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th BIFF] '레미제라블' 가상의 역사인 동시에 현재의 서사
[24th BIFF] '레미제라블' 가상의 역사인 동시에 현재의 서사
  • 배명현
  • 승인 2019.10.14 0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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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만난 가장 강력한 리얼리즘"
사진 ⓒ 부산국제영화제
사진 ⓒ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레미제라블'은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픈 시네마' 섹션 초청작으로, '레쥬 리'(Ladj LY) 감독이 연출했다.

<레미제라블>은 파리의 도시 몽페르메유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이 몽페르메유라는 곳을 세계의 작은 축소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빈민가로 묘사되는 이 땅에서 범죄 조직과 부패한 경찰 그리고 이슬람 무리로 구성된 단체는 각자 나뉘어 세 축이 되었다. 어느 한 쪽이라도 먼저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위험한 이곳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서커스단의 새끼 사자가 사라지고 사자를 찾기 위해 경찰은 폭력을 휘두르며 몽페르메유의 균열을 깨트린다. 불심검문이 이어지는 이때 경찰은 폭력을 휘두르고 우연히 그 광경을 드론 하나가 포착하게 된다. 경찰은 사건을 덮으려 하지만 그 사이 세 축의 균형은 깨어지고 세 축 아래에 있던 소년들은 광기와 폭력으로 무장한다.

영화는 소년들의 광기를 향해 직선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맞이하는 클라이맥스는 이 감독이 정말 첫 번째 장편을 찍은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렬하게 관객을 끌고간다. 빌라의 좁은 층계와 계단. 그리고 높은 층과 낮은 층으로 명징하게 보여주는 권력에 대한 메타포는 영화 그 자체이다. 러닝타임의 마지막 순간 소년들의 대장은 경찰에게 화염병을 던질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경찰 중 유일하게 비폭력적이었던 자는 총을 꺼낸다. 이 최후의 순간을 바라보는 유일한 소년인 드론 주인은 문 하나를 두고 모든 과정을 지켜본다.

감독은 결말에서 시간이 정지한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새로운 계급의 탄생과 이전 계급의 몰락을 격정적으로 담은 후반부 클라이맥스는 영화적 몰입감과 긴장감으로 관객을 밀어 붙인다. 그리고 메시지를 던진다. 새로운 계급의 등장과 낡은 구세대의 부패한 자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새롭게 탄생한 계급의 손을 들어주자니 구조의 영속성을 선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구조 내에서의 변화는 가능하지만 계급과 상부, 하부 구조의 영속성은 유지된다. 반대로 부패한 권력의 손을 들어주자니 그들을 온전히 믿기는 힘들다. 이미 사회를 부패시킨 전적과 함께 답변을 피할 수 없는 질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잘못된 세상에서 '혁명'을 이루어 내지 못했는가'. 그것은 죄이다.

 

사진 ⓒ 부산국제영화제
사진 ⓒ 부산국제영화제

구조 아래에서 일어나는 '혁명'. 이 혁명의 결과는 구조를 파괴할 수 있는가. 아니 구조 속에서 다시금 재 반복될 뿐이다. 구조주 안에서 탈피란 일어날 수 없다.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구조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가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사회,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영역 밖에서 구조를 바라보는 이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이는 그야말로 신이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에서 신의 존재가 등장한다. 바로 관객. 바로 우리이다.

 우리(관객)는 영화라는 구조의 밖에 존재하는 '신'의 자리에 놓여있다. 우리는 영화 속 문고리를 잡은 아이와 함께 선택을 해야만 한다. 감독은 '선택'이라는 무거운 짐을 관객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치밀하고도 고약한 감독은 영화가 끝난 후 이 질문에 대해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듦으로써 영화관 바깥의 자리에서 '현실'에 참여할 것을 강력하게 전달한다. 

영화는 두 개의 선택지를 남겨두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문밖에서 바라보는 것. 이것은 둘 중 그 누구라도 좋으니 살아남는 쪽을 선택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이 선택으로 인해 좋든 싫든 문밖의 역사의 필연을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이다. 노와 돛대 없이 흐름에 떠가는 구조선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문을 여는 것이다. 문이 열린다는 것 이후에는 그 어떤 것도 예상할 수 없다. 문을 열게 되는 순간 신의 자리에서 현실의 구조 속 인물로 재배치된다는 것이다. 더는 신의 자리가 아닌 현실에서 부딛히는 '인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니까. 하지만 이것이 절망 또는 비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감독은 문을 열고 들어감으로써 역사의 흐름 속 작은 배가 되는 것을 거부하려 한다. 희망을 보려 한다. 부셔질 수 없을 것만 같던 구조와 강자라는 급류로 흐르는 필연의 역사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숭고해지는 이 역설적인 선택은 영화가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행위인 동시에 영화적인 일일 것이다. 필자는 '영화'가 세상을 바꾼다는 류의 이야기나 철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은 현실에 존재하는 우리가 바꾸는 것이다. 영화는 강력한 동기를 줄 뿐. 그리고 제쥬 리(Ladj LY). 이 감독도 그러한 것 같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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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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