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처연하게 풀어낸 낙망의 빛: 밖에서 안으로 (전편)
<코끼리는...> 처연하게 풀어낸 낙망의 빛: 밖에서 안으로 (전편)
  • 오세준
  • 승인 2019.12.04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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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An Elephant Sitting Still, 중국, 2018, 234분)
감독 '후 보'(Hu Bo)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단언컨대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이하 코끼리는)는 분명 올해 발견한 뛰어난 걸작(傑作)이다. 아 물론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한편으로 안타까움도 동시에 느껴졌는데, 개인적인 일이지만 작년에 열린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프론트라인)에서 '긴 상영시간(234분)에 겁을 먹지 말아야 했었구나'하는 후회와 29년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한 후보 감독에 대한 슬픔이다. 공교롭게도 영화를 좀 더 일찍보지 못한 내 야속함은 더는 감독의 작품을 볼 수 없는 사실과 묘하게 맞닥뜨린다. '그의 자살'이 자신을 증명하는 한 편의 영화에 대한 방증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코끼리는>이 풍기는 부조리의 냄새는 적어도 이 작품만이 가지는 고유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필자의 기준에서 올해 영화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대부분의 중국 출신 감독들의 작품에서 비슷한 냄새를 느꼈다. 우린 펑 감독의 <내일부터 나는>(From Tomorrow On, I will), 레이레이 감독의 <숨 가쁜 동물들>(Breathless Animals), 주셩저 감독의 <프레젠트, 퍼펙트.>(Present.Perfect), 양이슈 감독의 <갈대, 우거지다>(Luch Reees) 어쩌면 오로지 주인공 '뤄홍우'(황각)의 독백으로 과거와 현재 사이를 긴 시간 따라가야 하는 비간 감독의 <지구 최후의 밤>까지.

많은 영화감독들이 자국의 우울한 사회를 그려내는 것은 보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국 사회'의 경우는 조금은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신기하게도!? 위에 나열된 감독들의 주인공들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병'에 걸린 듯 다분한 우울감을 가진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는 카프카의 단편소설 <법 앞에서>에 등장하는 '문'처럼 열려있지만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빠져나갈 수 없는), '억압'이 작동하는 곳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들이 왜 빠져나갈 수 없는지 모르는, 또 자신이 갇혀있다고 자각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감독이 만들어 놓은 다양한 공간 안에 억류된 존재일지도.

 

<프레젠트.퍼펙트.>, 사진 ⓒ 전주국제영화제
<갈대, 우거지다>, 사진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내일부터 나는>, 사진 ⓒ 전주국제영화제

 

시진핑의 '중국몽', 그 안에서 펼쳐지는 '핀볼'

그렇다. 아직 영화에 관한 얘기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부재에서 뜻하듯 <코끼리는>에 대한 필자의 글은 영화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리고 영화 밖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현재 중국 국가 주석인 '시진핑'이 펼치는 '중국몽'에 대한 부분이다. 2012년 11월 29일 시진핑은 부흥의 길을 참관해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고, 중화민국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실현시키기 위해 강력하게 싸워나가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중국몽은, 사회주의 중국의 건설을 목표로 한 마우쩌둥, 경제발전을 목표로 한 덩샤오핑 그리고 시진핑에 이르러서 새로운 글로벌 강대국 중국의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시진핑의 목표는 '사회주의 현대화'(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통해 선진국 수준까지 국가적 능력 인민의 삶의 질을 현대적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선도적인 강대국'(미국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력'과 '하나 된 인민'이라는 두 가지 핵심 키워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즉, 국가적 힘과 인민의 결속 없이 중국몽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굉장히 국가주의, 전체주의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뜸금없이 국제정치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좀 더 입체적으로 느끼기 위한 하나의 방법 정도로 생각하길 바란다.

'시진핑의 중국몽'을 영화 안으로 가져오면 이것은 '하나의 판'이다. 게임이 시작된 것. 국가의 승리만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야망은 흥미롭게도 인민의 결속이 아닌 '개인을 국가 안에 가두어 두는 형태'를 만들어 낸다. 적어도 영화의 공간은 그러하다. 혼동하지 말자. 어떤 리얼리즘 영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감독의 카메라가 담아낸 허구의 세계임을. 그렇기에 필자는 '후 보' 감독에게 묻고 싶다. 그의 세계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구축되어 졌는지.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에게 대답을 들을 리 만무하겠지만.

그의 4시간에 달하는 <코끼리는>은 분리된 네 가지 이야기를 엮는 다중 플롯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친구의 부인과 불륜을 벌이다 이를 알게 된 친구가 눈앞에서 투신자살하는 상황을 목격하는 동네 조직폭력배 '위청'(장위), 단짝 친구 리카이를 핸드폰 도둑으로 몰며 겁박하는 동급생 위솨이와 다툼을 벌이다 계단으로 밀쳐 중퇴에 빠뜨리는 '웨이부(평유창), 자신들의 딸을 편안하게 키우기 위해 자식들로부터 버려져 양로원으로 가게 된 '왕진'(리총시), 마지막으로 유부남 부주임 교사와 은밀하게 교제를 나누고 있는 '황링'(왕위원)까지, 총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렇듯 청소년, 청년, 노년 등 각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상황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사진 ⓒ
'황링&웨이부', 사진 ⓒ 아이 엠(eye m)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같은 공간 안에 사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웨이부와 왕진은 같은 아파트 주민이며, 웨이부와 황링은 서로 사귀는 관계이고, 웨이부가 밀친 위솨이의 형은 '위청'이다. 텍스트로 느껴지기에 이들의 관계가 무척 복잡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느껴지지만, 오히려 영화는 어떤 한 인물의 분량이 더 많거나 적지 않은 '균형'을 이룬다. 이 부분에서 사실 감독의 뛰어난 재량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영화 속 네명의 인물들은 각각 나름의 사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 '다르지만 같은 것'이라 느껴질 만한 사연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네 명의 주인공이 공유하고 회복하는 방식이 아닌 '모자이크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제시한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즉, 관객의 입장에서 감독이 일률적으로 짜놓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사정이라 할 것이 '동종의 것'이라 느껴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 속 네 명의 인물들은 그들을 이해하려하거나 그렇다고 거부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운명의 열차라도 함께 탄 듯 우연에 이끌려 함 갈 뿐이다. 그들을 모두 끌어안는 것은 그들을 끝까지 응시해야 하는 관객의 자리에서 가능할 뿐.

후 보 감독은 자신의 소설을 원안으로 하여 <코끼리는>을 완성했다. 이 사실은 이 영화가 정교하고 치밀한 스토리텔링을 가졌는지 증명한다. 위청('친구의 집'에서 불륜 중)을 제외하고, 웨이부, 왕진, 황링이 각각 자신들의 집에서 시작해 아파트, 학교, 거리, 양로원, 당구장, 병원, 기차역 등을 경유해 만저우리까지 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네 인물의 경로는 분명 영화 중반까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만, '웨이부'의 사건을 시발점으로 서로가 교차하고 마주하는 관계를 그려 나아간다.

감독이 펼치는 서사는 영화 초반 왕청이 언급하는 '만저우리에 사는 신비로운 코끼리'에 매료되어 그곳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결심이 영화의 표층 위에 자리잡혀 있지만, 실상은 '그들이 사는 동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지독하게 발버둥 치고 있다는 것을 스크린을 통해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만저우리'는 중국의 북쪽, 중러 국경선에 위치한 곳이다. 영화의 마지막 컴컴한 어둠이 짙게 깔린 어딘가에 내린 그들은 과연 코끼리를 마주했을까. 감독이 만든 신화적인 코끼리는 결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울부짖는 코끼리 울음소리만 울려 퍼질 뿐.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필자는 이 울음소리가 결코 '최소한의 희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진핑이 짜놓은 '중국몽'으로부터 깨어내기 위한 장치이다. 약속에 땅에 찾아온 그들에게 코끼리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되려 칠흑 같은 어둠에 잠식 당한 채 그곳이 어디인지, 정말 만저우리가 맞는 건지, 감독은 왜 이 장면을 익스트림 롱샷으로 관객과 긴 거리감을 자아낸 건지, 헛소리라도 들린 듯한 코끼리의 울음소리는 희망이 아닌 지독한 현실에 늪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욕망이 자아낸 망상과도 같은 소리이다.

왕링과 교재 중인 부주임은 왕진에게 학교가 곧 철거된다고 말한다. 이어 "그럼 우린 어떻게 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너희들? '가야 될 곳'으로 가겠지"라며, "나는 사무실도 아주 큰 새 학교에 갈 것이고, 너희들은 가장 낙후된 고등학교로 가겠지. 절반 정도는 졸업 후 시장에서 꼬치구이나 팔고 있을 테고"라고 답한다. 빛 한점 없는 교무실에서 그늘로 뒤덮은 왕진의 얼굴, 학교라는 체제 안에 지도자인 교사의 이 말은 국가의 지도자의 권위가 하위 지도자로 이어지는 이념, 이 국가가 가지는 비정상적인 위계질서이다.

자식들이 자신들의 자식을 위해서 부모를 버리는 행위, 파탄 난 자신의 가족의 관계를 보상받으려는 듯 자신의 교사이면서 유부남과 교제를 하거나 자신의 애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친구의 애인을 만나는 등 비정상적인 관계들로 채워진 이 영화는 이들에게 빠져나갈 구멍, 숨조차 쉬지 못하도록 도시에 가둬두면서 밀실공포적인 억압을 강행한다. 그들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하지만, 그들이 보내는 하루를 통해서 이윽고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같은 꿈과 같은 현실에서 깨어날 수 없는 현실을 명징한다.

중화민국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실현이라는 시진핑 국가 주석의 욕망은 인민의 삶의 질을 현대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 말하지만, 후 보가 설계한 <코끼리는>이 보여주는 국가의 모습은 황량하기 짝이 없고, 지속적으로 버림받아지는 것이 자신들의 운명임을 자각한 인물들이 살고 있다. 새 학교의 건설이 지도자만을 위한 곳에서 힘없고 어렵게 사는 피지배층을 수호하는 세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코끼리의 울음소리는 지도자의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피지배층을 향한 경고이다. 지도자가 약속한 땅은 결코 이 땅에 존재하지 않기에.

처연하게 풀어낸 낙망의 빛: 밖에서 안으로 (후편)에서 계속.

 

사진 ⓒ 아이 엠(eye m)
사진 ⓒ 아이 엠(eye m)

[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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