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골든 글러브'는 '파티 아킨'(Faith AKIN) 감독 작품으로 2019년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경쟁)에서 초연됐으며, 올해 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금지구역' 섹션에 상영됐다.
70년대 초 함부르크 홍등가, '골든 글러브'는 늙은 부랑자와 매춘부 등이 주로 방문하는 술집이다. 밤낮으로 내려진 커튼에 대해 바텐더는 "사람들이 태양을 볼 때 술을 마시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 이 술집의 단골인 '혼카'(Jonas Dassler)는 자신의 집에 살해한 시체 토막을 숨겨둔 채 살아가는 살인마다. 온종일 독한 술에 취해 자신과 밤을 보낼 여자를 찾는 그는 흉악하고 괴기스러운 얼굴 때문에 집이 없는 늙은 여성을 주 타깃으로 삼는다. 이런 삶을 벗어나기 위해 술을 끊고, 새로운 직장을 구한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술을 마신 그는 같이 일하는 한 여성을 추행해 직장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다시 골든글러브로 돌아온다.
'골든글러브'는 독일 베스트셀러 '하인츠 스트러크'(Heinz Strunk)의 2016년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 역시 실제 19070년대 초 함부르크에서 최소 4명의 여성을 연쇄 살인한 '프리츠 혼카'(Fritz Honka)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는 늦은 밤, '혼카'가 침대에 잠이 든 모습을 한 여성(이미 죽은)을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독한 술과 경쾌한 음악과 함께 거실 한 가운데서 시신을 토막 내는 그의 모습은 전문적인 살인마의 모습이 아닌 이상하게 엉성하고, 불안하며, 꽤 충동적인 느낌을 준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감독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경험은 당시 사회적으로 취약한 여성들에 대한 혼카의 범죄, 야만적인 살해 방식을 지켜보도록 강요하는 기분이다.
살인마에 대한 추악한 에피소드를 담은 이 영화는 자칫 여러 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은 작품이다. 그러나 결코 살인마를 단순히 재현하는 측면이 아닌, 찬미하지 않고 이 인물을 그려낸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물론, 이 글에서 폭력을 가진 영화의 논쟁을 다 설명하거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의도적인 연출에 대해서 딱히 다룰 생각은 없다) 마치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가 계층을 가르는 메타포로 사용되었던 것과 같이 혼카의 집을 방문하는 모든 인물들은 그의 집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썩은 냄새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분명 시체 썩는 냄새가 분명함에도 그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뱉는다. 그리고 어느새 '그 냄새에 익숙해진 듯' 더 이상 불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에 불이 난 그의 집에 진화 작업에 들어간 소방관이 밖에 나와서 '구역질'을 내뱉는다. 어떻게보면 그 소방관은 그의 집을 방문한 최초의 외부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형이나 그가 살해한 여성들은 단순히 가족이나 비슷한 사회계층으로 볼 수도, 그의 초대에 나름 응했던 인물들인데 반해 소방관은 자신의 일, 원치 않지만 해야하는 상황으로 들어가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마치 관객과도 같은 위치로 볼 수 있다. (보기 위해 영화관에 들어왔지만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본 것 같은, 결말에 이르러서야 등장해 그런 리액션을 보이는 것까지) 이런 부분을 생각해볼 때 이 영화가 단순히 미학적인 측면으로(예술성에 의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지만 그가 활동하는 공간과 그 안에 채워진 인물들이 더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왜일까. 영화는 그저 비열한 연쇄살인범의 초상일 뿐일까. 글쎄. 이는 혼카와 추방된 사람들을 포함한 사회 환경과 그 안의 문화에 대한 영화다. 살인적인 행위 자체만으로 이 영화를 논하기보단 끊임없이 자극하는 '고약한 냄새', 마치 혼카의 집에 '막힌 변기'처럼, 또 인물들의 '웃음과 구토'가 목구멍에서 시작했다는 것까지, 이런 것들이 '어디서부터 오느냐'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늘 술에 취해 있는 그들은 현실을 도피하는,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고통을 치유하는,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 오직 '골든글러브'라는 것도, 혼카가 술을 끊고 새 삶을 살려하지만 다시 '골든글러브'에 올 수밖에 없는 것도, 집이 없는 사람들이 그 술집에 방문을 하는 것도, 이 공간에는 밤과 낮을 구분할 수 없는 것까지. 영화의 제목이 살인자의 이름이 아닌 술집 이름인 이유는 2차 세계 전쟁 직후 독일이 지닌 단상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그 술집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감독이 고의적으로 스크린에 투영한 끔찍하고 불쾌한 것들을 통해 이 영화가 가진 일상적이지 않은, 상당히 도발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관객들과 타협할 생각(여러 논란과 자신의 표현)이 전혀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또 감독의 의도와 별개로, 영화가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채워졌으며, 균질되어가는 인물들의 관계, 혼카는 어떻게 태어났는지 등 시작부터 이유 없이 죽어나간 인물처럼 영화가 직면하고 있는 불행한 인물들의 원인은 지독히도 썩어서 알 수 없는 듯하다.
'지독한 스크린의 악취'를 외면할 수 없다면 적어도 관객은, 아니 우리는 오직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할 뿐이다.
[코아르 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