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 두 개의 빛, 하나의 진실
'신문기자' 두 개의 빛, 하나의 진실
  • 오세준
  • 승인 2019.10.2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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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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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크린을 비추는 분명하고 강렬한 명징. <신문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확고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 모치즈키 이소코 기자가 쓴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여러 면에서 읽어볼 수 있는 다양한 콘텍스트를 가졌다. 영화적 연출뿐만 아니라 네러티브, 또 저널리즘, 미디어 등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장치들은 흐트러지지 않고 응집된 조화를 이룬다. 오직 하나의 진실, 영화는 진실이 무엇인지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닌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정부)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주인공들의 발자취를 그린다. '후치이 미치히토'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단순히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초점을 둔, 인간을 축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영화는 신문기자 '요시오카 에리카'(신은경)와 정부 내각 공무원 '스기하라 타쿠미'(마츠자카 토리)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전자는 진실을 알리고자 한다면 후자는 정부의 지시로 진실을 은폐하고, 가짜를 퍼뜨리는 인물이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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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일된 '죽음'

영화는 일본 '2월 20일' 새벽 2시 14분에 시작해 21분까지 약 7분 사이에 발생하는 사건을 발판으로 시작한다.

미디어와 저널리즘 관련한 토론이 벌어지는 TV 프로그램이 한참 진행 중, 요시오카는 자신의 방에서 골똘히 무언가를 적고 있다. 반면에 스기하라는 정체 모를 인물로부터 사진을 받아 유포시킨다. 다음 날 아침 모든 신문에 똑같이 한 교육직 고위 공무원의 불륜 스캔들이 실린다. 명백한 스기하라의 소행. 아니. 총리 직속 내각실의 지시로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다시 스기하라는 자신의 정당과 친밀한 기자의 성폭행 사실을 감추기 위해 피해자인 여성을 야당 관련 스파이, 즉 반대로 유혹을 해온 꽃뱀임을 조작해 유포시킨다. 이와 반대로 요시오카는 명백한 성폭행임을 알리는 기사를 쓰지만, 억울하게도 사진조차 첨부되지 않은 채 지면 구석에 작게 실리고 만다. 마치 사실이 아니라는 듯.

같은 날 동시에 시작되는 이야기는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사건들'을 나열한다. 특히, 극 중에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인물은 '스기하라'이며, 그에 상응하는 인물로 '요시오카'가 굳건히 세워져 있다. 내각부 고위 간부이자 스기하리의 멘토인 '칸자키의 죽음'을 주축으로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뉜다. 1시간가량 달려온 영화의 전반부가 내각실(정부)의 부조리한 만행을 보여줬다면 그 이후는 칸자키가 자살한 이유를 찾기 위해 달려가는, 일종의 수사물로 바뀐다. 감독은 하나의 진실을 두고,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한 두 주인공의 합일점을 만들기 위해 불가피한 희생, 즉 상징적으로 죽음을 다루기 위해 여러 맥락을 집어넣는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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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오카의 아버지는 명예로운 저널리스트로 자신의 밝힌 진실이 오보로 낙인찍혀 억울함에 자살한 인물이다. 이것이 그녀가 이겨내고 극복해야 하는 힘든 '과거'라면, 영화가 진행되는 현재에는 스기하라의 스승이자 아버지 격인 칸자키의 죽음으로 되풀이된다. 또 영화에서 '장례식장'은 칸자키의 딸과 요시오카를 동일시하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이때 은폐된 진실을 슬픔에 가득찬 유가족에게 묻는 '기자들의 모습'은 내각실에서 상부의 지시에 움직이는 '공무원들의 움직임'과 매우 흡사하게 다가온다. 국민을 위해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본분인 언론이 국가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은, 오히려 이를 묵인하고 국가의 권력 쟁취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모습이다.

결국, 영화 초반 미투 사건 피해자에게 끝내 꽃뱀이라는 화살로 2차 폭력을 강행하는 정부처럼 기자들(저널리즘) 역시 진실을 정부가 아닌 죽은 자(요시오카의 아버지나 칸자키)의 가족에게 따져 묻는다. 똑같이 2차 폭력을 자행하는 셈이다. '반복의 연속성', 다시 말해서 영화는 두 주인공의 공조를 이루기 위해 영화는 점진적으로 두 사람을 같은 감정을 느끼는 위치에 올려놓는다. 잘못된 국가 시스템을 인정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전반부에서 발생하는 사건, 또 발생시킨 장본인인 스기하라는 국민을 위하지 않는 공무원이라는 모순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인물이며, 요시오카는 그러한 사건들이 가진 명백한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하지만 연이은 실패로 흔들리는 신념과 확신을 지켜내는 인물이다.

칸자키의 죽음은 곧바로 스즈하라의 딸의 탄생으로 직결된다. 이로써 주인공들의 모든 관계가 '아버지와 딸'로 이뤄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아버지로서의 위치와 딸로서의 위치가 '스즈하라'와 '요시오카'로 구분되어 진다. 이러한 관계는 세대가 거듭 되도 변하지 않고 더 추악해지는 현실,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를 행하는 국가가 아니라 권력을 독점한 소수 개인 및 집단 또 그것을 돕는 충격적인 언론의 형태까지 모두 직조한다. 또 칸타키가 죽은 장소를 비추어 볼 때 그의 직장 건물 옥상, 안전 철망을 넘어 뛰어내린 행위 자체만으로 국가의 시스템의 귀속된 한 개인이 탈출할 방법은 오로지 '죽음'뿐이라는 점까지.

세대를 아우르며 한 국가 안에 포진된 여러 요소를 압축하는 방식을 통해서 국가와 언론의 민낯을 그럴싸함이 아닌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신문기자>. 어쩌면 비극적인 '죽음'이 닿는 위치가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도달하려 하는 것 같은 싸늘함과 분명한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는 뜨거운 긍지가 함께 어우러져 깊게 다가온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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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연 <신문기자>의 성취는 잘 짜인 네러티브에서 끝나지 않는다. '강렬한 콘트라스트', 기자 사무실과 내각정보실의 극단적인 대비가 영화 전체를 장악한다. "정치에 거리감을 가진 관객들도 많지만, 이 영화의 영상미에 이끌릴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라고 말하는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 영화는 관객이 분명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빛과 어둠이라는 명확한 이분법을 자양분 삼아 국가의 권력, 이에 순응하는 저널리즘의 이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 카메라의 움직임의 경우 역시, 줌 인-아웃, 핸드헬드 등 생동감 있는 움직임으로 기자 사무실 속 인물을 담아내는 한편, 내각 정보실의 경우에는 고정된 카메라로 익숙지 않은 구도나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각도를 통해 억압된 인물들을 조명한다. 이러한 상반되는 연출적인 기법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명백하게 보여주며, 요시오카와 스기하라가 처한 상황에 대한 감정을 또렷이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한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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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모니터

<신문기자>가 가진 흥미로운 점은 '매체의 활용'이다. 지면 신문이 아닌 컴퓨터나 휴대폰을 통한 인터넷으로 뉴스를 확인하는 요즘. 영화는 '지면 신문'을 강력히 내세운다. 표면적으로 이것의 사용은 분명 시각적인 전달에 유용함, 즉 기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요시오카가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으로 시작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편집장을 통한 검수, 수정 그리고 인쇄까지. 더 나아가 영화는 인쇄하는 장면을 유심히 찍으며, 배달되는 과정까지 꽤 길게 담아낸다. 마치 '진실'이 국민에 손에 직접 닿고자 하는 과정을 그리고자 한 것처럼.

하지만 이러한 장면을 담기 위해서 '지면 신문'을 활용했다고 보기에는 그 의미가 조금 빈약하다. 필자는 지면 신문의 특징인 '모자이크 형식'에 주목한다.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마셜 멕루언'은 저서 <미디어의 이해>에서 "신문이란 책의 형태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모자이크의 형태, 즉 참여를 요하는 형태를 지향해 왔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인쇄와 취재의 가속으로 인해 이러한 모자이크적 형태는 (…) 참여적인 것이고 '스스로 해라'라는 식의 세계라는 사실에 조심스럽게 주목해 본다면, 우리는 민주 정치에 왜 그렇게 필요한가를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맥루언의 견해는 내각정보실 실장 '타다'의 "이 나라의 민주주주의는 형태만 있으면 돼"라는 말과 대비되며, 요시오카의 아버지의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믿고 투쟁하라"라는 말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렇다면 영화 속 형태로 유지되는 민주주의 모습은 스기하라를 포함한 정장을 입은 수많은 공무원들이 컴퓨터 '모니터'에 집중한 채 의도적인 증거 조작을 바탕으로 한 가짜 뉴스 유포와 댓글로 여론 조작은 물론, 명백한 불법 행위인 신상털기와 민간 사찰까지 자행하며 언론과 미디어를 자신들의 수족처럼 여기는 내각정보실 그 자체다.
 
반대로 영화 속 '스스로의 투쟁'은 요시오카가 취재(지면 신문)하는 모습 그 자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시스템에 살고 있는 국민의 위치는 스크린을 보고 있는, 영화를 보기 위해 참여한 관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영화 속 국민의 참여는 '트위터'를 통해서 조작된 정보를 접한 반응으로 참여가 이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스스로의 참여'로 봐야 할지 아니면 내각정보실 실장의 말에 복종하는 공무원들과 같이 비판적이지 않은 태도로 받아들였다고 봐야 할지 의문이다.

 

스즈오카는 아내가 자신이 조작한 스캔들 뉴스를 가리키며 "뭐가 진실이야?"라고 묻는 상황에서 쉽사리 진실을 꺼내놓지 못한다.
가족의 물음에도, 또 국가의 지시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모습이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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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스기하라를 포함한 내각실 공무원을 어두운 방에서 모니터나 복도를 비추는 형광등과 같은 전기로 만들어진 빛으로 조명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요시오카와 그녀가 일하는 신문사는 강렬한 햇빛이 또렷이 밝힌다. 영화의 명징은 이미 시작부터 보여준 셈이다.

결말에 이르러 우리는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있는 스기하라와 요시오카를 마주한다. 진실한 뉴스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순간이다. 그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 너머로 영화는 스기하라의 입 모양만 보여준다. 마치 '고멘'(미안해)라고 말하는 듯.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요시오카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순간 영화는 끝이 난다. 대체 무슨 말이었을까. 필자는 이 질문을 감독이 아닌 관객에게 묻고 싶다. 그녀가 어떤 말을 그에게 했는지. 그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그래야 그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건너올 수 있는지. 함께 '진실'을 손에 쥘 수 있는지.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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