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무너지고, 무너뜨리는 한 남자 (후편)
[조커] 무너지고, 무너뜨리는 한 남자 (후편)
  • 오세준
  • 승인 2019.10.02 1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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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 (토드 필립스, 2019, 123분)

[조커] 무너지고, 무너뜨리는 한 남자 (전편) 에 이어 계속.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조커'의 이야기는 사실 신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악으로 치닫는 인물'에 대한 서사는 대부분의 영화가 가지고 있기 때문. 흥미롭게도 토드 필립스 감독은 '망상'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조커>를 완성시킨다. 영화 후반 아서가 좋아했던 여성인 '소피'(재지 비츠)와의 모든 순간이 망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은 나름의 반전이면서 조금은 혼란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부분이다. 즉, 이전까지 보여줬던 모든 것들이 아서의 망상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망상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망상'이라는 장치에 대해서

아서는 집에 들어가기 전 언제나 우편함을 확인하고 들어간다. 아서의 엄마 '페니 플렉'이 토마스 웨인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편지를 쓴다. 이 반복은 그녀만의 '강력한 믿음'에서 비롯됐다. 바로 '토마스 웨인이 자신을 사랑했다'라는 것. 그녀는 아서에게 TV에 등장한 토마스 웨인을 언급하며 “그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을 하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던 아서는 그녀가 쓴 편지를 몰래 읽는 순간 숨겨진 비밀!?에 대해 알게 된다. 그녀가 쓴 편지에는 토마스 웨인의 집에서 일하던 시절 두 사람은 사귀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것이다. 영화 중반까지 어린 브루스 웨인, 알프레도 그리고 아버지라 생각한 토마스 웨인까지 만나는 여정은 엄마의 강력한 믿음에서 비롯된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인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다. 하지만 정작 알프레도나 토마스는 모든 것이 자신의 엄마가 망상으로 꾸며낸 얘기라며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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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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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의 시각'으로 펼쳐지는 영화는, 재밌게도 관객에게 “정말 배트맨과 조커는 이복형제야?”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면서(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대부분은 배트맨을 알고 있다는 전제로써), 아서의 엄마가 알고 보니 '망상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까지 도달시켜버린다. 정작 중요한 건 '아서의 탄생'이다. 그를 힘들게 하는 '멈출 수 없는 웃음'은 엄마 애인의 폭력(심지어 엄마는 방관함)으로 인한 뇌 손상으로 발생한 것이며, 그는 입양된 자식이라는 점이다. 그 순간 그가 더는 그녀에게 '해피'라 불릴 이유가 사라진다. 잔인한 말이지만 어쩌면 그녀는 아서가 폭행당하는 순간 울지 않고 웃고 있어야 하는, '폭력적인 이유로 붙인 별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것은 관객에게는 배트맨과의 관계를 허무는 허무함을 주는 동시에 아서에게는 굉장한 충격을 준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엄마와의 관계가 무너진 순간, 다시 앞으로 돌아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멀레이에게 말한 꿈은 그럼 어디서 시작됐냐는 것이다.

 

호아킨 피틱스(좌), 토드 필립스(우),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호아킨 피닉스(좌), 토드 필립스(우),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애초에 '망상'이라는 것은 비합리적‧비현실적인 생각, 감정으로 뒷받침된 주관적 확신에 고집이 아닌가. 엄마와 아서에게 '망상'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며 일종의 관습 같은 것이다. 가난하고, 병까지 가진 두 사람은 자신들이 파괴되지 않을 희망적인 빛이 필요했고, 각각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또는 실제 존재하는 인물인 토마스 웨인과 소피를 불러온 것이다. 그녀인 엄마가 웨인가에 포섭되기를 원했다면 아서는 코미디언으로서 대중 안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어머니의 강력한 믿음은 그녀의 감정으로만 채워진 고집이었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가 영화 내내 웨인가 주변을 서성이는 것 역시 모든 것이 밝혀진 뒤에 보면 어떤 근거로 그러한 확신을 얻었는지, 엄마의 망상 전이로 인한 비합리적이며 비현실적인 것들로, 아서가 뱉는 말 그대로 "코미디"였던 셈이다.

또한, 이 망상은 <조커>라는 DC코믹스의 캐릭터를 추후에 나올 시리즈와 무관한 독립적인 세계관을 갖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배트맨과의 연계성을 무수히 언급하고 활용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아서'가 '브루스'를 찾아가 마치 자신의 동생인 양 바라보고 행동하거나 토마스 웨인을 찾아가 아버지라 말하는 장면들은 '망상'이라는 두 글자로 표현된 거짓된 세계,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영화 속 또 다른 허구적인 세계인 것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망상이라는 장치를 이렇듯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관객의 흥분을 고조시키고, 영화를 더욱 긴장감 있게 만든다.

 

'망상'은 코미디언이라는 꿈을, 토마스 웨인의 자식이라는 가능성을 만들어 준 동시에  

'아서 플랙'이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지탱한 가장 강력한 '사고'이다.

그리고

 

'망상'이 고통스럽게 찢기는 순간, '조커'가 탄생한다. 미쳐가는 세상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로서.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결국, 영화의 결말은 자신을 보호했던, 아니 보호하기 위한 '망상을 끝내기 위한 방법'을 선택한다. 그 이전에 아서가 죽였던 인물과 죽이지 않은 인물에 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이 타인을 경멸하는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이다. 아서는 종종 사람들이 무례하다거나 예의가 없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 지하철 사건이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분출한 우발적 사건이라면 그 이후에 세 차례 살인 사건은 철저히 의도한 것이다. 어머니를 제외한 같이 광대 일을 했던 동료 랜들와 프로 코미디어 멀레이. 분명 두 사람이 비슷한 직업군을 가진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두 사람의 화법이다. 그들은 타인을 자신들의 개그나 농담의 소재거리로 삼으며 비하한다. 랜들은 소인증인 개리를 이용한 농담을 던지고, 멀레이는 자신의 조카까지 들먹이며 대중들에게 조크를 날린다. 반면에 아서는 자신을 비난하는 개그를 펼친다.

아서가 두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단순하게는 '무례하고 예의 없는 사람'에 대한 복수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확장하면 불안정한 자신에게 '총'을 준 랜들, 그는 자신이 아서에게 총을 줬다는 것을 회피한 인물로서 지하철 총격 사건을 어느 정도 일조한 셈이다. (물론, 모든 잘못은 '아서'에게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준 총으로 죽지 않는다. 그 총은 멀레이에게 향한다. 우연히 찾아온 쇼의 출연, 이것은 분명 감독의 의도가 깔린 망상의 마지막 향한 길이다. 맨 처음 자신이 망상에 가득 차 꿨던 상상을 제거하는 일. 멀레이를 죽이는 일을 대중들에게 생중계로 보여주며, 뉴스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동안 오로지 TV와 소통했던 자신을 향한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여러 번의 살인을 통해 보여준 그의 춤은 본연의 자신을 발견한 즐거움의 행동이다. 자신의 엄마인 '페니 플랙'을 죽이는 장면, 마치 축복이라도 내린 듯 창가 너머로 들어온 빛이 더욱 강렬히 아서를 비추는 그 장면은 자신이 병 때문에 늘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알고 보니 웃음을 참지 못하는 그 자체가 바로 본인이라는 새로운 자아(조커)가 탄생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 살인 후 춤을 추는 장면을 통해 어느 정도 증조를 보였던 '아서'는 "내 삶은 코미디 그 자체야"라는 말을 내뱉으며 더 공격적이고 충동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세상은 무너지고 있었고, 자신이 광대 분장을 하고 일으켰던 지하철 총격 사건으로 사람들 모두가 광대 마스크를 쓰며 시위를 벌인다. 멀레이를 죽인 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아서는 어느새 폭동의 중심에서 춤을 춘다.

멀레이 쇼에서 조커는 조크가 아닌 '사실'을 말한다. (적어도 영화 속 세계관 안에서 허용 가능한) 광대로 분장한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는 와중에 부자들은 '찰리 채플린' 영화를 보며 그들만의 세상을 맘껏 누리는 영화 속 장면처럼, 또 마치 자신이 유일한 희망인 듯 떠드는 토마스 웨인(미국의 트럼프를 연상시킨다)의 자만과 더불어 도시가 무너지고 시민이 궁핍한 삶을 살고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없는 무례한 사람들을 향해 말이다.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사진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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