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그러한 지영을 바라보는 시도
'82년생 김지영' 그러한 지영을 바라보는 시도
  • 오세준
  • 승인 2019.10.24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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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후반, 꽤 묘한 장면이 있다. 자신의 외할머니로 빙의한 '지영'(정유미)과 그녀의 엄마 '미숙'(김미경)이 마주하는 대목이다. 꿈을 포기한 채 어려서부터 미싱질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린 미숙이 지영의 손주까지 봐준다는 말에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하는 미숙의 엄마. 반대로 미숙은 자신의 딸이 제정신이 아닌 모습에 오열한다. 그리고 지영의 남편인 '대현'(공유) 역시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어쩌면 이들을 바라보는 관객까지도. 필자의 '묘함'은 '빙의'라는 장치의 효력 때문이다. 극 중에서 지영이 우울증을 넘어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임을 알리는 '빙의'는 지영에게 큰 리스크가 되는 요인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격리시켜야 돼”라는 대현의 회사 동료 말처럼.

하지만 영화는 지영의 트라우마나 과거와 현재의 대비, 현실과의 괴리감 등을 전달하기 위한 '플래시백', 즉 '과거라는 시간'을 더욱더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특히, 영화에서 '과거'는 현재의 어떤 상황이 가진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강력한 요소이며, 지영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 단서로 작용한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빙의라는 설정을 위에서 언급한 '묘한 시퀀스'를 위해서 시작부터 끌고 갔다는 느낌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이 느낌의 근거를 좀 더 보태자면 집안일과 육아, 남편과 시댁, 경력 더 나아가 타인과의 비교 등 그녀가 느껴야 할 우울함이나 복잡함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빙의가 가진 설정은 분명 과하다는 생각이다.

영화니깐. 영화는 현실과 다른 세계니깐. 그렇다면 묻고 싶다. 지영의 세계와 현실은 얼마나 차이가 있는 건지. 이 질문의 의도는 하나다. 영화의 세계와 현실의 차이가 느끼지 못할 만큼 무감각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영화는 가지고 있다. 이미 여러 논란을 겪고 있는 <82년생 김지영>은 조남주 작가의 동명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딱히 이 글에서 논란의 원인 또는 문제점 등을 언급할 생각은 없다. 오로지 '영화'만 가지고 이야기할 뿐. 적어도 영화는 지탄받아 마땅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다. 되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들이 지영을 둘러싼 모든 관계 사이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다. 제목이 뜻하는 그대로 이 글은 그것들을 풀어낸 시도다.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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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하는 카메라의 시선

아침부터 청소와 빨래로 시작해 자신의 딸을 돌보면서 저녁노을을 맞이하는 영화의 시작. 지영이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는 말이 분명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거기다 명절이면 시댁에 내려가 만두, 잡채, 나물, 전 등을 만들며,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도 또 만들어야 하니 그녀뿐만 아니라 얄밉고 전형적인 내로남불 스타일인 대현의 엄마 역시 대단할 따름이다. 또 그녀의 엄마인 미숙은 어떠한가. 죽집을 운영하며, 집안일도 하는 인물이니 이 영화의 엄마들은 너무도 힘들고 지치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이렇게 세대에 걸쳐 한 가족의 위치한 '엄마'라는 인물들을 그려낸다.

그리고 '지영'은 그 이전까지 침묵해왔던, 또 시대가 변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고민, 그 자체다. 이러한 지영을 바라보는, 이전까지 깨닫지 못했던 여성의 고충을 자각하는 인물이 '대현'인 셈이다. 여기서 고민해봐야 하는 점은 '지영의 빙의로 인한 대현의 깨달음'인데 시종일관 리얼리즘에 가까운 현실적인 문제들을 나열하면서도 그 심각성을 깨닫는 계기가 조금은 이질적인 병적 증세인 것이 아쉽다. 논란과 무관하게 영화를 통해서 한 여성의 삶을 '보여주고자'하는 시도, 이것은 '한 여성의 목소리'를 관객이 듣고자 함인데 정신과 의사에게 대현이 상담하는 이야기가 초반에 가장 잘 다뤄진 부분이라 생각해본다면 '지영의 목소리'는 사실상 크게 발휘하고 있지 않은 기분이다.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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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라이트맨 감독의 <툴리>, 노아 바움백 감독의 <프란시스 하>, 마이크 밀스 감독의 <우리의 20세기> 또는 엘프리데 옐리네크 작가의 대표작 <피아노 치는 여자>를 원작으로 한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가 보여준 여성을 담는 감독 나름의 뚜렷한 시선이 <82년생 김지영>에서는 확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일까. 감독은 '지영'의 삶을 보여주기보단 '지영'이 경유하는 지점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영과 대현은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김팀장처럼 힘들지만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었던 그녀가 어떠한 이유로 결혼을 결심했을까. 그녀가 아기를 낳고, 26개월 동안 기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등 되려 '지영'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고 보고 싶어지는 것 역시 지영을 바라보는 카메라가 조금씩 초점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118분, 약 2시간을 달리는 영화. 대표적으로 '화장실 몰래카메라 사건', '대현을 포함한 남성 직장인들의 대화', '스카프를 통한 과거 트라우마'는 지영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관객의 시선과 거리감이 있는 이야기다.

지영은 자신이 타협해야 할 남편이나 가족을 넘어 싸워야 할 사회까지 이미 지쳐있는 인물이다. 카메라가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려는 감독의 욕심이 아닐까. 영화가 대체로 지나친 결과 위주의 사건으로 구성된 것은 원작과 별개로 '지영의 목소리'가 아닌 '모든 여성의 목소리'를 담고자 하는 데 있다. 영화의 균형은 대현의 이야기가 유무와는 별개로, 조금 더 지영의 일상을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고정된 카메라로 길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좀 더 그녀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를 불러일으켜야 했다.

 

지영은 동생 지석으로부터 아버지가 준 펜을 선물 받는다. 이전까지 써내려진 여성의 삶(아버지가 딸들에게 선물한 공책)을 살았다면 이제는 그녀가 자신의 삶을 직접 쓰기 위함이다. 분명한 것은 지영의 이야기가 무엇이 됐든 현대 사회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 '여성의 사회적 구조'를 냉철히 바라보는 필요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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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시대를 재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을 재현하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그 영화가 가진 '분위기'다. 집에 가득 엔틱한 가구들이 있다고 한들 그 공간이 그 시대가 되지 않는 것처럼. 오로지 '그 영화'만이 가진 성질로써 관객의 반응을 얻을 자극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카메라가 지영이 한 개인의 삶보다는 '그녀의 세계 또는 그녀의 관계'에 더 몰입하는 의도와 별개로, 이 영화 안을 차지하는 모든 인물들이 애잔하고 씁쓸해 보이는 것은 인물들의 세계가 풍기는 침울한 분위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남편, 그런 가족, 그런 사회 그리고 그러한 지영까지. 영화를 다시 보면서도 '지영이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녀의 삶과 그런 그녀를 차마 다 알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하는 한 관객인 필자의 미흡한 시도 탓일 수도.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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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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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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