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 개론>(2012)은 '첫사랑의 신화'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영화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마주하고 있으면, 이 작품의 핵심이 첫사랑의 본질이나 신화에 집중하는 작품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대중적으로 첫사랑의 이미지는 대학교 신입생을 연기한 배우 수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개봉 이후 "국민 첫사랑"이라는 이름표가 따라붙기 시작했고, '첫사랑'의 이야기라는 인상과 함께 케이블 채널의 단골 손님이 되었다. 무심코 텔레비전 앞을 지나치다 화면의 장력에 이끌려 물끄러미 볼 때가 있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예를 들어 <광식이 동생 광태>)나 드라마(예를 들어 <응답하라 시리즈>)에는 여러 작품에서 90년대 대학가의 풍경을 묘사했지만, 이 작품만큼 세월의 흔적이 녹아있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영화를 바라보다 의문이 생겼다. 이 영화의 구조이자 전개 방식인 현재와 과거를 구별하는 지점은 무엇일까. 어차피 두 사람의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시간의 순서대로 전개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닐까. 회상의 구조를 선택하여, 이야기의 구조에 균열을 가하고 시간의 간극을 명확히 드러내고자 함은 무슨 이유인가.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차이에 주목했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한 명은 바라보는 자가 되고, 한 명은 바라보는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장면에서 주로 수지를 바라보는 인물이 이제훈이라면, 현재의 장면에서 엄태웅을 찾아와 바라보는 인물은 한가인이다. 다만, 현재의 남자주인공인 엄태웅의 역할 중의 하나는 과거를 바라봄에 있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반적인 시선은 남자 주인공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과거에 바라보는 자는 이제훈이고, 현재의 바라보는 자는 한가인이다. 그리고 과거를 바라보는 자가 엄태웅이다. 이 가운데 수지는 영원한 대상으로 남겨져 아련한 신화가 된다.
바라보는 자는 대상을 응시하고, 욕망하며, 끝내 이야기와 감정을 전달한다. 수지에게 붙어 있는 '국민 첫사랑'이라는 수식어는 그녀가 바라봄의 가장 끝자리에 놓인 신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캐릭터의 주도적 역할인 바라봄의 차원에서 보자면 남자 주인공에 견줄만한 인물은 한가인이다. 그녀는 15년 전의 남자를 찾아옴으로써 이야기를 추동시키고, 둘의 해후(邂逅)를 통해 욕망을 촉발시킨다(해후의 사전적인 뜻은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만난다'이다).
한가인은 제주도의 집을 재건축하기 위해 건축설계사 사무실을 찾아왔다. 이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만남(해후)으로 인해 두 사람이 가장 처음으로 만난 15년 전이 소환되기 시작한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자는 엄태웅이지만 그녀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시작되지 않았을 일이다. <건축학 개론>은 기억의 소환술을 통해 두 사람의 공백을 메워가는 영화다. 그 가운데 첫사랑의 사연이 있다. 이를 대변하는 직접적인 설정이 있다. 한가인은 새로운 집(첫사랑)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집을 재건축(다시 사랑을 구축)하기 위해 15년 만에 그를 찾아왔다. 재건축한다는 것! 이보다 더 이 영화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건축학 개론>은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한 개론서가 아니라 재건축을 하기 위한 개론서에 가깝다.
사랑을 재건축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는 첫 건축을 하던 그 시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째서 이들이 해후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과거로 회귀하면 바라보는 주체가 바뀐다. 만일, 수지의 입장에서 이제훈을 바라보는 영화였다면 흥미로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데, 지금처럼 낭만적인 영화로 남기는 어려웠을지 몰라도 여성의 욕망을 대변하는 확실한 영화가 될 가능성은 높다.
시선이 변화하는 방식은 통상적인 로맨스 서사에서 반복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제임슨 카메룬의 <타이타닉>(1997)에서도 이야기를 전달하고 회상하는 것은 나이가 든 남겨진 로즈이다. 그녀는 자신을 그렸던 도슨의 그림이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들려주면서, 옛날 옛적 배 위에서 있었던 사랑의 기억을 들려주기에 이른다. 남겨진 자는 사랑의 정서와 함께 이야기의 목적과 의도를 전달하는 자에 속한다. 하지만 과거가 시작되면 이야기의 중심에는 잭 도슨이 서게 된다. 카드 도박에서 탑승권을 딴 잭 도슨이 가까스로 3등칸 승객으로 배에 올라타고, 그곳에서 로즈를 발견한다.
<건축학 개론>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이제훈은 '건축학 개론' 수업에서 수지를 보게 되고, 같은 조가 되어 함께 과제를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학교에서 유명한 남자 선배(쉽게 말하자면 차를 소유한)가 끼어든다. 수지를 기다리던 어느날. 이제훈은 그녀의 집 앞에서 선배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재빨리 돌아서 버린다. 수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배와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도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한 상태였지만 끝내 바라보다가 사라진다. 15년의 공백은 그렇게 일어난다. 바라봄의 정지로.
그리고 영화는 또다시 실패하는 현재를 보여준다. 차이는 있다. 과거의 헤어짐이 남자의 일방적인 오해나 미숙함 때이었다면, 현재의 헤어짐은 남자의 미래에 해당하는 유학과 결혼을 여자가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거와 현재, 남자와 여자 모두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낡은 테이프에 넣어둔 채 택배로 배송했다는 점에서 애당초 마음이 전달될 가능성은 적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이 영화가 첫사랑의 신화를 구축하기보다는 사랑의 엇갈림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을 강조한다. 첫 만남이 이뤄진 후, 15년의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재회하였지만 과거와 다른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의 카피 문구는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이다. 그것은 이제훈도, 수지도, 모두 상대방의 첫사랑이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음을 가리킨다. 이들의 첫사랑은 미완성의 사랑으로 종결되었다. 그것도 15년 전의 한 번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두 번이나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양상과 형태는 다르지만 15년 전의 역사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첫 이야기는 결단코 완성된 사랑이 아니었기에, 이 사랑은 기억 속에서 소환되어 다시 쓰여질 기회를 엿보았으며(통속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미련'이라고 부른다), 결국 여자의 손에 의해 다시 끄집어내어서 쓰려고 하다가 실패한다. 우리는 이 실패를 습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람회의 노래를 통해 반복되는 '기억의 습작'이다.
2.
사람들이 첫사랑의 이야기를 싱그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풋풋함이나 순수함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미숙함이다. <건축학 개론>에서 두 사람은 결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기회를 부여잡지 못했다. 다하지 않은 마음은 다시 꺼낼 수밖에 없으며, 다시 쓸 수밖에 없는 숙명적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반복을 두고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라고 헤겔을 인용하면서 덧붙였다. 이 영화도 어느 정도 그렇게 보인다.
15년 전의 사랑은 선배와 술을 마신 수지의 모습을 목격한 채 쓸쓸히 돌아서야 했던 비극의 첫사랑이었고, 두 사람의 재회는 엄태웅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 한가인의 일방적인 코미디였다. 가장 코믹한 상황은 두 사람 사이를 의식하는 인물로 보이는 고준희가 한가인에게 미주알고주알 엄태웅의 첫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자신이 엄태웅의 짝이라는 은근한 자신감이 서려 있다. 심지어 왠지 언니에게는 말해야 할 것 같다고 운을 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고준희는 과거의 유연석에 해당하며, 과거와 현재는 삼각관계의 축을 세워두고 반복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애잔해지는 순간은 따로 있다. 고준희와의 결혼을 준비한 엄태웅은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 마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한석규처럼 남겨진 부모를 위해 신경 쓰는 애잔한 모습이 등장한다. 고장 난 집을 수리하지 않은 채 견디는 엄마를 보며 엄태웅은 화를 낸다. 그것은 미안함과 죄의식이 뒤섞인 아들의 감정일 것이다. 종종 이러한 장면들은 <건축학 개론>이 로맨스물이 아니라 멜로드라마의 형태에 가깝다는 것을 입증해 보인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떠나는 이와 남겨진 이의 로맨스 서사를 넘어서 가족 멜로로서의 장면들(친구들과의 장면, 가족들과의 장면, 옛연인과의 장면 등)로 확대되었듯이 남녀의 관계를 벗어나 가족의 관계를 끌어안고 성찰할 때 세상의 모든 로맨스는 세상의 중요한 가족 멜로가 된다.
<건축학 개론>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는 서로 다른 가족의 선택에 관한 멜로드라마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엄태웅은 결혼과 함께 부모를 멀리 떠나지만, 한가인은 이혼과 함께 제주도의 집에서 피아노 교습을 하며 홀아버지와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한다. 이들의 엇갈림은 사랑의 엇갈림인 동시에 가족에 대한 엇갈린 판단이기도 하다. 이것은 멜로 드라마의 정치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1950년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중요한 표본으로 여겨지는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를 다른 영화와 비교해 보면 같은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차이를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미국에서는 미망인들이 사회적 이슈 중 하나였다. 대다수는 전쟁 미망인이었다. 그들을 사회적 편견에 따라 타락한 존재로 규정하기 쉬웠고, 그녀들을 처단하는 미치광이 남성이 마력을 뿜어내며 스크린에 등장한다. 알프레드 히치콕과 찰리 채플린은 각각 <의혹의 그림자>(1943)와 <살인광 시대>(1947)를 통해 '과부 살인마'가 등장하는 영화를 제작한다. 이 목록에 로버트 미첨이 과부 살인마로 등장하는 <사냥꾼의 밤>(1955)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이 연쇄살인마가 다소 과격한 사회적 공격의 언어였다면, 더글라스 서크는 그녀들을 살인마의 희생양으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욕망을 내놓으며 가족들의 모순과 편견을 꼬집었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1955)의 미망인은 정원사인 젊은 남자 록 허드슨과 사랑에 빠진다. 신분 혹은 계급의 차이는 시대에 속한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곱게 보지 않는다. 여자의 경제력이 낮은 계급의 젊은 남자를 취하는 모습이 꼴사납게 보인다. 하지만 서크는 이 상황이 왜 허용되지 않는지를 밀어붙인다. 사랑을 향해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이라고 말하면서, 어쩌면 전후 미국 사회의 보수적 지상에서는 쉽게 허락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평등한 천국에서는 이들의 사랑이 가능할 수 있음을 설파한다.
<건축학 개론>은 로맨스물과 가족 멜로의 경계를 오가며, 첫사랑의 신화와 사랑의 재회에 대해서도 묘한 줄타기를 한다. 그 가운데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 작품이 정의 내리는 방식은 엇갈림에 관한 것이다. 현재의 엇갈림은 한가인이 고백을 준비하며 화장하고, 선물을 준비하는 대목이다. 과거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 이제훈의 우유부단함이나 어리숙함 때문이었다면(오해이기도 하다), 현재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한가인이 뒤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준비하고 등장한 그날, 고준희는 두 사람의 만남에 합석을 한다. 그녀는 자신이 약혼녀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엄태웅이 말하는 '어리고 예쁜 애'가 자신임을 피력한다. 어리다는 것은 여성의 미적 기준에 통용되는 세속적 가치이겠지만, 달리 보면 한가인이 어렸을 때 말하지 못했고, 뒤늦게 고백하려다가 실패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린 수지였다면 분명 해볼 만한 게임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어린 고준희 앞에서 한가인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엇갈림의 차원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렇게 정리해 볼 수도 있다. 과거의 미완성은 이재훈의 너무나 빠른 돌아섬 때문이었다면(너무 이른 판단), 현재의 엇갈림은 너무나 늦은 고백이었다고.
3.
엇갈림은 시차를 만들어 내고, 그 시차 속에 우리는 무엇인가 생각하고 고민한다. 사랑이 기록되거나 기록되어야 하는 것은 그 사랑이 이뤄져서가 아니라 엇갈렸기 때문이며, 미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억 속에 강력한 상처(혹은 공백)로 자리잡는다.
<타이타닉>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하는 구조를 지닌 대표적 사랑과 비극의 로맨스다. 잭과 로즈는 사랑을 나눈 다음날, 그러니까 빙하가 덮쳐 온 날 그녀의 약혼자이든 어머니든 누구의 손에 의해서도 처단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갈라놓는 위기는 전혀 엉뚱한 형태로 다가온다. 가족이 아니라 외부(자연)의 거대한 빙하가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빙하는 거대한 가족보다 큰 메타포(공동체, 계급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처럼 세상의 엇갈림과 이루어지지 않음은 기억되고, 기록될 만한 어떤 가치를 획득한다. 종종 요사이 대중문화 속에서 기록되거나 노래되는 방식은 달라졌음을 확인할 때가 있다. 가령,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같은 설렘이나 시작이 중요한 소재가 된다. 트와이스의 <TT>나 <cheer up>같은 곡들이 다루는 것처럼 사랑의 포인트는 초반전에 있다. 이 변곡점이 우리 시대의 주요한 사랑의 태도와 관련을 맺을 것이다. 과거의 발라드의 주요 소재는 사랑의 마지막 챕터인 이별이었다. 아이돌 음악과 발라드를 단순히 갈라치기 하려는 것은 아니라 대중가요의 장르가 달라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과거에 다루던 사랑과 지금 다루는 사랑의 포인트가 달라졌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건축학 개론>은 과거에 속하는 영화다. 요즘 인기를 누리는 청춘 영화들은 첫사랑의 실패가 아니라 설렘에 방점을 찍는다. 대만 영화인 <나의 소녀 시대>(2015)처럼 청춘이라면 설레야 한다는 공식이 어떤 주류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상실의 시대'가 여전히 남겨지는 것은 설렘이나 슬픔이냐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현재의 상실(감)은 기억을 소환하는 메커니즘이라는 매우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억의 소환술이라 부르든, 과거에 대한 재확인이든, 정체성에 대한 재인준의 과정이든 엇비슷한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기억의 메커니즘이 필요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소멸이라는 망각이 매번 일어나기에 중요한 과거와 상실을 다시 떠올리고, 다시 물어보고,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본능이 작동된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으며, 진화론적 입장에서 이 배움(교훈)은 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한 전략으로 작동될 수가 있다.
또한, 기억의 메커니즘의 영화의 본질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사진적 이미지의 본질을 지닌 영화는 재인준 프로세서를 작동시키는 데 매우 적합한 예술 장르다. 과거의 사진을 다시 꺼내어 확인해 보듯이,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항상 재확인의 경험을 통과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납득"(농담처럼 말하자면 <건축학 개론>의 납득이는 기억의 재인준과 무관하지 않은 캐릭터의 이름이다)한다. 종종 기억을 왜곡하더라도, 이 기억에 대해 자신만의 이야기(합리화)로 재구축하는 과정이 영화를 보는 동안 형성된다. 그러한 첫사랑의 기억 속에서 누군가는 수지가 되고, 누구는 이제훈이 된다.
동일한 팩트에 대해 각자가 기억하는 내용이 다른 이유는 저마다의 합리화, 즉 재인준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아니 사랑하기 위해 자신이 편리한 쪽으로 기억을 각색한다. 그래서 <건축학 개론>에서 재인준과 관련하여, 기억과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선택 중 하나는 전람회의 노래 "기억의 습작"을 등장시킨다는 데 있다. 이 노래는, 영화를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기억은 결코 완성되지 못한다. 남자 주인공이 "이제 남은 것은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나 자신을 비방하는 것뿐"이라고 말할 때 한 인간의 기억과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습작 과정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마 좀 더 나이가 들면 아련해질 수도 있고, 자기 환영 속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끝나지 않을 습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기억이 습작되듯이 사랑의 기억 또한 영원히 미숙한 상태로 남는다. 너무나 미숙했기에 고백하지 못했고, 미숙했기에 지켜보기만 했으며, 미숙함으로 기다려야 했다. 그렇지만 이 미숙함을 미워하지는 말자. 인간이 기억을 습작하거나 되새김질하는 것은 미숙하기 때문이다. 성숙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기억을 거론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미숙했기에 미련을 가지며, 미숙했기에 사랑을 간직하려고 든다.
4.
기형도의 '빈 집'의 첫 행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이다. 이 또한 <건축학 개론>을 가리키는 첫 행일 수 있다. <건축학 개론>에는 수많은 집이 등장한다. 과거 '건축학 개론' 수업의 과제를 따라 두 사람이 조사하는 집도 있고, 영화 속 장소로 양평 지역의 폐역인 구둔역도 등장하며,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가는 집이 있고, 제주도에 새롭게 건축해야 하는 가족의 집도 등장한다.
집을 채우는 것은 누군가이고, 누군가의 기억이며, 누군가의 남겨짐이다. 기형도는 빈 집을 채우기 위해 써야 했다. 쓰여지는 순간은 행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행복하다면 굳이 집을 채우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사랑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채우고자 한다. 텅 빈 냉장고를 보며 계란 한 꾸러미를 사오는 것처럼, 세상의 많은 예술가들은 잃고 나서야 집에 대해, 사랑에 대해, 기억에 대해 쓰기 시작한다. 여전히 이러한 방식의 예술은 기억의 습작에 불과하지만, 습작이기에 매번 다시 쓰여질 수 있으며 영원히 노래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놓인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말하는 기본적 행위야말로, 시의 첫 행이자, 예술의 출발점이며, 기억의 소환술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첫 번째 지점이 되고, 근사하게 말하면 성찰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쓰기 위해서는 사랑을 잃을 필요가 있다.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 개론>은 상실의 토대 위에 집을 세우려고 한다. 하지만, 이 집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습작의 집이며, 언제가 비워내야 할 상상의 집이다. 완성될 수 없기에 새로운 사랑 혹은 상실의 이야기는 이용주 감독에 의해서든, 다른 이에 의해서든 새롭게 쓰여지기 마련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건축학 개론>을 두고 첫사랑의 신화라고 기록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실의 습작이라고 적어두려고 한다. 상실했기에, 고로 사랑은 존재의 집터를 세워둔다. 그 위에 무엇을 쓰든, 그 기억은 달콤함만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씁쓸함과 어느 정도의 인내를 거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적 연대기일 것이다. 오래된 낡은 테이프처럼, 영화는 이러한 향수를 감아 리플레이한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