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공백' (후편)
[벌새] '공백' (후편)
  • 오세준
  • 승인 2019.09.09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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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의 작동원리에 대하여
사진 ⓒ 엣나인필름

 

영화의 시작에서

만약 한 시퀀스에 소제목을 붙일 수 있다면 벌새의 오프닝 시퀀스를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은희는 자신의 집보다 한 층 아래인 집 문 앞에서 애타게 문을 열어달라며 "엄마!"를 외친다. 하지만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문은 열리지 않는다. 잠시 호수를 확인하고,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 진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엄마인 숙자가 문을 열어준다. 그녀는 오로지 은희가 산 반찬 재료를 언급한다. 멍하니 선 은희. 숙자는 은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고, 은희 역시 꺼내지 않는다. 그 순간 카메라는 그녀의 뒷모습을 잡으며 뒤로 멀어져 간다.

 

사진 ⓒ 엣나인필름
사진 ⓒ 엣나인필름

 

다시, 빈집을 두드린 은희는 문 앞에 호수를 확인한 후 자신의 실수 또는 잘못이라 생각하여 다시 집을 향해 걸어 올라간다. 만약 그 집에 누군가 있었다면 그녀에게 잘못 찾아왔다고 말해 줄 수 있었을 테지만 감독은 이런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단지 영화는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은희만을 조명한다.

오프닝 시퀀스는 은희의 움직임을 따라 '빈 공간(집)과의 만남' - '다시 제자리(집)로 돌아감'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움직임에 따른 결과로 엄마인 숙자와의 '단절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단절감'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정확히 말하면 숙자의 시선과 목적이 자신의 딸인 은희가 아닌 '은희가 산 것'이라는 점을 통해서 같은 여성인 동시에 엄마로서 역할이 충실히 수행되고 있는지 의심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하게 생각할 건 '빈 공간'의 존재다. 영화에서 '비워진 것' 또는 '빈 공간'은 어떤 반응을 주는 원인으로 보이거나 어떤 과정을 통한 얻은 결과물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하교 후 아무도 없는 집, 남자친구나 단짝 친구가 떠난 빈 자리, 비워질 수밖에 없는 철거 지역 주민들의 집 더 나아가 반드시 대학을 가라는 기성세대(교사나 부모) 강요도 '왜?'라는 질문에 은희가 이해할 수 있을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면 이 역시 '빈 답변'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숙자를 찾아온 외삼촌이 집을 떠난 후 전등이 꺼질 때까지 아무도 없는 빈 현관을 오랫동안 담는 장면을 통해 감독이 대놓고 '빈 공간'을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 엣나인필름

또 무너진 성수대교 사이, 영지의 빈방, 영지 부모와 같이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부모나 친구가 겪어야 할 '상실'까지. 은희가 마주할 비워진 것 또는 알 수 없는 것은 어떠한 답변을 줄 수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가족조차 외면하는 일상이다. 그렇지만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던 것처럼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나아간다. 이처럼 벌새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의 작동 과정 그 자체이며,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은희의 일상을 단순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숙자와 영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영희는 계단을 오르는 엄마인 숙자를 확인한다. 마치 영화 첫 장면처럼 목청껏 "엄마!"를 불러보지만 끝내 숙자는 뒤 돌아보지 않는다. 분명 두 사람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머물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이상하게 어긋난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하나 더 있다. 영지가 학원을 그만둔 상황, 은희는 그녀로부터 빌려준 책과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은희는 주소를 따라 영지의 집을 찾는다. 하지만 그녀를 맞이하는 건 영지가 없는 빈방이다. 성수대교 참사로 목숨을 잃은 영지는 더는 은희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없는 존재다.

'숙자'는 은희의 엄마이지만 한편으로 오빠의 폭행을 방관하거나 수술에 대한 부모의 동의가 필요할 때 부재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은희에게 자신이 대학에 가진 못한 아쉬움을 꺼내며, 날라리가 되지 말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가정의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그녀. 어깨에 잔뜩 붙인 파스를 보는 은희도 온전히 엄마를 이해하기 어려울 터. 차갑게 식은 부침개처럼 은희와 숙자는 따뜻한 모녀 관계로 보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학문학원 선생님인 '영지'는 은희에게 언제나 따뜻한 차를 건넨다. 은희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영지에게 털어놓으다. 병원에 입원한 은희를 찾아와 "누구라도 너를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라고 일러주는 그녀. 벌새에서 영지는 은희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사진 ⓒ 엣나인필름

 

가족이 다 함께 식사하는 모습보다 아픈 사람들로 가득 찬 6인실 병동이 더 화목하고 밝게 그려지는 건 왜일까. 이 역시 위에서 언급한 '빈 대답'일 수밖에 없을까. 조금씩 어긋난 은희의 움직임 사이에도 '빈 공간'이 남는다.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녀 자신뿐.

영지를 잃고 돌아온 날, 은희는 숙자에게 외삼촌의 안부를 묻는다. "그냥 이상해, 니 외삼촌이 이제 없다는 게"라고 말하는 그녀는 은희에게 막 완성된 부침개를 준다. '은희에게 건네는 숙자의 답변', 이는 영화 처음과 중반 세차게 부르짖던 "엄마!"에 대한 뒤늦은 응답이다. 은희 또한 자신이 영지를 잃고나서야 외삼촌을 잃은 엄마에게 진정으로 닿는 말을 뱉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가족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통점(상실)을 가지며, 앞서 언급한 단절감을 회복한다. 물론 슬프게도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난 후라는 점.

 

사진 ⓒ 엣나인필름

 

누군가 없다는 것이 이상한 일임을 안 은희는 그제야 무너진 성수대교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이역시 영지가 없던 빈 방에서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다. 여전히 반복되는 어긋남과 시간적인 공백. 너무나 야속하기만 하다.

마지막 영지의 편지는 마지막이 돼서야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처럼.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138분을 가득 채운 필름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만 같은 영지의 목소리를 통해 끝이 난다. 신기하게도 영화를 끊임없이 작동시켜왔던 '공백'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을 메꾼 건 꿋꿋이 일어선 은희의 모습이거나 혹은 영화가 끝나고 일어설 관객들 앞에 펼쳐질 일상일지도.

[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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