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룸' 오이디푸스의 아이
'더 룸' 오이디푸스의 아이
  • 오세준
  • 승인 2019.09.2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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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최근 웹진에 실린 '배명현 기자'가 쓴 <시대를 넘나드는 감독>을 읽고, 김기영 감독의 <화녀>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연이어 본 적이 있다. 주제 의식과 영상미, 과감한 편집, 과감한 카메라 기법과 미장센 등 수없이 나열할 만 것들을 잠시 뒤로 하더라도, 두 작품이 '이층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이 글에서 다룰 크리스티안 볼크만 감독의 <더 룸>도 똑같은 공간적 배경을 가진다. 심지어 '욕망'이라는 주제까지. 어째서 '이층집'과 '욕망'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인 것일까. 의문이 들면서도 재밌다.

 

사진 ⓒ (주)퍼스트 런

번역가인 '케이트'(올라 쿠릴렌코)와 예술가인 '맷'(케빈 얀센스) 부부는 도시 생활을 접고, 뉴욕의 한적한 동네로 이사를 결심한다. 그들의 거처인 '스프링웰 하우스'라 불리는 고풍스러운 외관의 2층 벽돌집, 짐을 옮기기 위해 한창 청소를 하던 중 맷은 벽지 뒤에 숨겨진 비밀의 방을 발견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방이 말만 하면 무엇이든 생기는 '무한대로 소원을 이뤄주는 방'임을 알게 된다. 어느새 집은 고흐, 마네 등 화가의 걸작을 포함한 고가의 미술품은 물론 값비싼 술, 돈과 보석으로 가득 채워진다. 하지만 방에서 만들어진 것들은 집 밖에 나가면 먼지가 되는 규칙을 안 케이트와 맷. 결국 모든 게 집 안에서만 가질 수 있는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의 욕망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2번의 임신 실패로 지쳤던 부부, 케이트는 맷의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방을 통해서 아들인 '셰인'을 만들어낸다. 아이를 통한 부부의 갈등, 이 방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인물의 등장, 영화 <더 룸>은 케이트와 맷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다.

 

사진 ⓒ (주)퍼스트 런
사진 ⓒ (주)퍼스트 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완벽한 실현

<더 룸>의 중요한 소재인 '비밀의 방', 이것은 분명 초반까지는 케이트와 맷의 욕망을 해소해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들인 '셰인'과 비밀을 알고 있는 '존 도'의 등장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를 풀어내는 장치로 바뀐다. 상당히 인상적인 것은 '셰인'의 등장은 분명 아들로 인정할 수 없는 '맷'과 자식임을 믿는 '케이트'의 갈등을 키우는 동시에 '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셰인'과 '맷'이 싸우는 삼각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존 도'는 아들이 집을 나가서 먼지가 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그를 만든 창조주, 즉 '케이트'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과거 이 집의 살인사건 역시 자신을 살리기 위해 부모가 자살했던 것임을 알려준다. “신이 죽어야 비로소 인간이 살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그러나 '비밀의 방 그리고 절대적인 규칙' 이 조합은 아들인 '셰인의 목숨'을 결정하기 위한 갈등,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분명히 이 영화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욕망의 본질,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하 오이디푸스)인 '근친상간적인 욕망'이다. 오이디푸스는 분명 '남자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해서 아버지를 멀리하기 원한다'는 오해가 다분한 프로이트의 가장 낡고 진부한 관념에서 시작하지만,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장-다비드 나지오'는 자신의 저서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무엇일까? 오이디푸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성적인 욕망에 이끌려 다니는 네 살가량 된 아이가 겪어낸 시련이다”라고 말한다. 즉 오이디푸스는 정신분석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으로서, 아들이 동성인 아버지에게는 적대적이지만 이성인 어머니에게는 호의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성(性)적 애착을 가지는 복합적인 감정을 뜻한다.

 

사진 ⓒ (주)퍼스트 런
사진 ⓒ (주)퍼스트 런

조금 더 나아가 '오이디푸스기'라 불리는 3~4살 정도 된 소년이 겪는, 이에 대해서 '장-다비드 나지오'는 “오이디푸스기의 아이는 그에게 소중했던 대상의 상실을 상상하는 것과 그것이 재현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그 모두가 가능한 (...)”이라고 언급한다. 영화에서 '셰인'은 정확히 오이디푸스기의 위치한다. 영화가 지금까지 소개한 오이디푸스의 개념을 발현하고 있는 것은 '셰인이 비밀의 방에 들어간 순간'이다. 이 부분 역시 나름의 사건 순서가 있다.

[셰인의 이뤄낸 세계(숲과 녹지 않는 눈사람 그리고 집)의 등장] - [케이트가 집을 나간 순간, 맷의 셰인을 향한 정체성 폭로] - [케이트의 회귀와 맷과의 성교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셰인] - [비밀의 방을 통해 셰인이 맷으로 변신], 이 과정은 감독이 정교하게 짜놓은 플롯인 동시에 셰인의 본격적인 '오이디푸스' 발현을 위한 설계이다. 비밀의 방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 시킬 줄 알게 된 셰인은 동시에 맷으로부터 자신이 방이 만든 허상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집을 나가지 않고 자신이 엄마와 살 수 있는 방법 역시 비밀의 방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을 안 그는 곧바로 그 방 안에 채워 넣은 숲이라는 세계에 '스프링웰 하우스'를 만들고 아버지인 '맷'으로 변신해 엄마를 납치에 성공한다. 이어 잠에서 깬 케이트의 몸을 만지고 심지어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는 그의 모습(맷으로 변장한 셰인)을 통해서 '근친상간의 욕망'을 실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 (주)퍼스트 런
사진 ⓒ (주)퍼스트 런

이후에 케이트를 구하기 위한 맷의 등장과 마치 자신과의 싸움처럼 보이는 '셰인'과의 대결은 누가봐도 아버지를 죽이고 어미니를 쟁취하기 위한 '오이디푸스' 그 자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절대적인 위치, 창조자의 위치에 선 아버지라는 존재(맷)가 위기를 맞이하는, 정확히 말하면 패배를 경험한다는 점이다. 또한, 부부가 아이를 가짐으로써 가족으로 확장하는 것이 아닌 한 여자, 남편에게는 아내, 아들에게는 엄마라는 삼각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 결과적으로 '비밀의 방'이 만들어낸 아이를 진짜 자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믿음은 결국 실현할 수 없는 근친상간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시도를 할 수 있도록 만든다 점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다. 또 영화에서 등장하는 '비밀의 방'은 창조주의 욕망을 채워주면서 동시에 그들이 빚어낸 조물주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면서 구성적인 측면으로 볼 때 제2막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셰인은 부끄러움도 죄의식도 없이 자신의 엄마에게 성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욕망이 된 부모를 자신의 환상 안에 끌어들여서

지난 밤 자신의 부모가 했던 성적인 몸짓들을 거리낌 없이 흉내 낸다.

사진 ⓒ (주)퍼스트 런
사진 ⓒ (주)퍼스트 런

셰인을 만든 '비밀의 방'은 마치 생명을 창조하는 '인간의 자궁'처럼 느껴진다. '장-다비드 나지오'는 '왜 근친상간의 욕망이 욕망의 척도가 될까'라는 질문에 “어머니와 잠자고 아버지를 죽인다는 제정신이 아닌 욕망이 지닌 유일한 가치는 자궁 내의 완벽한 원형적 행복으로 회귀하고 싶다는 어리석은 욕망을 비유하는 데 있다”라고 말한다. 즉 자신의 근원적 지점을 어머니 신체의 궁극에서 회복하기 위해 어머니와 성관계를 맺는 영웅의 어리석은 욕망을 일컫는 것이다. '비밀의 방'에서 이뤄내고자 했던 '셰인'의 모든 행동이 역시 자신이 탄생한 장소로서의 회귀였던 것이다. 비밀의 방으로 자신들의 결핍을 채우려 했던 케이트와 맷은 '셰인'이라는 또 다른 결핍을 자아냈다. 신기하게도 셰인은 분명 괴물이거나 외계 생물이 아닌 명백하게 '인간'라는 점이다. (아기, 성인, 노인 이렇게 영화에서 세 번의 변화를 겪는 셰인은 오이디푸스 신화 속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연상시킨다)

<더 룸>은 영화 그 자체로도 상당히 흥미로운 서사와 연출을 보여주지만, 인간의 '욕망'이라는 본질(정신분석학적)에 더 가까운, 풍성한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사진 ⓒ (주)퍼스트 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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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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