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넷플릭스의 신작 <전,란>은 기대보다는 흥미로웠지만, 새롭지는 않았다. 기본 구도는 세 가지 층위로 나뉜다. 제목에서 전체 구도가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선조 연간, 즉 선조가 재임한 시기에 '전쟁(임진왜란) vs 민란'이 펼쳐지고, 이를 바탕으로 한 집단의 갈등은 '왕(혹은 사대부 양반) vs 천민'의 구도로 압축되며, 드라마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개인으로 내려가면 '이종려(박정민)와 찬영(강동원)'의 우정과 갈등 그리고 대결이 있다. 영화는 세 가지 구도를 반복하여 드러내고 변주한다.
영화의 시작은 '정여립의 난'이다. 조선시대의 계급을 타파하는 '대동'을 내세운 정여립의 참수는 아주 소략하게 등장하는데, 이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흥미가 있다. 전면적으로 다뤄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역사의 사건이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비중 있게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 흔히 정여립은 반란을 도모한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지만, 그의 반란이 정치적 조작이었다는 견해도 크다. 진실과 상관없이 사상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분명 양반과 천민으로 구별되던 조선 중기를 위협할만한 것이었다.
정여립의 참수를 <전, 란>에서도 오프닝에 등장 시킨 연유는 이 작품이 왜란이라는 전쟁보다, 민란에 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다. 일종의 선언적 장면인데, 보다 중요한 것은 정여립의 대동사상이다. 양반과 천민이 평등하다는 생각은 지배층(왕, 양반)과 피지배층(노비, 천민)의 대립구도를 가르며 우정과 복수를 반복하는 종려와 찬영의 한계이자 갈등이기도 하다. 영화의 말미에 찬영이 대동을 대신하여 캐릭터의 이름을 따라 "범동계 어때?"라고 제안할 때, 천하의 주인이 따로 없다는 대동이 이어지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대동의 개념은 느슨하게든 또렷하게든 영화 전체를 가르는 이야기의 바탕이 된다. 하지만 드라마로서의 영화가 주력하는 것은 사상적 측면이나 시대에 관한 조망보다는 종려와 찬영이라는 개인의 대립과 대결로 불꽃을 튀기는 것이다.
본격적인 드라마의 시작은 하루아침에 천민이 되어 버린 찬영의 어린시절이다. 그는 종려의 집에 몸종으로 팔려간다. 찬영이 노비로 전락하는 장면과 아버지의 자살은 간략하게 지나간다. 찬영은 갑작스레 부여된 노비의 모습을 거부하며 도주해 버리지만 이내 끌려와 종려의 몸종 신분으로 매를 맞는 일을 대신 수행한다. 이 일을 견디는 아이는 없었다. 찬영은 굳건하게 버티는 가운데 머리를 쓰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대신 맞는 횟수를 줄이기 위해 종려에게 직접 검술을 가르친다. 어느새 찬영은 종려와 '동무'가 된다.
찬영의 성장은 노비로의 전락, 주어진 환경에 대한 거부, 종려와의 우정으로 압축되며, 그의 신화적 연대기가 폭발하는 지점은 노비 문서의 사멸을 조건으로 종려를 대신해 무과에 장원급제를 하는 장면이다. 신화적 구조의 이야기에 친숙한 이들이라면 능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악한 종려의 아버지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찬영의 적개심이 불타오른다. 하지만 풀 수 없었던 계급적 분노는 전쟁 중 의병활동을 하며 보상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청의검신'이라고 불리며 왜군을 공포에 몰아넣는 대명사가 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그가 입은 푸른 옷, 즉 청의는 장원급제한 이에게 하사된 것이었다. 하지만 찬영이 입게 되면서(그것은 본래의 주인을 찾아간 것이기도 하고, 종려의 것을 빼앗아 간 것이기도 하다), 왜군을 공포로 몰아넣는 별명이자 영웅의 이름이 된다. 찬영의 신화는 아이러니의 겹칩인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검에 분노가 없다."는 찬영의 말처럼 종려는 순진한 캐릭터로 출발한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장원급제자로서의 특혜를 받아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향하는 여정에 동참하면서 세상의 비참을 자신의 눈으로 목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종려의 착한 심성은 나루터에서 시위를 벌이는 백성들을 차마 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아버지의 심복으로부터 가족이 모두 몰살당했으며,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죽인 인물이 찬영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칼을 내리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찬영의 변화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대목이자 변화의 핵심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구성상 타이밍은 어색하고 서투르다. 백성들이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왕을 비롯한 대신들을 앞에 두고 갑자기 나타난 심복으로부터 집안 이야기를 듣는 상황도 리얼리티가 떨어지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백성에게 갑작스레 칼을 드는 종려의 변화는 느닷없다. 무엇보다 심복의 말은 찬영에 관한 것이고, 그의 적개심은 백성이 아니라 찬영을 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설정을 통해 아주 손쉽게 찬영에 대한 복수심을 민중을 향한 분노로 전환시킨다.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적절한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나루터의 찬영이 민중을 죽일 수 없어서 우유부단한 행동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선조로부터 엄청난 힐난을 당하게 되었다고 전개해 보자(이야기를 완전히 바꿔야 하는 수준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이 사건으로 종려는 자신에 대한 무력함과 전쟁의 현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연유로 절망에 빠질 것이다. 이처럼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심복의 등장은 충분히 전환점을 될 수 있다. 그로부터 왜곡된 상황을 전달받은 종려는 찬영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오른다. 이 순간은 나루터 장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선조의 식사 장면에 해당한다. 그런데 접시에 놓인 생선을 두고 불평을 하며 식사를 하려는 왕 앞에 민중들이 나타나 돌팔매질을 하기 시작한다. 여러 개의 돌 중 하나가 종려의 이마 혹은 눈에 맞는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반전의 적개심을 펼친다. 찬영에 대한 분노와 민중의 돌팔매를 향한 광기 앞에 칼을 들어 앞장서서 찌르기 시작한다.
찬영에 대한 배신감과 적개심이 곧바로 백성을 향한 공격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백성을 지키려고 했던 종려가, 백성을 지키려는 태도로 인해 충분히 비난을 겪고, 그 가운데 찬영에 관한 상황이 전해지면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설상가상으로 백성이 던진 돌을 맞게 되었다면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찬영을 향한 마음과 백성을 향한 마음은 겹치게 된다. 종려가 칼을 들어 백성을 내리치는 순간은 자신이 지켜려던 세계(백성, 천민을 향한 동무의 세계)를 포기하는 모습이다. 이를 위해서 나루터 장면에서 백성을 지키려고 한 모습을 보다 또렷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현재의 작품에서 찬영을 향한 복수심과 민중을 향한 분노를 오버랩 시키는 대목은 꽤나 피상적인 설정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찬영이 의적이 되는 순간도 설득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종려의 집을 떠나 말을 타고 달려 한양에 도착한 찬영은 입고 있던 푸른 옷으로 인해 양반으로 오인받고, 백성들에게 중랑천을 넘어 진격하는 왜군에 대항할 의병을 조직하여 이끌 리더가 되어 줄 것을 요구받는다. 놀랍게도 그는 순순히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 그가 이러한 결단을 하게 된 동기나 원인은 찾아볼 수가 없다. 종려가 변화를 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설정과 마찬가지로 찬영 또한 전쟁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함을 따라갈 뿐이다.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순간은 '전쟁의 한가운데'가 될 것이다. 문제는 이를 설득하기 위한 드라마의 속깊은 전개나 변화의 계기에 개연성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웬툰, 웹소설의 시대를 따라 "그래야 한다는 당위론적 설정의 세계관 혹은 마치 이러한 장르의 규칙이 신설된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느라 손쉽게 상황을 넘기고 변화라고 이름 붙인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개연성뿐만 아니라 새부적인 개연성에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무러나 이러한 변화와 선택의 결과 두 주인공은 의병과 토벌대로 만난다. 그 가운데 비귀라는 악명을 지닌 왜장도 이들의 싸움에 가세하여 변주를 일으키고자 시도한다. 비귀는 임진왜란이 현실을 끌어안는 캐릭터이기도 하지만 단순해지고 지루해지기 쉬운 둘의 구도를 흔들기 위해서도 소구된다. 그리하여 비귀는 찬영과 웨스턴 장르의 대결을 눈 앞에 두고 진검승부를 좋아하는 사무라이 정신의 인물로 묘사되는가 하면, 종려의 제안에 의해 의병이었다가 반란군을 제압하는데 한몫하는 인물로도 묘사된다. 하지만 종려의 제안과 변화에 의해 왜병이 관군과 함께 토벌대가 된다는 것도 설득력은 부족하다.
영화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해무가 깔리며 펼쳐지는 세 사람의 대결이자 영화의 마지막 액션 장면의 초반부는 각각의 인물을 뒤집어 모은 결과물이다. 사실 '세 사람'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확연히 다가오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두 명의 대결로 변주되기 시작한다. 찬영과 종려가 대결을 펼치고, 전란으로 인해 못다 한 대화를 나누고, 그 가운데 오해가 풀어지고, 다시 느슨해 질 무렵 기다리기에 지루하다며 비귀가 다시 끼어든다. 그 결과 종려가 죽음을 맞이하고, 찬영과 비기의 최후 대결이 펼쳐진다. 이러한 액션 전개를 보며 들었던 것은 어차피 세 사람의 대결은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전, 란>에서 가장 주력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액션이다. 인물의 갈등과 대화를 대체하는 것이 액션인 셈인데 영화 속에서 액션들이 효과적으로 대체하거나 확장하는 연출을 펼치지 못한다. 세 사람의 대결은, 어쩌면 세 사람 사이의 갈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결국 화해한 두 사람이 비귀를 상대로 연합하는 아주 짧은 순간 정도만이 필요했을 뿐 액션의 대화라는 것을 찾기란 어렵다. 사극이라는 소재의 측면에서 윤종빈 감독의 <군도> 이후 가장 흥미로운 액션 장면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무협에 가까운 액션이 곧 대화라는 것을 이 작품은 증명하지 못했다.
2.
역사(history)는 이야기(story)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역사적 배경을 지닌 영화나 드라마를 두고 매번 논쟁을 벌인다. 이 작품의 경우도 피해 가지 못했다. 몇몇 프로그램에서 역사의 고증을 시도한다. 그 결과 형성된 몇몇 반응이나 댓글을 보며 개인적으로 신기한 것은 단편적인 몇몇 기록으로 몇백 년 전의 사실을 확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한국 사회 속에 만연해 있음을 본다.
역사의 기록이 누군가의 입장에서 쓴 기록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고사하고, 마치 불변의 사실이 있다는 듯이 말할 때가 많다. 역사는 기록된 이이기일 수밖에 없으며, 누군가의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대표적인 기록 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민중의 입장에서 서술될 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역사는 'history', 즉 그의 역사로 불린다. 영화와 드라마 같은 작품이 시도하는 것은 이 역사를 두고 수많은 "어나더 스토리"가 쓰여질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역사를 어떠한 관점이나 맥락에서 다시 쓰는 것을 관대하게 바라보는 여유가 없다. 덕분에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때 매번 작가들은 신중해지거나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팩션(faction)이나 대체역사의 상상력이 잘 통하지 않는다. 실상 어제의 일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삶 속에서 과거를 재현하는 것은 사실성의 여부이기보다는 작가의 의도와 양심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다룰 것인가 하는 생각에 달려있는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것을 중심으로 논의가 펼쳐진다면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는 과거를 돌아보는 보다 넓은 생각들을 공유할 수 있을 텐데, 자주 사실관계에 매달린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어떠한 사실(무려 500년도 더 된 사실성은 어떻게 입증될 수 있는 것인가?)이며, 그 사실은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다는 것일까.
<전, 란>은 임진왜란 시기에 전쟁이 곧 민란으로 전환되었다는 상상력에 공감할 수 있었다. 전쟁이 민란으로 이어지는 파편적인 기록들이 존재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엮으며 하나의 바구니에 담는 전략은 조선 시대의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곧 계급적 위기였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전쟁 기간 동안 백성들은 국가를 지켰다. 하지만 왕은 의주로 피난을 떠난다. 전쟁 기간 동안 기득권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느라 급급하다. 이 모습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다. 7년 간의 전쟁이 끝났을 때도 왕은 백성의 '안위'가 아니라 무너진 '권위'를 세우기 위해 궁전을 재건할 생각뿐이다. 이 모습이 결국 전란의 의병을 민란의 주동자로 전환시키는 데 일조한다.
그런데, 의병 조직은 단일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었다. 왕을 알현하고 공을 세운 노비들을 면천해주자는 소문과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될 때, 김자령이 이끄는 의병 조직 내부에는 이를 믿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결과 의병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된다. 양반 출신인 김자령과 다른 위치에 있던 범동을 비롯한 천민들의 인식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의리를 잃지는 않는다. 범동은 길을 떠나며 모처럼 존경할 만한 양반이었다며 예의를 표한다. 하지만 왕 앞에 도착한 김자령이 떠난 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현실적이었음을 깨닫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취조하는 왕 앞에서 참수를 당하는 김자령이 떠난 이들이 옮았다고 탄식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민중의 편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사대부로 대변되는 양반주의의 이상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현실의 무력감이야말로 상업성을 앞세운 영화가 손쉽게 끌어안기 어려운 지점이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자 빛나는 대목이다. 이탈한 무리들이 지방의 수령을 살해하는 장면과 이로 인해 김자령이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역도로 전환되는 모습이야말로 모순에 빠진 계급의 현실을 타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람의 등불과도 같은 전쟁 앞에서는 같은 편처럼 보였지만, 전쟁이 끝나자 언제그랬냐는 듯 약속은 이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찬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거에 종려의 아버지에게 속았던 것처럼, 또 한 번 왕에게 속는다. 이 이중의 배신은 끝날 수 없는 조선 중기의 현실이자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권리만을 누리려고 하는 현실의 맨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 결과 찬영은 복수의 서사를 작동시킬 뿐만 아니라 '민란'을 일으킨다. 그 결과 <전, 란>은 전쟁이 민란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영화임을 찬영을 통해 천명한다. 하지만 "전"과 "란" 사이에 찍힌 "쉼표"를 건드릴 뿐, 이후 펼쳐질 민란을 전개시키려먼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다. 전과 란의 사이길에 아쉽게도 영화는 그 이상을 전개시키지는 않는다.
액션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했지만, 역사적 다시 쓰기를 시도한 <전, 란>은 하나의 시대를 해석하는 거울의 기능을 할 여지를 제공한다. 그러한 것이 더 심화되었다면, 이토록 다양한 캐릭터의 드라마 속에 세심함이 더 있었다면 끝내 두 인물로 압축되는 단순 반복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있지 않을까 싶다. 천민들 사이에서도 신분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고, 범동의 경우처럼 헛된 희망을 품지 않으려는 모습을 통해 현실을 둘러싼 이해의 관계는 양반 대 천민의 대립에 머물지 않고, 천민 안에서도 다양한 욕망이 있으며 그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이 갈등은 계급적 갈등과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이자 이 영화가 보다 내밀한 역사쓰기가 가능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지점이다.
3.
<전, 란>이 넷플릭스인가 아닌가, 어떻게 소개되어야 하는가는 소모적인 논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많은 이들이 극장의 경험이 아니라 OTT의 경험이 친숙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펜데믹이 이를 재촉했는가 아닌가는 부차적인 문제다. 시가를 촉진시켰을지 몰라도 이미 예상가능한 현실이었다. 관객의 위치에서 많은 이들이 경험한 것을 두고, 무엇을 생각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야말로 필수적이다. <전, 란>이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었다는 사실보다 <전, 란>을 두고 우리가 공유하는 경험의 척도, 혹은 한국영화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소한 이 작품의 미덕은 류승완의 <베테랑 2>나 허진호 감독의 <보통의 가족>에서 드라마와 엮는 지점인 소셜 미디어를 건드리지 않는다. 시대극인 탓이 크지만, 요사이 한국영화가 경쟁하는 것은 서로의 영화가 아니라 세간의 관심과 소셜 네트워크다. <보통의 가족>에서 아이들이 일으킨 사건은 부모와 아이들 간의 드라마나 대립 위에 구축되지 않는다. 이 사건이 촉발하는 것도 영상으로 떠도는 외부적 영상이다. 영화의 시작도 그랬다. 도로 위에서 시비가 붙는 장면은 결국 영화 속 주인공인 두 아들이 변호사와 의사라는 직업으로 인해 이 사건에 관계하게 되지만 아이들의 영상을 이 수준과 동등하게 취급하여 관여자가 아니라 관찰자의 태도로 일관한다. 세간의 떠도는 말들이 있을 뿐 부모로서의 고민을 보여주는 장면은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 정도는 세간의 인식과 일치한다. 오늘날 모든 사건은 드라마의 바깥에 펼쳐져 있다.
혹자는 이 정도면 충분히 대화한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소셜 미디어와 그 정보의 반응에 너무나 길들여진 탓인지도 모른다. 사건에 대한 반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워 그랬다고 양보하더라도 결정적인 반전은 정말이지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들의 애기를 돌보는 방에서 나누는 말을 전송된 화상 카메라를 통해 보게 된 설경구는 여태까지의 태도를 뒤집고, 자신의 딸을 경찰서에 데려가겠다고 선언한다. 이 결정적인 반전에도 부모와 자식간의 대화는 없다. 오로지 블랙박스 영상처럼 관찰적 기록을 보았을 뿐이며 이를 두고 세속적인 반응, 혹은 윤리적 반응을 가장하여 사법적 판단으로 치환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반드시 사법적인 것만 있다는 결론도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 외부의 영상을 통해 드라마를 진행시켜라고 외칠뿐 정작 '인물'의 존재성이나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아이러니 그리고 시대의 모습은 제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최소한 이야기의 본질은 영상을 통한 사실의 유포와 판단이 아니라 영상 속에 담긴 진실을 통해 파괴된 우리 시대의 영혼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상업적인 작품이라고 해도 말이다.
앞의 '1장'에서 서술한 것처럼 <전, 란> 역시 인물의 변화와 심리적 전환들이 매우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최소한 두 인물의 구도를 통해 전쟁과 민란의 역사를 대변하고자 했던 고전적 시도는 외부적 프레임의 개입에 의해 가벼워지고 있는 한국의 주요한 영화들에 비하면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다만, 사극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장면들은 현실을 개입시키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피난을 가는 왕의 행렬 가운데 왕비가 탄 가마가 무너지는 장면과 천연덕스럽게 한마디를 던지는 선조 임금 역의 차승원의 대사는 너무나 쉽게 요사이 벌어지는 현실을 연상시킨다. 그 한 컷을 보다 기본적인 요소에 집중했으면 어떨까 싶다. 쇼츠와 릴스의 시대로 대변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특정한 짤로 영화의 임팩트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기는 어렵지만, 오늘날 한국 영화에 필요한 것은 보다 굵직한 목소리와 세계의 구도가 아닌가 싶다.
개인은 항상 망가지고, 버려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 세계를 바꾸지는 못해도 저항하고, 버팀으로써 의지를 피력하려고 한다. <보통의 가족>의 결말처럼 아이들을 외부적 프레임에 둔 채, 어쩌지 못한 채(아이들에게 거의 직접적인 개입을 못한다) 형제 간의 충돌로 마무리는 되는 엔딩을 보면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영상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할 뿐인 현실의 조각들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이 조각을 가져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영화는 디지털로 확산되는 놀라운 장면의 나열이 아니라 프레임의 경계가 현실화 될 때, 좀 더 철학적으로 정보의 울타리를 넘어 현실이 직접적으로 개입할 때 비로소 진짜를 경험하고 보여줄 수 있다. 지젝 같으면 실재계의 침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계기들은 보다 물리적이고 직접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보통의 가족>은 화려한 디너 식당만큼이나 현실의 거친 민낯을 필요로 한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정보의 지배』에서 "밈은 미디어 바이러스이며 잦은 흥분을 일으켜 담론을 파괴한다"고 언급하는데, 영화에게 필요한 것 또한 밈(혹은 미디어 바이러스)과의 경쟁이 아니라, 담론의 재구성이다. 어떤 가족이 보통의 가족인지 담론을 확연하게 재구성하고 드러낼 때, 어떤 정의가 우리가 새롭게 구축해야 할 담론인지를 드러낼 때, 어떤 계급성의 한계와 전환이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목소리인지 성찰할 때 비로소 영화는 깊어진다.
요즘 서점가에서 반짝인기를 얻었다는 쇼펜하우의 책 제목처럼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오늘날 한국영화가 놓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보루가 아닌가 싶다. 그 의지에 감응할 때, 그 표상에 흥미를 갖게 될 때, 한국영화는 계속해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가야 할 정당성을 마련한다.
최근 한국영화는 거의 제작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오정민 감독의 <장손>이나 이미랑 감독의 <딸에 대하여>가 2만 명의 관객을 넘어선 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어떤 목소리의 필요성이 절실하기 때문은 아닌가라고 돌아보게 된다. 이 결과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 단순한 행운이 아니다. 딸을 이야기하며, 우리 시대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장손을 빌미로 우리 시대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영화들이 내는 목소리는 한국 사회가 지나치고 있거나 상실하고 있는 현실의 지점들이며 여전히 말해져야 할 우리의 얼굴이자 담론이다. 우리는 아마, 이미 거기에 목말라 있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전,란
Uprising
감독
김상만
출연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제작 모호필름, 세미콜론 스튜디오
제공 넷플릭스(NETFLIX)
제작연도 2024
상영시간128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공개 2024년 10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