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더 실버 레이크> 스크린으로 가져온 브라운관의 것들
<언더 더 실버 레이크> 스크린으로 가져온 브라운관의 것들
  • 배명현
  • 승인 2019.09.22 0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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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더 더 실버 레이크'(Under the Silver Lake, 미국, 2018, 139분)
감독 '데이빗 로버트 미첼'(David Robert Mitchell)

1. 

사진 ⓒ(주)팝엔터테인먼트
사진 ⓒ(주)팝엔터테인먼트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을 만난 감동을 생각하며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영화가 끝난 후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쩌면 이렇게 흥미진진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영화는 완전하게 새롭지는 않으나 기시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강렬하진 않지만 충격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힘은 두 가지 용기로 탄생했을 것이다. 영화적 자의식이 가득한 카메라로 과감하게 2시간 20분을 밀고 나가는 용기. 이는 과거 20세기 영화로부터 받은 영향력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 영화들의 문법에 함몰되지 않는 독특함 말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아니 전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헐리우드를 폭파시키려는 위험한 시한폭탄을 찍으려 한 용기가 그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 2018년의 칸을 기억한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호불호로 완전히 양립된 의견이 극장 밖을 채웠다. ‘대체 어떤 영화이기에’라는 생각을 했고 드디어 오늘 영화를 통해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미첼 감독이 <언더 더 실버레이크>를 통해 기존 영화와 영화산업 그리고 문화 전반을 이야기하는 광범위한 텍스트를 이 페이지에서 모두 이야기할 수도, 하지도 못하지만(본인의 능력 부족도 포함하여) 이 영화는 분명 이전과 이후의 영화를 구획하는 기준선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까지 미국에서 개봉하지 못했다는 소식은 새로운 기준이 될 거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모든 변화의 시작에는 지지와 억압이 따른다는 필연이 존재하니까.

 

사진 ⓒ(주)팝엔터테인먼트
사진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의 플롯은 언뜻 복잡해 보인다. 하지만 여러 갈래의 갈림길 중 딱 한 줄기만 따라가자면 샘(앤드루 가필드)이 사라(라일리 코프)에게 매력을 느끼고 다음 만남을 약속하지만 사라의 행방불명으로 그녀의 흔적을 찾는 것으로 축약된다. 이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개 도살자, 사이비 교주 그리고 노숙자 왕 같은 의문스러운 요소가 러닝 타임을 채우지만 영화는 그녀를 찾아가는 길로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이 움직임을 엄밀하게 보여주기 위해 감독은 자신이 겪은 수많은 맥락을 배치해두었다. 커트코베인, 닌텐도 게임, 암호와 해석 등등. 감독의 청년기를 가득 채운 이들은 <언더 더 실버 레이크>이해하기 위해선 알아야 할 것들이다.

 아니 어쩌면 이 영화의 ‘이후’-이제 영화를 읽기 위해선 동시대를 함께 보낸 대중문화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해석’과는 다른 의미이다- 를 이야기하려면 꼭 알아야 할 것들인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모르고 미처 알아채지 못한 아이콘이 영화에 담겨있기에 ‘전부’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한마디로 영화를 귀결시킬 수는 있을 것 같다. ‘닥치고 즐겨.’ 물론 귀결이라는 단어는 매우 위험하다. 하지만 이보다 정확하게 영화를 관통하는 문장을 현재의 나는 찾을 수가 없다. 이와 비슷(?)한 영화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을 들고싶다. 많은 이들이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이야기했지만 이미지의 유사성보다 감독의 동기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작년 스필버그의 영화가 개봉했을 때 미첼 또한 거장의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감탄과 비탄을 동시에 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예술가가 자신과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의 감정. 강력한 유대감과 동시에 자신의 유일함을 부정당하는 아픔. 물론 두 영화는 전혀 다르다.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하였지만 전혀다른 길을 가는 쌍둥이를 보는 것 같달까. 이 생각과 함께 2018년에 두 영화가 개봉한 것은 어쩌면 완벽한 우연은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 흥미로우며 다루기 벅찬 영화에 대해 써보기로 하였다.

 

2.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이전과 이후의 경계에 서 있는 영화중 하나가 될 것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불안’하다. 카메라는 가게의 창밖을 비추고 ‘개 도살자를 조심하라’는 낙서를  줌한다. 연이어 카메라는 가게를 한 바퀴 훑으며 주인공 얼굴에 도착한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이 가득하다. 샘은 어떤 걸 보고있었던 것일까. 낙서? 아니면 그 낙서를 닦고 있던 사람의 움직임? 아니면 그 창 너머의 무엇? 샘은 고개를 돌리고 가게에 여종업원으로 시선을 옮긴다. 또 줌이 이어지고 컷. 이후 영화는 동선을 만들어 낸다. 몇 달 간 집세를 내지 못한 주인공은 그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집에서 영화의 시선은 베란다 밖으로 이동한다.

이 신은 명백히 히치콕의 이창을 오마주한 장면이다. 감독은 노골적으로 히치콕의 영화를 관객에게 전달하면서 동시에 샘의 욕망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영화는 현실감없는 불안을 유발시킨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매우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이웃은 옷을 입지 않고 생활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시리어스맨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기는 하지만 <언더 더 실버레이크>에선 샘을 유혹하기 위해서(관객을 설득시키기 위해)가 아니라 오히려 영화와 현실의 괴리를 넓히는 데 이용된다.

이때 샘(관객)의 눈으로 한 명이 들어온다. 영화 밖에서 영화 안으로 들어온 인물. 그녀는  매력적인 케릭터이다. 동시에 미스테리하다. 모든 정보가 가려져 있다. 이 인물, 사라는 누구인가. 이제부터 영화는 달리기 시작한다. 샘과 사라는 아주 짧은 만남으로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헤어진다. 하지만 사라는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다. 이제 영화는 그녀를 찾기 위해 움직인다. 영화를 추동하는 힘은 그녀에 대한 샘의 연정이 아닌, 그녀의 정체이다. 알 수 없지만 어딘가 계속해서 흘러들어오는 실마리들. 이 실마리들은 기가 막힐 정도의 우연과 우연의 겹침으로 이어져 있다. 하나의 실마리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으로 연결된다. 실마리와 실마리 사이에 건너 뜀은 없다. 어디선가 겪어본 듯한 이 느낌. 우리는 이 플롯을 수도 없이 경험했다. 다만 영화가 아니었을 뿐. 이는 우리가 수많은 아케이드게임으로 체화한 플롯이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서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색하다거나 억지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유치하게 느껴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지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우리는 <언더 더 실버레이크>가 만들어 놓은 새로운 길을 따라갈 수도, 가지 못할 수도 있다. 혹자는 이야기했다. 이 영화는 이전과 이후의 영화를 갈라놓을 리트머스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그 어떤 비유보다 더 정확한 비유를 본 적이 없다. 영화 안에는 온통 게임과 관련된 코드가 깔려있다. 샘의 티셔츠, LA를 움직이는 동선에 깔려있는 NPC. 숨겨진 통로와 암호. 모두 감독의 청소년기와 함께한 아케이드 게임의 요소들이다.

감독은 브라운관에서 즐기던 닌텐도 게임을 스크린으로 옮겨온 것이다. 로버트 미첼은 게임의 그것을 가져와 이것은 영화라며 능청스럽게 보여주고있다. 그렇다면 이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게임에서 베껴 온 것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단언컨대 절대 아니라고 하겠다. 감독은 철저한 의도하에 브라운관의 것을 스크린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감독은 브라운관과 스크린의 미싱링크 사이를 슈퍼마리오와 히치콕 그리고 커트 코베인으로 연결시켰다. 물론 이 둘 뿐만 아니라 곳곳에 새겨둔 대중문화의 코드를 남은 빈공간 구석구석에 채워두고 있다(자넷 게이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등등).

영화의 세계관을 다시 살펴보자.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허물어진 곳이다. 현실 같지만 현실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판타지라고 하기엔 현실적 규약이 너무나 많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 사이에서 주인공과 관객은 대중문화로 지어진 세계인 <언더 더 실버레이크>로 유입된다. 영화의 초반으로 돌아가 보자. 샘이 거주하고 있는 집 문 앞에 붙어있던 메모. 5일 동안 밀린 집세를 내지 못한다면 나가라는 메시지는 영화인 동시에 게임인 <언어 더 실버레이크>에게 주어진 시간은 5일이라는 의미이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게임 혹은 영화. 영화이면서 게임인 이곳에서 5일 동안 샘은 임무들을 부여받게 된다. 그렇다면 퀘스트는 무엇인가. 사라를 찾아오는 것? 물론 맞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왜 그녀를 찾아야 하는가. 게임 내에서 케릭터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게임 밖에 있는 플레이어가 있어야 한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의 플레이어는 누구인가. 관객? 혹은 감독?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영화와 게임의 경계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이 이전 영화와 이후 영화를 나누는 기준이 될 것이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대중문화의 요소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그 무엇이다. 영화는 정확히 대중 예술을 옹호하고있으며  자본, 혹은 빅 브라더와 같은 ‘큰 손’이 꼭대기를 점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있다. 그리고 감독은 미지의 빅 브라더를 찾아내어 커트 코베인의 기타(청소년기의 반항)로 죽이고 만다. 이 복수는 추억의 수호이자 대중문화에 대한 격렬한 애정을 표하는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이  통쾌하지 만은 않은 이유는 왜일까.

대중음악에서 비밀코드를 읽어내는 행동과 그 행동을 비웃는 작곡가. 대중문화에서 해석을 기반으로 세상의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며 희망을 이야기한 수많은 철학자들과 비평가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경고는 아니었을까. 자신의 추억과 매체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의미만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경고 말이다. 영화는 샘과 사라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영원한 안녕을 말하게 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수많은 문제와 해석을 통해 케릭터는 게임의 끝판까지 도달했지만 결말은 허무한 새드엔딩인 것이다. 

감독은 마지막 샘의 표정으로 결말을 내린다. 샘의 모든 행위는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 표정을 본 적이 있다. 영화의 시작 장면 말이다. 이로써 영화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아케이드 게임에서 결말을 보았다면 그 이상은 없다. 최선은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허무하다면 우리는 게임을 할 수가 없다. 게임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게임을 할 수 없다. 게임은 그 자체로 즐겨야 하는 대상이다. 우리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해석과 암호에 대한 ‘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감독은 이야기한다. “닥치고 즐겨!”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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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배명현 에디터, rhfemdnjf@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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