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넛의 알레고리
코코넛의 알레고리
  • 배명현
  • 승인 2019.07.18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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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켄 로치(Ken Loach),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2016, UK)
사진 ⓒ 영화사 진진
사진 ⓒ 영화사 진진

평생 목수를 하며 살아온 노인이 있다. 그는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당장 수입이 없어진 그는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가지만 복잡한 절차에 번번이 좌절한다. 평생 컴퓨터와 인터넷을 써본 적이 없는 그에게 도움을 줄 곳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다시 관공서를 방문한 그는 그곳에서 두 아이의 싱글맘인 케이티를 만나게된다. 그는 어려운 형편에 직업도 없는 케이티와 함께 의지하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 동시에 그는 반복해서 수당을 받으려 노력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하게 되고, 실업 급여와 질병 수당 모두 받을 수 없게 되자 관공서 벽에 스프레이로 항의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원한다."

다니엘은 영화 내내 약간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한다. 관공서 지시로 이력서 특강을 듣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이력서 쓰기를 고집한다. 인터넷으로 이력서를 보내고 기록을 남겨야 하지만 그는 자신을 필요로하는 곳에 가 얼굴을 맞대고 육필 이력서를 내민다.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증거 부족으로 실업급여는 물론이고 보조금마저 끊기게 되는 신세가 된다. 그는 평생 살아왔던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세상은 다니엘 보다 빨리 변해버렸고 그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시간에게 패배해 버린 그가 잘못한 것이라 말해야 할까.  다니엘은 모든 돈을 쓰자 집에 있는 건 모조리 팔아버린다. 그럼에도 끝까지 남긴 건 일자리를 잃고 만든 나무 모빌과 공구다. 다니엘은 말한다. "자존심을 잃어버리면 모든 걸 잃는 거야"

그 옆에서 케이티는 홀로 아이 두 명을 키우며 안간힘을 쓴다. 학교를 보낼 돈을 얻기 위해 지원금을 신청하고 청소부를 지원한다. 그런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가난해진다. 더이상 가난해질 수 없는데도 가난해진다. 아이들을 먹이며 자신은 며칠을 굶는다. 겨울의 한기가 임대 주택을 잠입한다. 그녀는 식료품 지원소에서 몇 가지를 고르던 와중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통조림을 따서 먹는다. 울면서 말한다. "너무 배가 고팠어요. 너무 어지러웠어요." 지원만으로는 살 수 없어 가게에 갔고 돈을 아끼려 여성용품을 훔쳤지만 바로 들키고 만다. 학교에서 딸이 떨어진 신발로 놀림을 받자 그녀는 매춘을 선택한다. 그녀는 모든 걸 잃어버렸다.

사진 ⓒ 영화사 진진
사진 ⓒ 영화사 진진

다니엘은 케이티의 아들과 친해지려 문제를 낸다. "코코넛과 상어 중에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행동 장애를 가진 아들은 말하지 않지만 며칠 뒤 식사 중 뜬금없이 대답한다. "코코넛" 코코넛은 왜 사람을 죽였을까. 영화는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유는 관객이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펙트의 차원에서 본다면 '식중독과 같은 코코넛이 유발하는 질병이 식인 상어로 인해 죽는 사람보다 많다' 정도 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 의식과 연결해 보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지 모른다. "우리가 안전하게 존재한다고(시스템, 복지체계) 생각하는 것은 훨씬 위험하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코코넛(식량)이 없다면 그것도 사람을 죽인다.

다니엘의 항소 일정이 잡히고 케이티와 다니엘은 복지사의 승소 확신 소식을 듣는다. 다니엘은 자신의 목숨이 벽 너머의 심사의원들에 손에 달렸다는 점을 마뜩잖아하면서도 국가의 시스템과 설계를 무력하게 받아들인다. 과하게 긴장한 그는 잠시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가지만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만다. 심장마비가 찾아왔고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 체온을 잃어버렸다. <나, 다니엘블레이크>라는 제목을 <나,ㅇㅇㅇ>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완벽하지도 않고 완벽할 수도 없는 복지 시스템의 틈 속에 어색하게 끼어버린 사람들. '그들' 일 수도 있고 언젠가의 '나'일 수도 있는 사람들. 안전고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죽을 것인가, 모든 걸 잃을 것인가.

영화 끝에는 다니엘이 적은 항소서는 유언처럼 읽힌다. 그중 마지막 단락은 이렇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는 인간에게 당연한 권리와 존중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자신을 시민의 한 사람이라 말한다. 사전은 '특정한 정치공동체에서 그 공동체가 보장하는 모든 권리를 완전하고도 평등하게 향유하는 개별 구성원을 가리킨다.'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다니엘에게 보장될 권리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의 죽음에서 용의자는 심장마비가 아닌 국가라고 한다면 비약이 되는 걸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8년 전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011년 시나리오 감독 최고은 씨는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라는 메모를 현관문 앞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메모를 붙여놓고 아사하였다. 32세의 젊은 배고픔은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문장 두개 남기고 갔다. 그해 나는 까까머리와 교복을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다. 더는 매주 월요일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충성을 다 하지 않을 수 있었고,  남몰래 최고은 씨를 품어두었다. 나는 삶의 언젠가, 가장자리에서 중심으로 들어왔다고 느낌이 들었을 때에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사진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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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배명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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