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찰나동안 빛날 그들의 여정
'유레카' 찰나동안 빛날 그들의 여정
  • 배명현
  • 승인 2019.09.16 0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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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마 신지, 희망이 드리운 새로운 세계를 찍다."
사진 ⓒ서울아트 시네마
사진 ⓒ서울아트 시네마

이전에도 여러 번 <유레카>를 볼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영화관으로 향하지 못했다. 3시간 47분이라는 러닝타임에 지레 겁먹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결국 보아야만 하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오늘 그 영화를 보았고 떨리는 가슴으로 이 글을 쓴다.

<유레카>. 이 영화의 제목처럼 놀라운 일이었다, 아오야마 신지와 만났다는 건. 그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 하스미 시게이코의 제자이며 구로사와 기요시의 친구. 이 두 사람과의 연결점은 나에게 영화를 꼭 보아야만 한다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고 동시에 이는 무거운 강박으로 다가왔다. 러닝타임 이외에 이러한 무게가 그동안 ‘유레카’를  피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드디어 만난 <유레카>는 이야기로도 영상으로도 상당한 울림을 주는 작품이었다. 버스 납치와 승객들의 죽음. 살아남은 기사와 남매. 이날의 슬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 사람. 마을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 여러 이야기가 섞인 와중에 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버스에서 일어난 사건에 더해,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숙덕임이다. 이 웅성거림 속에서 주인공 ‘마코토’의 대사는 살아남은 자의 고요한 절규로 들린다. “내가 살아난 게 죄야?”

 

사진 ⓒ서울아트 시네마
사진 ⓒ서울아트 시네마

살아남은 남매는 어떠한가. 여동생 코즈에는 강간당했다는 소문에 휩싸인다. 오빠인 나오키는 아빠의 죽음과 엄마의 가출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남매는 말을 잃어버린다. 반면 친척들은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을 노리고 둘에게 접근하지만 남매는 이와 동시에 세상과 등진다. 자의로 집에 갇혀 작은 세계를 지키는 동안 2년이 지난다. 이때 마코토가 찾아온다.

따스한 얼굴로 찾아온 마코토는 가정일을 하며 아이들의 보호자 노릇을 한다. 그는 왜 그렇게 했는가. 왜 자매와 함께 살기를 자청하였을까. 자신이 살던 집을 떠나 무작정 남매의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아무 말 없이 받아준 남매는 도대체 왜 받아준 것일까. 정확한 답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 추측해야만 한다면 ‘세 명이 가진 상처’ 이 하나만으로 답이 되지는 않을까. ‘상처’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셋은 어딘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같은 핏줄도,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어떤 유대가 있던 것도 아니지만 이들이 겪은 사건 이후라면, 함께 한집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서로를 살게 하는(생명이라도 유지하게 하는) 힘이 되지는 않았을까.

이 공동체 사이에 문뜩 한 명이 들어온다. 불청객인지 또 한 명의 공동체가 될 사람인지 알 수 없는 한 명. 남매의 사촌이 들어온다. 극장의 관객은 이 인물이 추가됨으로써 묘한 긴장감을 갖게 된다. 그가 이 공동체를 붕괴시키지는 않을까 하고. 하지만 영화는 새로운 사건으로 튀어 오르지 않고 조용히 흘러간다.  오히려 사촌의 도움으로 공동체는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묘한 활기를 가지게 된다. 이 활기는 공동체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마코토의 의견으로 옮겨진다. 그는 버스를 구해와 떠나자고 말한다.

이후부터 영화는 길 위를 떠다니게 된다. 고정된 사회나 규정된 영토가 아닌. 문화, 장소, 사람이 있는 ‘집’을 떠나 길로 향한다. 길 위에는 정처가 없다. 자신의 영토가 아닌 곳에서 잠시 머물다 떠날 뿐이다. 영화는 그 위에서 영토화와 탈영토를 반복한다. 이들의 움직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 움직임 자체에 목적이 있지는 않을까. 그들에게 상처 준 세계를 거부하고 찾아 나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몸부림. 이데아와 같이 존재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경계 사이에서 넷은 가능성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인다.

러닝타임의 후반을 지나 밝혀지는 살인사건의 범인은 나오키였다. 정확한 살인 동기는 나오지 않지만 영화의 맥락과 그의 대사에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돼요.” 사건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사회로부터 죽임을 당한 그는 의문이 생겼을 것이다. 타인은 너무나 쉽게 나를 죽였는데 왜 나는 안되는 것인가. 나는 이 순간 영화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능성. 세상에 그 어떤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야 하는가. 영화는 대답한다. ‘그래야 한다.’

마코토는 나오키와 함께 경찰서로 향한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나오키에게 요청한다. “살아있으라곤 하진 않을게, 죽지는 마.” 나오키는 아마 종신형 혹은 사형을 받을 것이다. 아무리 운이 좋다 하더라도 십수 년을 감옥에서 살 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오키는 다시 한번 그에게 이야기한다. “기다릴게. 널 데리러 갈게.” 이 믿음은 아마 아오야마 신지가 세상에 요청하는 메시지 였을 것이다. 어른을 한 번만 믿어달라고. 지금을 살아가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온 세상이 너를 버렸지만 버리지 않을 사람이 분명히 있다고. 아직 세상은 믿을만 하다고.

세상에 무한한 신뢰.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의 일본의 상황을 안다면 아마 불가능할 절대적 긍정. 아오야마 신지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지하철에서 무차별 독가스 테러가 일어나고 대지진과 자살이 끊임없이 뉴스를 통해 비추던, 그 시기에 이러한 희망을 이야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이 감독이 비참한 세상을 사는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보내는 무한한 믿음과 신뢰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영화는 세상에 대한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 결말 부에 대사가 아닌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롱테이크 부감 쇼트로 찍은 엔딩은 크레딧의 중간이 넘어갈 때까지 이어진다. 아마 영화 역사상 가장 멋진 결말 장면 중 하나로 뽑힐 이 장면은 감독이 말 그대로 ‘유레카’ 였다. 감독 존 포드의 <수색자> 엔딩을 트리뷰트 한 장면에서 시작해, 환상의 시간으로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은 아오야마 신지가 영화를 어떤 자세로 대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가 끝나자 나는 남은 여운을 모두 감각할 세도 없이 <유레카>의 첫 신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밀려오는 쓰나미와 그 앞에 서 있는 코즈에. 그녀는 말한다. “난 알아. 머지 않아 우리를 휩쓸어 버릴 거란 걸.” 신지 감독은 영화를 통해 모든 게 무너져 버린 시점, 그 이후를 새롭게 쓰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모두 부서지고 비참하지만 영화라는 비현실의 역사는 희망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 비현실은 현실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현실을 바꾸려는 한 감독의 희망이 엿보인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어떤 영화는 극장에서 보아야만 하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이 영화 또한 그런 영화이다. 분명히 티브이나 컴퓨터로 보았다면 이 정도의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으리라. 나는 이 글의 독자들이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극장에서 <유레카>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마시라고 전하고 싶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서울아트 시네마
사진 ⓒ서울아트 시네마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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