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터데이 모닝 카툰(Saturday-morning cartoon).
SNL이 아니라 필자와 애니메이션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뉴욕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 소년시절.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주말 아침마다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만화가 방영되었다. 이것이 일주일동안 바쁘게 지낸 부모들에게 조금이나마 여유 있는 수면시간을 제공해주고자 하는 미국 지상파 방송국의 고객서비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지만 어쨌든 유료채널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정해진 시간에만 전파를 타던 TV애니메이션이 시리즈를 망라해 장시간 방영된다는 것은 학교를 쉬는 날이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 지 막막했던 조기유학생으로서는 감사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필자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루니 툰이다. 필자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 워너브라더스가 제작했던 단편 코미디 애니메이션들. 벅스 버니, 태피 덕, 트위티 버드, 로르 러너 등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던. 이는 이른바 '일본영화전문'으로 알려져 있는 필자가 뭔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재페니메이션에 큰 관심을 갖지 않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렇게 띄엄띄엄 해외와 한국을 오가다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본격적인 서울생활을 시작한 필자에게 현지화 된 이름을 가진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재페니메이션을 줄줄 외는 동세대는 이질적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ET를 연상시키는 큰 눈에 뾰족한 코, 어떤 다이어트를 한다한들 흉내 내기 어려울 것 같은 몸매를 가진 캐릭터들의 비현실적인 스타일도 작품에의 몰입을 방해했다.
개인적으로 막역한 친구이기도 한 픽사의 테크니컬 디렉터, 마샤 앨스워스와의 관계는 그래서 특별하다. 대학(브리검영대학교)에서 컴퓨터사이언스와 비주얼아트를 전공한 그녀가 20년을 보낸 삶의 터전이기도 한 픽사의 작품들은 새터데이 모닝 카툰 이후 흥미를 잃었던, 아니, 정확히는 머릿속에서 사라졌던 애니메이션에 대한 흥미를 되살리는 계기였다. 앞서 언급한 그녀의 재직기간에서도 예상할 수 있듯, 마샤는 현재 월트디즈니스튜디오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역사(1986년 설립)가 무색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애니메이션스튜디오로 성장해있는 픽사의 산증인이자 그들에 의해 성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따라서 근래에 참여한 대표작은 당연히 올해 870만 명 넘는 관객을 동원한 <인사이드 아웃 2>(2024)이지만, 오늘 인터뷰에서는 다른 작품의 감독으로 만나보고자 한다. 마침 요즘 들어 생업을 위한 데일리 잡(daily job) 외에 감독으로서 만들고 싶었던, 그래서 일단 단편으로 만들어보기 시작한 개인 작품들이 많은 국제영화제에서 놀라운 반응을 얻고 있어서다. 이를테면 꿈에 그리던 직장의 면접을 앞둔 주인공이 오랫동안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함께해 왔던 작은 트라우마와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의 연출데뷔작 <리틀 티>(2023)는 올해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하 "BIAF", 10월 25일부터 29일까지) 외에도 북미를 대표하는 10개 이상의 국제영화제에 초청, 캐나다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상, 포플랜드 영화, 애니메이션 & 테크놀로지 페스티벌에서 은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고향 우크라이나의 민요와 공예를 접목해 수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재회의 소망을 이뤄내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인연의 끈>(2024)은 우드스탁필름페스티벌을 거쳐 BIAF 단편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홍상현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역시 '픽사'는 지나칠 수 없는 키워드 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오래 근무하셨던 거죠? 어떻게 입사하셨는지 궁금해 하는 독자도 분명 계실 것 같은데요.
마샤 앨스워스
픽사에서 일한지 벌써 18년이 지났는데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요. 대학에서 컴퓨터사이언스와 비주얼아트를 공부하던 중 제 전공이 3D 애니메이션 업계에 완벽한 조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마침 제일 좋아하는 장편애니메이션인 <카>(2006)가 막 개봉했을 무렵이기도 해서 픽사의 인턴십에 지원했죠. 마친 뒤 정규직으로 입사했고요.
홍상현
입사 후에 정확히 어떤 일들을 하게 되셨나요? 참여한 프로젝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뭐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마샤 앨스워스
테크니컬ㆍ디지털아티스트로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만드는 일을 해왔습니다. 입사한 이래 12편 이상의 장편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했고, 이 모든 프로젝트들은 하나같이 다양한 도전과 기회가 되었죠.
첫 작품인 <라따뚜이>(2007)는 한편의 영화, 즉 장편애니메이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무대 뒤에서 차분히 지켜볼 수 있는 계기였어요. 당시 젊은 인턴이었던 저는 주방과 파리의 거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후 캐릭터 제작부서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거기서 담당했던 일은 <업>(2009)에 등장하는 칼과 엘리의 어린 시절 캐릭터를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지나 많은 분들이 사랑하시는 <인사이드 아웃>(2015)의 제작에 참여했는데요. 이 영화 속의 "추상적인 생각(Abstract Thought)"이라는 시퀀스에서 텍스처 작업을 맡았어요. 물론 난이도가 상당했지만, 이 작업을 계기로 애니메이션의 스타일화 된 기법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하나의 전기를 맞기도 했는데 <도리를 찾아서>(2016), <메이의 새빨간 비밀>(2022), <인사이드 아웃 2>(2024) 제작할 때 팀을 이끌며 도리, 메이메이, 조이 같은 주인공들을 맡아 작업하는 한편, 모든 캐릭터의 셰이딩(shading)을 담당하는 팀을 지휘한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홍상현
자, 그럼 이제 슬슬 본인의 연출작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저는 우선 놀라웠던 게, 첫 작품인 <리틀 티>의 인터내셔널 프리미어가 진행되는 장소로 BIAF를 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평소부터 아시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다르셨기 때문 아닐까 하는데요.
마샤 앨스워스
구 소련시절 우크라이나에서 나고 자랐어요. 당시의 우크라이나는 독립 이후와 좀 달랐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련 밖으로 여행할 수 없었고, TV나 언론을 통해서도 나라 밖의 일들을 거의 접할 수 없었죠. 하지만 큰 공장의 CTO를 맡고 있던 할아버지는 비즈니스와 기술 교류를 위해 해외출장을 자주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종종 일본에 기념품이나 공예품 같은 것을 가져오셨는데, 저는 특히 아름다운 인형과 전통의상 사진, 장인 손으로 만든 젓가락 등에 매료되었죠. 그 독특한 문화에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처음 일본에 갔습니다. 이후부터 아시아는 제게 영감의 원천이자 배움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지요.
홍상현
지난해 <리틀 티>부터 올해 <인연의 끈>까지 벌써 두 번이나 초청되셨는데요.
마샤 앨스워스
그러게요! 저로서는 정말 큰 행운이자 영광입니다. 아카데미(오스카)의 인증을 받은 엄격한 과정을 거쳐 제 작품이 인정받고 초청되었다는 사실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요. 매번 부천에 올 때마다 이런 권위 있는 영화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BIAF는 전 세계 영화 제작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입니다. 수많은 나라의 재능 있는 영화 제작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인 한편, 젊은 감독들의 경우 귀중한 인사이트(insight)를 제공하는 마스터 클래스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자리이기도 하죠. 저 역시 매년 혁신적인 애니메이션을 대거 선보이는 플랫폼으로 유명한 BIAF에 응모, 초청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제 작품을 수많은 관객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홍상현
그런데, 벌써 두 번째 초청이신 걸 보면 역시 한국 프로그래머들에게 특별히 어필하시는 매력 포인트라도 가지고 계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웃음)
마샤 앨스워스
BIAF는 기존의 장르애니메이션은 물론 독특하고 새로운 기법을 선보이는 실험적인 성격의 작품들 또한 독특한 개성의 셀랙션을 통해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는 영화제입니다. 제 작품이 2년 연속으로 두 번이나 초청되었던 건 이런 BIAF의 혁신적인 면과 스토리텔링과 창작 자체에서 창의성, 그리고 저만의 접근방식을 추구해보려는 노력이 맞물리면서 이뤄낸 결과 아닐까 해요.
홍상현
그밖에 당신의 작가적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고향,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동서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마샤 앨스워스
그렇습니다.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우크라이나는 풍부한 문화와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호하고자 하는데 제 경우 <인연의 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보존하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유럽 내부에서도 문화유산으로써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는 우크라이나의 전통문화를 관객들과 공유하는 동시에, 여기 바탕한 유대감을 느끼고 싶었어요.
홍상현
한편, 앞서 말씀하신 '영감의 원천이자 배움의 장으로써의 아시아'라는 맥락에서 등장한 게 검은머리에 초록색 눈이라는 독특한 외모의 주인공을 그리는 <리틀 티>가 아니었을까 하는데요.
마샤 앨스워스
몇 년 전, 저는 픽사 생활을 시작했을 당시만큼 기술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창작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데다 실패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두려워하다 보니까 뭔가 계속 정체돼있는 느낌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동네 패스트푸드점에서 산 포춘 쿠키에서 "내면의 비판자를 침묵시키라"고 적힌 메시지를 읽게 되면서 뭐가 절 가로막고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예전에 '내면의 비판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제야 비로소 그게게 어디서 왔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연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결과를 사람들과 공유해보자는 생각에서 완성한 게 <리틀 티>였어요.
홍상현
프로덕션디자인을 맡은 일러스트레이터 나카하라 아리사 작가와는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한데요.
마샤 앨스워스
<리틀 티>를 만들기 시작하던 당시부터 제게는 작품이 스타일이 제가 기존에 픽사에서 만들어온 애니메이션들과 달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아울러 어릴 적부터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좋아했던지라 그런 스타일을 현대적인 애니메이션에 도입해 보고 싶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 재팬타운의 한 서점에서 미술서적을 훑어보다 젊은 여성의 일러스트레이션이 그려져 있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이미지에 매료되어 바로 책을 구입했죠. 하지만 일본어를 전혀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읽을 줄 아는 친구에게 작가에 관한 정보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이후 인스타그램에서 그녀의 계정을 찾아내 바로 연락을 했습니다.
홍상현
아, 나카하라 작가가 영어를 할 줄 아셨나 보죠?
마샤 앨스워스
아뇨, 온라인 번역을 이용했어요. (웃음) 제가 그녀의 작품과 스타일에 얼마나 큰 매력을 느끼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메시지를 보냈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바로 답장이 온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고 그녀와 함께 작업을 해 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그녀는 제 제안에 흔쾌히 동의해주었고 이듬해 <리틀 티>의 캐릭터 중 하나를 디자인해줬지요. 작업을 위한 소통에는 번역도구가 필요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두 사람에게는 영어와 일본어 이전에 '예술'이라는 공용어가 있었으니까요. 코로나 19 사태도 있어서 작품이 완성되고 난 후에야 일본에 가서 나카하라 작가와 대면할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과정이 실로 놀라 운 경험이었습니다.
홍상현
스타일도 그렇지만 BIAF에서 처음 작품을 접했을 당시, 저는 그 안에 담고 있는 메시지가 너무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마샤 앨스워스
아시다시피 <리틀 티>는 막 대학을 졸업한 알렉시스가 인생에서 가장 큰 긴장을 경험하는, 즉 꿈에 그리던 회사에 가서 면접을 보게 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그녀는 이력서와 디자인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한편, '내면의 비판자'그리고 '내면의 어린 소녀'라는 두 '동반자'와 함께하죠.
저는 평소부터 '일상적인 트라우마'의 영향에 대해 탐구해왔어요. 우리는 보통 트라우마를 사고나 폭력, 범죄 같은 큰 사건들과 연관시키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일상생활에서의 지속적인 스트레스, 정서적인 학대, 혹은 방임을 경험하고 이는 각자의 삶에서 대단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죠. 심리학자들은 제가 <리틀 티>에 한 사람의 캐릭터로 등장시킨 '내면의 비평가'가 우리가 안고 살아가는 '작은', 바로 '일상적인 트라우마'에서 태어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화를 제 작품을 통해 차분하게 시도해보고 싶었어요.
홍상현
지난해 작품도 워낙 좋다 보니까 "홍상현의 인터뷰"에 모시는 분들게 항상 드리는 질문도 뒤로 미뤄졌습니다. (웃음) 한국영화와 관련한 경험이 있으신지. 평소 어떤 인상을 가지고 계셨는지 궁금한데요.
마샤 앨스워스
2016년에 <해녀: 바다의 여인들>(2013)라는 단편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느낌이 너무 강렬했어요. 매년 여름이면 흑해에 가서 사촌들과 함께 다이빙을 즐길 때마다 인어가 된 저를 상상하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거든요. 아울러 해녀들의 이야기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켜서 직접 우도를 찾아가 현업에 계신들을 만나보았고, 제주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취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곳에서 촬영한 한국 드라마들도 보게 됐는데요. 그 밖에 <파스타>나 <커피프린스 1호점> 같은 드라마들을 보면서 작품의 완성도와 흥미진진한 스토리라인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요. 또 <푸른 바다의 전설>에 나오는 희극적인 묘사들도 정말 재미있었는데요. 아무래도 언어와 정서의 차이가 있다 보니까 완벽하게 번역된 내용을 접할 수 있었던 건 아니겠지만 무척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영화를 접하게 된 건 이다음 단계에서부터입니다. 제가 일하는 픽사에서 자체적으로 봉준호 감독을 모시고 <기생충>(2019) GV를 진행했는데, 그 자리에서 제작과 관련한 전반적인 내용들을 들으면서 무척 많은 영감을 받았지요. 요즘엔 아예 제 나름대로 리스트를 추려서 한국영화를 보고 있어요. 예컨대 <헤어질 결심>(2022)이나 <3일의 휴가>(2023) 같은 영화들도 무척 좋았고, 감독이 캄보디아계 프랑스인이긴 했지만 <리턴 투 서울>(2023)도 정말 강렬한 작품이었습니다.
홍상현
특히 이번 초청작인 <인연의 끈>의 경우, 4개국 공동제작이라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마샤 앨스워스
저는 독립영화 프로젝트야말로 세계의 예술가들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애니메이션은 대부분의 제작이 비대면과 온라인 등을 통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협업에 상당히 유리하죠. <인연의 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작품의 경우 프리프로덕션 과정에 우크라이나에서 광범위한 취재가 이루어졌는데요. 저는 최대한 진정성 있는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어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수많은 귀한 자료들과 여러 가지 협조를 받을 수 있었지요.
그러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작업을 도와주시던 부친께서 안전을 위해 독일로 이주하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국과 독일을 잇는 원격프로젝트의 형식으로 작품을 완성하기로 결정하고 다양한 비대면 소통의 방식을 활용해서, 프로덕션의 전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과 관련해서 특히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전쟁 때문에 국외로 나오기 힘든 우크라이나의 뮤지션들이 고향과 이별하는 내용을 담은 이 프로젝트에 대거 참여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인연의 끈>은 제목처럼 크리에이터들을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출구임과 더불어 제작에 참여한 우리들 자신과 그 뿌리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기능했습니다.
홍상현
말씀하신 내용과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저로서도 우크라이나 전통문화를 현재적인 애니메이션의 내러티브에 접목시켰다는 점이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요.
마샤 앨스워스
저는 전문적으로 3D 애니메이션 제작을 배웠고, 오랫동안 이 매체와 관련해 전문적인 작업을 진행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픽사에서는 이를테면 캐릭터가 자동차일 경우, '자동차 의상을 입은 사람처럼 행동하는'캐릭터가 아니라 ' 동차의 행동방식을 과정'해서 표현해보라고 이야기해요. '소재에 충실하라'는 거죠. 이 개념이 무척 설득력 있다고 생각해서 제 개인 작업에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 애니메이션 제작에 사용되는 다양한 툴(tools)은 사실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해주지만 캐릭터나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데 있어서 항상 최선의 수단이지는 않죠.
그러나 <인연에 끈>을 제작하면서는 수백 년 전부터 전해져오는 노래의 내용과 그 깊은 역사성을 반영하는데 현대적인 툴을 사용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퍼즐을 풀듯이 현대 애니메이션의 툴을 활용해 스토리를 보완, 보다 스타일리시한 한편, 진정성 또한 담보해내는 결과를 이뤄내기 위해서 말이죠. 만만찮은 도전이었지만 그만큼 즐겁고 보람있는 작업이었습니다.
홍상현
<인연의 끈>이라는 작품의 개성을 표현하는 또 한 가지의 큰 요소는 바로 우크라이나 전통공예의 느낌을 주는 독특한 그래픽 패턴 아닐까 하는데요.
마샤 앨스워스
감사합니다. 우크라이나의 전통적인 크로스 스티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 본 건데요.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이걸 "일종의 유전자 코드"라고 설명합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크로스 스티치는 장식적인 용도로 활용될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 축적된 의미를 전달하는 데도 활용돼왔어요.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통의상은 종종 번영과 장수를 상징하는 이 크로스 스티치로 장식되고는 했지요. 그밖에 결혼식, 집들이 같은 특별한 날 축하용 수건과 태피스트리에 사용되며 풍년, 건강 등을 상징하는 데에도 쓰이고요. <인연의 끈>을 만들면서는 크로스 스티치의 패턴을 축하용 태피스트리에 이야기가 자수로 그려져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내는데 활용했습니다. 관객 여러분께서 하나의 문화적 유산을 통해 그 본질에 다가가는 통찰을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지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많은 아시아의 아티스트 및 필름메이커들과 협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들의 재능, 독창성, 기술에 대한 헌신은 언제나 제게 많은 영감을 줄 뿐더러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 또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되어주었거든요.
제 작품이 영화제에 오지 않는 이상, 단편영화이니 따로 일반상영관에서 관객을 만날 기회는 흔치 않겠지요. 그래도 한국 관객 여러분께는 항상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제 고향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상황은 물론 우리의 문화에까지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계시니까요. 그런 적극성과 열린 태도는 제게 큰 의미가 있고, 한국의 아름답고 독특한 문화, 특히 높은 질적 수준을 자랑하는 영화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앞으로도 영화와 문화, 예술을 통해 많은 소통과 교류를 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난해에도 영화제 일정이 마무리되기 전, 며칠의 여유를 활용해 우도에 다녀온 마샤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개막식을 며칠 앞두고 서둘러 입국해 서울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문화탐험'의 바쁜 스케줄을 이어갔다.
문득 싹트는 기대. 7개월에 걸친 <인연의 끈> 제작일정을 마치자마자 다음 장편을 구상하고 그 와중에 장편데뷔작 준비를 병행하는 왕성한 창작력을 생각하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해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녀의 신작을 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인터뷰 홍상현 영화평론가, krpopper@ccoart.com]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