도 타르코프스키를 직감하게 한다. 심지어 영화의 컷 연결도 타르코프스키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타르코프스기가 '종교'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의 움직임을 만들려 했다면 비간은 기억을 기반으로 한, 찰나의 잔상을 잡아 움직임을 만들려 한것 아닌가 예상한다.

찰나의 잔상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아마도 기억을 담고있는 물체로서 현현될 것이다. 무형의 기억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물체. <지구 최후의 밤>에선 사진으로 연결될 것이다. 주인공의 어머니 사진말이다. 그러나 잠시 멈춰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자.  정말 그건 어머니의 사진일까. 우리는 얼굴에 구멍이 뚫린 사진밖에 보지 못했다. 주인공은 얼굴을 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관객은 그 사진 속 주인공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주인공의 말을 온전하게 믿어야 하는가. 너무 쉽게 우리는 그의 말을 믿었던 건 아닐까. 영화 속 여자들이 말하는 것 처럼 '너무 뻔한 수'에 우리는 말려들고 있는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가 '어머니'를 직접 경험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있지 않다. 

오히려 그가 만든 망상 혹은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우리를 속이려는 건 아닐지 가정해보자. 전자는 쉽다. 누구라도 프로이트와 라캉을 가지고 엮어낼 수 있다. 심지어 이 영화가 꿈에 관한 은유를 메타포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노골적이다. 작품을 정신분석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이미 많다.  그렇다면 후자로 살펴보자.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믿어보는 것이다. 그가 자의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지만(기억은 자의만으로 바꿀 수는 없기에) 그가 그러한 기억을 가지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지점에서(앞서 말한 의지로 기억을 바꾸려는 시도가 성공했다는 하에)살펴보는 것이다.

 

 사진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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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기억은 거의 환상에 가깝다. 아름다운 어머니상.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우리는 볼 수 없다. 게다가 만나는 여자마다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한다. 실체 없기에 아무나 대입할 수 있다. 요컨대 빈 칸에 누구의 얼굴도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더해 그 공허의 공간엔 허기가 있다. 뤄홍우는 사과를 먹는다. 하지만 늘 먹는 건 아니고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릴 때만 먹는다. 굳이 사과를 다 먹는 장면을 집어넣는 씬은 감독이 가진 일종의 강박 혹은 집착에 가까운 전달이다. 다만 이 전달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가 중요하다. 어머니의 기억은 원초적인 배고픔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거짓말의 근원적 공허를 배부름으로 채우려는 갈망인가. 앞서 이야기 한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후자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동시에 문제는 후반 롱테이크 씬(?)일 것이다. 씬인지 시퀀스인지 아님 쇼트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한 길이를 자랑하는 장면은 말 그대로 문제이다. 지하에서 소년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다. 여자를 만난다. 홍상수 영화의 대화처럼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나눈다. 하늘을 난다. 여자는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한다. 폭죽이 타오른다.   마지막 폭죽은 <인셉션>의 결말을 떠오르게 한다. 이 곳은 꿈인가 현실인가. 혹은 망상 속 어느 한 부분인가. 물론 현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만들어 내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은 편집이다. 거꾸로 말해 롱테이크는 '현실'의 시간과 영화 내의 시간을 동일하게 만드는 형식이다. 왜 감독은 현실이 아닌 것을 찍으며 현실의 시간을 동일하게 유지하려는 것인가.

이 영화 자체가 그 구분 짓기의 경계를 허물기 때문이다. 비 간은 영화 안에 허구를 넣음으로써 기억이란 진실이 아니다라는 진실을 전달한다. 허구를 말해야만 전달되는 진실. 역설적이면서 동시에 진실을 담은 영화. 하늘을 난다고 하지만 두 인물은 태연하게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 곳은 가상의 공간이다. 논리가 필요하지 않다. 직관이 허용된다. 직관의 허용은 시적이다. 논리 대신 감각과 감성의 진실을 통용케 한다. '허구를 말해야만 전달되는 진실'은 그렇기에 허락된다.

이 지점은 이전의 영상 시인이었던 타르코프스키, 빔 벰더슨과 차별되는 비 간만의 특별한 지점이다. 그렇기에 그가 칸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수상한 건 전혀 놀랍지 않다. 비 간은 이후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까. <지구 최후의 밤>은 그의 이후를 상상하게 한다. 그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남았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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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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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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