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처연하게 풀어낸 낙망의 빛: 밖에서 안으로 (후편)
<코끼리는...> 처연하게 풀어낸 낙망의 빛: 밖에서 안으로 (후편)
  • 오세준
  • 승인 2019.12.0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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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An Elephant Sitting Still, 중국, 2018, 234분)
감독 '후 보'(Hu Bo)

처연하게 풀어낸 낙망의 빛: 밖에서 안으로 (전편)에서 계속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무릇 지금까지 긴 호흡으로 필자의 글을 따라온 독자인 당신이 '이 영화는 단순히 황폐한 땅을 234분 동안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결코 아니다'라는 의아감을 느낄 답을 주고 싶다. <전편>이 외부에 존재하는 텍스트를 끌어와 영화를 이야기한 식이었다면, <후편> 영화가 가진 기질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작품이 미학적으로든, 또 스토리텔링의 방식에서든 '후 보' 감독이 어떻게 온전히 자신의 것을 만들어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진핑의 중국몽에서 깨어나기 위한 것이 단순히 '코끼리의 울음소리'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부딪치고 굴절되는 공들

이 영화가 일종의 핀볼처럼 다가오는 것은 탈출할 수 없는 국가(게임의 판)라는 시스템 안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배회해야 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마치 벽과 장애물에 치이는 '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234분 동안 어느 한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끊임없이 도시 안을 떠돌아다닌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집에서 출발하는 동시에 집을 잃어버린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관성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태도는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보여진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기저에 깔린 우울감은 분명 '죽음'을 전이시킬 만큼 강력하게 작용한다. 친구의 투신자살(위청), 애지중지한 개의 죽음(왕진), 위솨이의 죽음과 리카이가 쏜 총에 죽음 위청과 이어 그의 자살까지(웨이부). 연속되는 죽음은 서로가 회복하고 결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하며, 결과적으로 죽음을 목도하는 주인공들이 '행위의 결과'를 미처 받아들이기도 전에 피해버린다는 것이다. (왕진의 경우, 자신의 개를 죽인 대형견의 주인에게 가서 따지려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통보에 불과하며, 반대로 자신을 내쫓는 자식들에게 무기력한 모습은 그 상황 자체를 이해하기보다는 피하려는 것에 가깝다)

부리나케 도망치는 인물들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씁쓸하고 처량할 뿐 '악행'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감독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를 교묘히 바꾸는데, 이를테면 웨이부의 경우 학교폭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왕진의 경우 대형견의 주인이 되려 잃어버린 자신의 개를 어떻게 했냐고 되묻고, 황링의 경우 부주임과 그의 아내가 그녀의 집에 찾아와 황링의 엄마에게 욕을 한다. 감독은 누군가의 죽음과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과 같은,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책임을 회피하도록 짜놓는다. 이들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고, 그 상황 안에서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후 부 감독의 미학은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에 필수적인 인내심을 내포하도록 그려졌다는 것이다. 관객의 위치에서 그들을 회피할 수 없는 곳에 카메라를 위치하여 희망을 찾아보기 힘든 절망의 세계를 웅장하게 파고든다. 다시 말하면 <코끼리는>이 품고 있는 리얼리즘은 인물을 놓치지 않고 따라붙는 강박적인 카메라가 가진 강력한 힘으로 발현된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 학교에 위치한 웨이부를 담는 장면은 10분 정도의 롱테이크이다. (적어도 필자의 기억에서)

네 명의 주인공들이 도시를 배회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불안정함'을 지속하기 위한 비결정적인 카메라워킹으로, 명확하게 짜인 것이 아닌, 어쩌면 카메라가 담고자 하는 것은 '인물들의 움직임에 반응'을 포착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로 다가온다. 대화를 나누거나 인물의 어깨 넘어 무언가 일어나는 상황의 경우, 보이스오버나 대사를 통해서 카메라가 일방적으로 배제하거나 아웃포커스된 상황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인물 자체를 프레임 안에 가두어 두는 동시에 관객의 입장에서 화면에 고정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웨이부&왕칭
웨이부&위청, 사진 ⓒ 아이 엠(eye m)

후 보 감독의 이러한 카메라 연출은 현실의 진실을 보존하기 위한 행위이며 허구의 스토리텔링 속에 관객을 묶어둠으로써 폐쇄적인 상태를 구현한다. 즉, 감독은 리얼리즘의 본질에 기반하여 계속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가 무엇과 대립하고 은폐하려는지 묻고자 한다. 관객인 우리는 고전적인 숏-리버스숏 패턴에서 벗어나 이 감독이 쫓는 인물들을 줄기차게 따라가며, 그 안에서 그들이 겪는 상황을 똑같이 경험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동정심을 부여하도록 영화가 작동하는 셈이다.

잊지 말자. 이 리얼리티 역시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판을 흔들기 위한 요소라는 것을. 네 명의 주인공은 '부딪힘'과 '굴절'이라는 핀볼 속 공의 움직임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일종의 이것은 에너지의 발산과도 같다. 먼저 위청은 자신의 동생을 죽인 웨이부를 쫓아 그를 마주하지만, 그의 분노는 웨이부가 아닌 죽은 친구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사실을 고백한다. 여기서 웨이부의 만남은 단순히 방아쇠에 불과하다. 이전에 자신의 연인을 만나 "네가 날 거부해서 그 집에 간 거고, 그래서 뛰어 내린 거야"라고 말하며 스스로 면책한다. 그동안 자신은 진정으로 원했지만, 계속해서 거부해온 상대와 끝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즉, 웨이부와 위청의 만남은 우발적으로 벌어진 죽음으로 전자는 학교와 부모를 피해 도망치는 신세를, 후자는 사랑하는 인연과 완벽한 끝을 가지는 같은 경험을 한 존재들의 '부딪힘'이다. 이것으로 웨이부는 만저우리로 가는 추진력을, 위청은 친구의 죽음을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황링, 사진 ⓒ 아이 엠(eye m)
황링, 사진 ⓒ 아이 엠(eye m)

이와 반대로 '굴절'을 보여주는 왕진과 황링. 두 사람은 좀 더 명확히 이야기하면 집을 잃은 존재가 아닌 돌아갈 곳이 있지만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다. 왕진은 양로원이, 황링은 엄마가 있는 집이, 필자가 두 사람에게 굴절이라는 움직임을 느낀 것은, 그들이 각각 가고 싶지 않은 공간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으로 들어가 자의적으로 튕겨 나왔기 때문이다. 왕진은 자식들의 지속적인 요구에 반박하지 않고 자신의 발로 직접 집을 나와 양로원을 들어간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을 가득한 그곳, 그는 버틸 수 없었는지 다시 밖으로 나와 만저우리로 향하는 기차역을 향한다. 이와 다르게 황링은 격정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부주임과 그의 아내가 자신의 집을 찾아 엄마와 몸싸움을 하는 사이 창문으로 몰래 빠져나간 그녀는 갑자기 아파트 입구에 위치한 야구방망이를 들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부주임과 그의 아내를 흠씬 두들겨 팬다. 그리고 역시 그녀 또한 기차역으로 향한다.

 

"후 부 감독의 치밀함이 감탄스러운 것은 불규칙적으로 느껴지는 이들의 이야기에 공이 더욱더 크게 튕기도록 '반작용하는 힘'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객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위청-웨이부-왕진-황링 순으로 각각의 인물들이 부딪히고 굴절되기 위한 시퀀스를 배열한다. 즉, 이 시퀀스는 네 사람이 자신들의 이야기의 절정에 위치하며, 순차적으로 터뜨려지는 인물들의 감정은 관객 혼자가 오롯이 받아들이기 버거울 정도다. <코끼리는>이 전달하는 긴장감은 이처럼 신인 감독이라 믿기 어려운 노련하고 정교한 플롯의 배치에 숨어있다."

 

왕진, 사진 ⓒ 아이 엠(eye m)

허허벌판에 울려 퍼지는 코끼리의 울음소리. 앞에서 언급했듯 이 영화 속에는 코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그곳으로 갔다는 점에 필자는 분명한 성취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230분 동안 도시 안에서 그들이 보여준 움직임. 그것이 축적되어 전달하는 감정적인 파동, 적어도 네 사람의 모든 궤적을 따라온 관객은 느껴질 것이다. 분명 코끼리의 울음소리와 맞물려 전달되어지는 미세한 떨림을. 필자의 이러한 탐구는 결과적으로 <코끼리는>은 '어디로 향하는가'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것은 분명 판을 흔들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꿈'(중국몽)에서 깨어나기 위함이다.

'만저우리'라는 중국 북쪽 경계에 도달했음에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코끼리를 찾는 것뿐. 이 지독한 결말은 후 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헛것'의 매료되어선 안 되는 경고가 아닐까. 희망이라는 것을 표방한 것. 두 눈앞에서 벌어진 '누군가의 죽음',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능동적이라고 느껴질 때는 오직 그 상황을 피하고자 달려가는 다급함과 분주함을 보여줄 때이다. 관성적이고 여느 도시의 인물들과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삶은 '우발적인 무언가'로 그렇게 잠시 들썩였을 뿐. 그리고 그렇게 뒤흔들어졌을 때야 '무언가' 보고 싶다는 의지가 생긴다는 것을.

 

사진 ⓒ IMDb
<지구 최후의 밤>, 사진 ⓒ IMDb
사진 ⓒ IMDb
<지구 최후의 밤>, 사진 ⓒ IMDb

비간 감독이 연출한 <지구 최후의 밤>의 첫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 여자만 나타나면 또 꿈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라며, 시체처럼 침대 위에 널브러져 꿈에서 깨어나는 뤄홍우의 모습. 그리고 이어 그와 함께한 여자가 말한다, "계속 잠꼬대한 거 알아요?". 뤄홍우도, 더불어 <코끼리는>에 등장하는 네 인물도 모두 잠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꿈속인 듯 관성적인 모습이다. 다시 찾아오는 밤 안에서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쫓고, 또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울음소리를 찾아 듣는다. 필자는 이들의 밤이 최후의 밤이 아님을 믿고 싶다. 기어코 판을 흔들어서라도.

우울함이 자욱한 안개 틈 사이를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코끼리는>은 29세 나이로 세상을 뜬 후 부 감독의 유일한 영화이다. 매혹적인 이미지에 이끌려 스크린 안으로 들어갈 듯한 흡입력을 가지지만, 그 안에 가득 찬 허무함은 한 번에 삼켜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독하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기질은 오직 이 작품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남겨졌다. 단, 한편의 영화가 그의 유일한 작품이기에.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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