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처연하게 풀어낸 낙망의 빛
[Critique] 처연하게 풀어낸 낙망의 빛
  • 오세준
  • 승인 2019.12.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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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안으로, 불규칙적으로 꺾이는 빛"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단언컨대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이하 코끼리는)는 분명 올해 발견한 뛰어난 걸작(傑作)이다. 안타까움도 동시에 느껴졌는데, 개인적인 일이지만 작년에 열린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프론트라인)에서 '긴 상영시간(234분)에 겁을 먹지 말아야 했었구나'하는 후회와 29년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한 후보 감독에 대한 슬픔이다. 공교롭게도 영화를 좀 더 일찍보지 못한 내 야속함은 더는 감독의 작품을 볼 수 없는 사실과 묘하게 맞닥뜨린다. '그의 자살'이 자신을 증명하는 한 편의 영화에 대한 방증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코끼리는>이 풍기는 부조리의 냄새는 적어도 이 작품만이 가지는 고유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필자의 기준에서 올해 영화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대부분의 중국 출신 감독들의 작품에서 비슷한 냄새를 느꼈다. 우린 펑 감독의 <내일부터 나는>(From Tomorrow On, I will), 레이레이 감독의 <숨 가쁜 동물들>(Breathless Animals), 주셩저 감독의 <프레젠트, 퍼펙트.>(Present.Perfect), 양이슈 감독의 <갈대, 우거지다>(Luch Reees) 어쩌면 오로지 주인공 '뤄홍우'(황각)의 독백으로 과거와 현재 사이를 긴 시간 따라가야 하는 비간 감독의 <지구 최후의 밤>까지.

많은 영화감독들이 자국의 우울한 사회를 그려내는 것은 보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국 사회'의 경우는 조금은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신기하게도!? 위에 나열된 감독들의 주인공들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병'에 걸린 듯 다분한 우울감을 가진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는 카프카의 단편소설 <법 앞에서>에 등장하는 '문'처럼 열려있지만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빠져나갈 수 없는), '억압'이 작동하는 곳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들이 왜 빠져나갈 수 없는지 모르는, 또 자신이 갇혀있다고 자각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감독이 만들어 놓은 다양한 공간 안에 억류된 존재일지도.

 

<프레젠트.퍼펙트.>, 사진 ⓒ 전주국제영화제
<갈대, 우거지다>, 사진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내일부터 나는>, 사진 ⓒ 전주국제영화제

시진핑의 '중국몽', 그 안에서 펼쳐지는 '핀볼'

부재에서 뜻하듯 <코끼리는>에 대한 필자의 글은 영화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리고 영화 밖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현재 중국 국가 주석인 '시진핑'이 펼치는 '중국몽'에 대한 부분이다. 2012년 11월 29일 시진핑은 부흥의 길을 참관해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고, 중화민국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실현시키기 위해 강력하게 싸워나가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중국몽은, 사회주의 중국의 건설을 목표로 한 마우쩌둥, 경제발전을 목표로 한 덩샤오핑 그리고 시진핑에 이르러서 새로운 글로벌 강대국 중국의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시진핑의 목표는 '사회주의 현대화'(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통해 선진국 수준까지 국가적 능력 인민의 삶의 질을 현대적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선도적인 강대국'(미국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력'과 '하나 된 인민'이라는 두 가지 핵심 키워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즉, 국가적 힘과 인민의 결속 없이 중국몽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굉장히 국가주의, 전체주의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뜸금없이 국제정치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좀 더 입체적으로 느끼기 위한 하나의 방법 정도로 생각하길 바란다.

'시진핑의 중국몽'을 영화 안으로 가져오면 이것은 '하나의 판'이다. 게임이 시작된 것. 국가의 승리만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야망은 흥미롭게도 인민의 결속이 아닌 '개인을 국가 안에 가두어 두는 형태'를 만들어 낸다. 적어도 영화의 공간은 그러하다. 혼동하지 말자. 어떤 리얼리즘 영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감독의 카메라가 담아낸 허구의 세계임을. 그렇기에 필자는 '후 보' 감독에게 묻고 싶다. 그의 세계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구축되어 졌는지.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에게 대답을 들을 리 만무하겠지만.

그의 4시간에 달하는 <코끼리는>은 분리된 네 가지 이야기를 엮는 다중 플롯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친구의 부인과 불륜을 벌이다 이를 알게 된 친구가 눈앞에서 투신자살하는 상황을 목격하는 동네 조직폭력배 '위청'(장위), 단짝 친구 리카이를 핸드폰 도둑으로 몰며 겁박하는 동급생 위솨이와 다툼을 벌이다 계단으로 밀쳐 중퇴에 빠뜨리는 '웨이부(평유창), 자신들의 딸을 편안하게 키우기 위해 자식들로부터 버려져 양로원으로 가게 된 '왕진'(리총시), 마지막으로 유부남 부주임 교사와 은밀하게 교제를 나누고 있는 '황링'(왕위원)까지, 총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렇듯 청소년, 청년, 노년 등 각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상황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사진 ⓒ
'황링&웨이부', 사진 ⓒ 아이 엠(eye m)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같은 공간 안에 사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웨이부와 왕진은 같은 아파트 주민이며, 웨이부와 황링은 서로 사귀는 관계이고, 웨이부가 밀친 위솨이의 형은 '위청'이다. 텍스트로 느껴지기에 이들의 관계가 무척 복잡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느껴지지만, 오히려 영화는 어떤 한 인물의 분량이 더 많거나 적지 않은 '균형'을 이룬다. 이 부분에서 사실 감독의 뛰어난 재량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영화 속 네명의 인물들은 각각 나름의 사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 '다르지만 같은 것'이라 느껴질 만한 사연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네 명의 주인공이 공유하고 회복하는 방식이 아닌 '모자이크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제시한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즉, 관객의 입장에서 감독이 일률적으로 짜놓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사정이라 할 것이 '동종의 것'이라 느껴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 속 네 명의 인물들은 그들을 이해하려하거나 그렇다고 거부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운명의 열차라도 함께 탄 듯 우연에 이끌려 함 갈 뿐이다. 그들을 모두 끌어안는 것은 그들을 끝까지 응시해야 하는 관객의 자리에서 가능할 뿐.

후 보 감독은 자신의 소설을 원안으로 하여 <코끼리는>을 완성했다. 이 사실은 이 영화가 정교하고 치밀한 스토리텔링을 가졌는지 증명한다. 위청('친구의 집'에서 불륜 중)을 제외하고, 웨이부, 왕진, 황링이 각각 자신들의 집에서 시작해 아파트, 학교, 거리, 양로원, 당구장, 병원, 기차역 등을 경유해 만저우리까지 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네 인물의 경로는 분명 영화 중반까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만, '웨이부'의 사건을 시발점으로 서로가 교차하고 마주하는 관계를 그려 나아간다.

감독이 펼치는 서사는 영화 초반 왕청이 언급하는 '만저우리에 사는 신비로운 코끼리'에 매료되어 그곳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결심이 영화의 표층 위에 자리잡혀 있지만, 실상은 '그들이 사는 동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지독하게 발버둥 치고 있다는 것을 스크린을 통해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만저우리'는 중국의 북쪽, 중러 국경선에 위치한 곳이다. 영화의 마지막 컴컴한 어둠이 짙게 깔린 어딘가에 내린 그들은 과연 코끼리를 마주했을까. 감독이 만든 신화적인 코끼리는 결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울부짖는 코끼리 울음소리만 울려 퍼질 뿐.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필자는 이 울음소리가 결코 '최소한의 희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진핑이 짜놓은 '중국몽'으로부터 깨어내기 위한 장치이다. 약속에 땅에 찾아온 그들에게 코끼리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되려 칠흑 같은 어둠에 잠식 당한 채 그곳이 어디인지, 정말 만저우리가 맞는 건지, 감독은 왜 이 장면을 익스트림 롱샷으로 관객과 긴 거리감을 자아낸 건지, 헛소리라도 들린 듯한 코끼리의 울음소리는 희망이 아닌 지독한 현실에 늪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욕망이 자아낸 망상과도 같은 소리이다.

왕링과 교재 중인 부주임은 왕진에게 학교가 곧 철거된다고 말한다. 이어 "그럼 우린 어떻게 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너희들? '가야 될 곳'으로 가겠지"라며, "나는 사무실도 아주 큰 새 학교에 갈 것이고, 너희들은 가장 낙후된 고등학교로 가겠지. 절반 정도는 졸업 후 시장에서 꼬치구이나 팔고 있을 테고"라고 답한다. 빛 한점 없는 교무실에서 그늘로 뒤덮은 왕진의 얼굴, 학교라는 체제 안에 지도자인 교사의 이 말은 국가의 지도자의 권위가 하위 지도자로 이어지는 이념, 이 국가가 가지는 비정상적인 위계질서이다.

자식들이 자신들의 자식을 위해서 부모를 버리는 행위, 파탄 난 자신의 가족의 관계를 보상받으려는 듯 자신의 교사이면서 유부남과 교제를 하거나 자신의 애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친구의 애인을 만나는 등 비정상적인 관계들로 채워진 이 영화는 이들에게 빠져나갈 구멍, 숨조차 쉬지 못하도록 도시에 가둬두면서 밀실공포적인 억압을 강행한다. 그들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하지만, 그들이 보내는 하루를 통해서 이윽고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같은 꿈과 같은 현실에서 깨어날 수 없는 현실을 명징한다.

중화민국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실현이라는 시진핑 국가 주석의 욕망은 인민의 삶의 질을 현대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 말하지만, 후 보가 설계한 <코끼리는>이 보여주는 국가의 모습은 황량하기 짝이 없고, 지속적으로 버림받아지는 것이 자신들의 운명임을 자각한 인물들이 살고 있다. 새 학교의 건설이 지도자만을 위한 곳에서 힘없고 어렵게 사는 피지배층을 수호하는 세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코끼리의 울음소리는 지도자의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피지배층을 향한 경고이다. 지도자가 약속한 땅은 결코 이 땅에 존재하지 않기에.

 

부딪치고 굴절되는 공들

무릇 지금까지 긴 호흡으로 필자의 글을 따라온 독자인 당신이 '이 영화는 단순히 황폐한 땅을 234분 동안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결코 아니다'라는 의아감을 느낄 답을 주고 싶다. <전편>이 외부에 존재하는 텍스트를 끌어와 영화를 이야기한 식이었다면, <후편> 영화가 가진 기질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작품이 미학적으로든, 또 스토리텔링의 방식에서든 '후 보' 감독이 어떻게 온전히 자신의 것을 만들어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진핑의 중국몽에서 깨어나기 위한 것이 단순히 '코끼리의 울음소리'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이 영화가 일종의 핀볼처럼 다가오는 것은 탈출할 수 없는 국가(게임의 판)라는 시스템 안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배회해야 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마치 벽과 장애물에 치이는 '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234분 동안 어느 한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끊임없이 도시 안을 떠돌아다닌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집에서 출발하는 동시에 집을 잃어버린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관성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태도는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보여진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기저에 깔린 우울감은 분명 '죽음'을 전이시킬 만큼 강력하게 작용한다. 친구의 투신자살(위청), 애지중지한 개의 죽음(왕진), 위솨이의 죽음과 리카이가 쏜 총에 죽음 위청과 이어 그의 자살까지(웨이부). 연속되는 죽음은 서로가 회복하고 결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하며, 결과적으로 죽음을 목도하는 주인공들이 '행위의 결과'를 미처 받아들이기도 전에 피해버린다는 것이다. (왕진의 경우, 자신의 개를 죽인 대형견의 주인에게 가서 따지려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통보에 불과하며, 반대로 자신을 내쫓는 자식들에게 무기력한 모습은 그 상황 자체를 이해하기보다는 피하려는 것에 가깝다)

부리나케 도망치는 인물들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씁쓸하고 처량할 뿐 '악행'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감독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를 교묘히 바꾸는데, 이를테면 웨이부의 경우 학교폭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왕진의 경우 대형견의 주인이 되려 잃어버린 자신의 개를 어떻게 했냐고 되묻고, 황링의 경우 부주임과 그의 아내가 그녀의 집에 찾아와 황링의 엄마에게 욕을 한다. 감독은 누군가의 죽음과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과 같은,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책임을 회피하도록 짜놓는다. 이들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고, 그 상황 안에서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후 부 감독의 미학은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에 필수적인 인내심을 내포하도록 그려졌다는 것이다. 관객의 위치에서 그들을 회피할 수 없는 곳에 카메라를 위치하여 희망을 찾아보기 힘든 절망의 세계를 웅장하게 파고든다. 다시 말하면 <코끼리는>이 품고 있는 리얼리즘은 인물을 놓치지 않고 따라붙는 강박적인 카메라가 가진 강력한 힘으로 발현된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 학교에 위치한 웨이부를 담는 장면은 10분 정도의 롱테이크이다. (적어도 필자의 기억에서)

네 명의 주인공들이 도시를 배회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불안정함'을 지속하기 위한 비결정적인 카메라워킹으로, 명확하게 짜인 것이 아닌, 어쩌면 카메라가 담고자 하는 것은 '인물들의 움직임에 반응'을 포착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로 다가온다. 대화를 나누거나 인물의 어깨 넘어 무언가 일어나는 상황의 경우, 보이스오버나 대사를 통해서 카메라가 일방적으로 배제하거나 아웃포커스된 상황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인물 자체를 프레임 안에 가두어 두는 동시에 관객의 입장에서 화면에 고정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후 보 감독의 이러한 카메라 연출은 현실의 진실을 보존하기 위한 행위이며 허구의 스토리텔링 속에 관객을 묶어둠으로써 폐쇄적인 상태를 구현한다. 즉, 감독은 리얼리즘의 본질에 기반하여 계속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가 무엇과 대립하고 은폐하려는지 묻고자 한다. 관객인 우리는 고전적인 숏-리버스숏 패턴에서 벗어나 이 감독이 쫓는 인물들을 줄기차게 따라가며, 그 안에서 그들이 겪는 상황을 똑같이 경험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동정심을 부여하도록 영화가 작동하는 셈이다.

잊지 말자. 이 리얼리티 역시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판을 흔들기 위한 요소라는 것을. 네 명의 주인공은 '부딪힘'과 '굴절'이라는 핀볼 속 공의 움직임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일종의 이것은 에너지의 발산과도 같다. 먼저 위청은 자신의 동생을 죽인 웨이부를 쫓아 그를 마주하지만, 그의 분노는 웨이부가 아닌 죽은 친구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사실을 고백한다. 여기서 웨이부의 만남은 단순히 방아쇠에 불과하다. 이전에 자신의 연인을 만나 "네가 날 거부해서 그 집에 간 거고, 그래서 뛰어 내린 거야"라고 말하며 스스로 면책한다. 그동안 자신은 진정으로 원했지만, 계속해서 거부해온 상대와 끝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즉, 웨이부와 위청의 만남은 우발적으로 벌어진 죽음으로 전자는 학교와 부모를 피해 도망치는 신세를, 후자는 사랑하는 인연과 완벽한 끝을 가지는 같은 경험을 한 존재들의 '부딪힘'이다. 이것으로 웨이부는 만저우리로 가는 추진력을, 위청은 친구의 죽음을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와 반대로 '굴절'을 보여주는 왕진과 황링. 두 사람은 좀 더 명확히 이야기하면 집을 잃은 존재가 아닌 돌아갈 곳이 있지만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다. 왕진은 양로원이, 황링은 엄마가 있는 집이, 필자가 두 사람에게 굴절이라는 움직임을 느낀 것은, 그들이 각각 가고 싶지 않은 공간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으로 들어가 자의적으로 튕겨 나왔기 때문이다. 왕진은 자식들의 지속적인 요구에 반박하지 않고 자신의 발로 직접 집을 나와 양로원을 들어간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을 가득한 그곳, 그는 버틸 수 없었는지 다시 밖으로 나와 만저우리로 향하는 기차역을 향한다. 이와 다르게 황링은 격정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부주임과 그의 아내가 자신의 집을 찾아 엄마와 몸싸움을 하는 사이 창문으로 몰래 빠져나간 그녀는 갑자기 아파트 입구에 위치한 야구방망이를 들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부주임과 그의 아내를 흠씬 두들겨 팬다. 그리고 역시 그녀 또한 기차역으로 향한다.

후 부 감독의 치밀함이 감탄스러운 것은 불규칙적으로 느껴지는 이들의 이야기에 공이 더욱더 크게 튕기도록 '반작용하는 힘'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객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위청-웨이부-왕진-황링 순으로 각각의 인물들이 부딪히고 굴절되기 위한 시퀀스를 배열한다. 즉, 이 시퀀스는 네 사람이 자신들의 이야기의 절정에 위치하며, 순차적으로 터뜨려지는 인물들의 감정은 관객 혼자가 오롯이 받아들이기 버거울 정도다. <코끼리는>이 전달하는 긴장감은 이처럼 신인 감독이라 믿기 어려운 노련하고 정교한 플롯의 배치에 숨어있다.

허허벌판에 울려 퍼지는 코끼리의 울음소리. 앞에서 언급했듯 이 영화 속에는 코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그곳으로 갔다는 점에 필자는 분명한 성취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230분 동안 도시 안에서 그들이 보여준 움직임. 그것이 축적되어 전달하는 감정적인 파동, 적어도 네 사람의 모든 궤적을 따라온 관객은 느껴질 것이다. 분명 코끼리의 울음소리와 맞물려 전달되어지는 미세한 떨림을. 필자의 이러한 탐구는 결과적으로 <코끼리는>은 '어디로 향하는가'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것은 분명 판을 흔들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꿈'(중국몽)에서 깨어나기 위함이다.

'만저우리'라는 중국 북쪽 경계에 도달했음에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코끼리를 찾는 것뿐. 이 지독한 결말은 후 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헛것'의 매료되어선 안 되는 경고가 아닐까. 희망이라는 것을 표방한 것. 두 눈앞에서 벌어진 '누군가의 죽음',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능동적이라고 느껴질 때는 오직 그 상황을 피하고자 달려가는 다급함과 분주함을 보여줄 때이다. 관성적이고 여느 도시의 인물들과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삶은 '우발적인 무언가'로 그렇게 잠시 들썩였을 뿐. 그리고 그렇게 뒤흔들어졌을 때야 '무언가' 보고 싶다는 의지가 생긴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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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최후의 밤> 사진 ⓒ IMDb

비간 감독이 연출한 <지구 최후의 밤>의 첫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 여자만 나타나면 또 꿈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라며, 시체처럼 침대 위에 널브러져 꿈에서 깨어나는 뤄홍우의 모습. 그리고 이어 그와 함께한 여자가 말한다, "계속 잠꼬대한 거 알아요?". 뤄홍우도, 더불어 <코끼리는>에 등장하는 네 인물도 모두 잠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꿈속인 듯 관성적인 모습이다. 다시 찾아오는 밤 안에서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쫓고, 또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울음소리를 찾아 듣는다. 필자는 이들의 밤이 최후의 밤이 아님을 믿고 싶다. 기어코 판을 흔들어서라도.

우울함이 자욱한 안개 틈 사이를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코끼리는>은 29세 나이로 세상을 뜬 후 부 감독의 유일한 영화이다. 매혹적인 이미지에 이끌려 스크린 안으로 들어갈 듯한 흡입력을 가지지만, 그 안에 가득 찬 허무함은 한 번에 삼켜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독하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기질은 오직 이 작품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남겨졌다. 단, 한편의 영화가 그의 유일한 작품이기에.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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